엄마의 기일이었다. 돌아가신지 3년이 흘렀다. 긴 시간이었다. 여자에게 엄마의 죽음은 아이의 출산에 버금가는 중요한 존재사건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삶은 이미 죽음과 배반을 안고 시작된다. 그것이 ‘인생 별 거 없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죽으면 한 줌 재로 될 몸뚱이 나를 다 쓰고 살자’는 억척스런 삶의 방식의 변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엄마의 딸. 굳센 금순이가 됐다고나 할까. 이것은 존재의 깊이와 상관없는 강도다. 단단함. 억척스러움 같은 거. 생의 군살 정도.
사실, 엄마의 죽음이 슬프지 않았다.당시는 삶이 이미 상처 그 자체였기에 더는 상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설마 엄마의 죽음까지? 가 아니다. 나를 가장 염려하던 ‘엄마’의 죽음이기에 그렇고, 상처투성이었던 ‘엄마’의 죽음이기에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심으로써 엄마가 비로소 고통에서 놓여나 편히 사시는 생각을 하니 외려 마음이 평안했다. 또 엄마는 평소 새벽마다 성당에 나가서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원을 풀었다. 평소 혈압이 있으셨는데 차트에 적힌 사인은 갑자기 심장이 멈췄다는 뜻의 긴 병명이었다. 그러니까 전날까지 일상적으로 생활하시다가 새벽에 쌀 씻어놓고 빨래 널어놓고 고추 말리던 거 닦아놓고 갑자기 쓰러지셨다. 정말 예고 없이. 엄마의 고정 레퍼토리대로 ‘해준 것도 없는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게 험한 꼴 안 보이고’ 깔끔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엄마랑 마지막 통화는 돌아가시기 이틀 전이다. 앞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마지막 부분은 생생하다. “조서방(남편)한테 잘 해줘라. 착한 사람이잖니.” 느닷없는 엄마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엄마가 걱정 안 해도 그 사람 잘 살고 기 안 죽어. 걱정 마. 그리고 뭐가 착하다는 거야? 엄마가 지금 누굴 걱정해.” 기가 찼다. 바보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사위라지만, 따끔하게 야단 한 번 안 치고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더니 온 식구 마음고생 시킨 사람한테 뭘 잘 해주라는지. 울화가 치밀었다.
특히나 아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나에게 불쑥 여과 없이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불난 가슴에 기름이 부어지는 격이었다. 각각 배우자 부모의 태도와 마음 씀이 어쩌면 이렇게 천지차인지. 나는 왜 시어머니의 경우없음에 제대로 맞짱 한 번 뜨지 못했는지, 엄마는 왜 저렇게 퍼주고도 쩔쩔 매는지. 왜 아들과 시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늘 당당한지. 이 세상이, 온통 해명되지 않는 일들로 가득했고 그 암흑의 시간을 통과하는 건 여기저기 온몸 부딪히는 고통이었다.
엄마와의 마지막 대화는 가족제도, 그 폭력적 권력관계의 명암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상징적 일화였다. 그래서 나는 가족관계에서 힘에 부치고 상처받을 때마다 엄마랑 내가, 우리 모녀가 불쌍해서 불꺼진 방에서 베갯잇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엄마도 싫고 엄마를 닮은 나도 싫었다. 끝도 없이 회한이 밀려왔다. ‘엄마는 정말 잘 돌아가셨구나. 굳이 엄마랑 나랑 세트로 궁상 떨 거 뭐 있어....’
엄마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지만, 정작 당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했다. 기존의 가치척도인 ‘선악’을 넘어서지 못했다. 엄마(친구와 친척들)의 기준으로, 좋은 대학 나와서 직장생활 하다가 커플링 끼고 장애인이 된 아들. 좋은 직장 다니다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일찌감치 목동의 서른다섯평 집 사고 아들 딸 낳고 잘 살다가 하루아침에 바퀴벌레 나오고 외풍 심한 이십평 아파트 전세로 추락하는 딸은, 그건 다름 아닌 낙오이자 실패였다. 한 평생 당신 삶의 긍지이자 자부심이었던 자식농사가 일시에 흉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연달아 닥친 쓰나미, 엄마는 그 앞에서 망연자실 휘청거렸다. 오빠가 몸이 불편한 거야 겉으로 드러나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엄마는 딸내미의 경제파탄은 친척과 친구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빠가 발병 후 3년 만에 여자친구와 헤어지자 엄마는 오빠보다 더 충격을 받고 더 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셨다.
우리 사회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 - 정상인과 비정상인,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엄마는 자유롭지 못했다. 비정상인이 된 아들과 빈자가 된 딸을, 삶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아무리 성당에 나가 새벽마다 기도를 하고 주님을 찾아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원래 큰 사건이 생기면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기 일쑤다. 수습하다가 지치셨다. 그래도 엄마는 비교적 밝았지만 가슴 속은 이미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 “오빠도 몸이 불편하지만 자유롭게 잘 살지 않느냐” “왜 내 행복을 남들 기준으로 평가하느냐”고 아무리 말해도 ‘내 집 마련해서 가정 꾸리고 사는 자식’ 보는 것을 부모임무의 완결판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를 설득하기엔 논리가 부족했다.
모든 엄마들이 그럴 거다. ‘남들처럼 평범하게’가 이 땅의 엄마들에게는 너무 소박한 바람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자동차나 보험회사 CF에 나오는 ‘정상가족’의 환타지를 버리지 못하는 한, 엄마의 자리에서는 늘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미 한 방향으로만 사고가 굳어져버렸기에, 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형을 기대하고 상상하면서 희망을 찾을 수가 없는 거다. 우리 엄마 역시, 결핍과 우울에 겨워하다가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고 몸 안에서 스위치를 내려버린 것이라고, 나는 엄마의 죽음을 이해했다.
내가 아프면 당신도 앓으시는 어머니(김중식), 원초적 모성으로서의 엄니.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 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시대의 희생양이다. 더 이상 엄마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나부터 아프지 않고 울지 않은 엄마가 되는 일이 남았다. 자식이 울까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웃게 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