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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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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요? 한 달 전에 내가 좋아하고 따르는 사부에게 전화가 왔다. 관에서 주최하는 어떤 프로젝트가 있는데 참여해보라고 했다. 내가 적임자 같다고. 난 재밌을 거 같아서 하기로 했다. 나름은 최선을 다했다. 기획안 내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다. 속으론 신경질 났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렇거니와, 왜 당연하게 마치 부하직원 다루듯이 이런저런 걸 요구하는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소개해준 사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나중에 한번 더 올 것을 요구했다. 갔다. 세 주최 측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말이 전부 달랐다. 중구난방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의견이 봇물터졌다. 방향성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이 알아서' 기획안을 최종적으로 오늘 밤까지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했다. 머리에서 쥐가 날 지..
내겐 너무 SF적인 핸드폰 상용구 핸드폰을 바꿨다. 3년 정도 쓰던 것이 올해 들어서 버튼도 안 눌러지고 종말의 징후를 보이더니만 주말에는 급기야 수발신 기능이 정지됐다. 매장 직원이 내 구닥다리폰을 보고 “참 오래 쓰셨네요”라며 놀랐다. 이참에 스마트폰을 써볼까 유혹도 있었는데 월 통신비가 8-9만원은 나온다고 해서 접었다. 이동통신사를 변경하고 무료폰을 지급받았다. 디자인이고 기능이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무료폰 종류가 세 개밖에 없었고 그중에 삼성 애니콜이 아닌 게 하나뿐이었다. 썩 좋은 단말기가 아니다. 아무려나 나는 여러모로 흐뭇했다. 새 것이 주는 물질감도 보송보송하니 매끄럽고 카메라 등 각종 기능이 편리했다. 무엇보다 그간은 거의 도장파는 압력으로 자판을 눌러야 했는데 슬쩍만 눌러도 글자가 찍히니 좋았다. 그런데 문자를 보..
추석전야,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와인인가. 기후와 기분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음악이다. 가을,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에 화양연화의 감동은 최적화된다. 비내리는 추석. 내 마음은 양조위의 잘생긴 뒤통수와 하얀셔츠 위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 따라 뭉개뭉개 떠다니는데, 곧 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기름 뒤집어 쓰고 전을 부쳐야 한다. 익숙해진 자아분열. 딱히 기다릴 것도 그리울 것도 없는 명절. 뉴스에 나오는 귀경길 인파처럼 내 발걸음은 겅중겅중 기쁘지 아니하다. 가을에 날 설레게 하는 것은 추석이 아니다. 한가위 차오른 달처럼 시린 음악과 빼어난 미장센이 어우러진 영화, 화양연화다. 어제 오후, 멸치선물세트 들고 아는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오픈 카페에서 맥주 한잔 마시는데 핸드폰이 띠리릭~ 양쪽에서 울려댄다. 명절이라고 풍성한..
꽃수레의 '의미와 무의미' 여름휴가 때 월악산 부근 휴양림을 산책했다. 다들 물놀이를 갔는지 통나무집도 비어있고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산으로 난 호젓한 숲길을 넷이서 흩어져 걸었다. 맨 앞에서 이꽃 저꽃 살펴보던 꽃수레. 강아지풀 서너 개 뜯어서 가지런히 세운 다음 뒤돌아 나를 부른다. “엄마, 이거 '푸르지오' 상징이다! 그치?” “어머 그러네. 어떻게 알았어.” 참내, 이걸 눈썰미가 좋다고 칭찬해야하는지 애답지 않다고 꾸짖어야하는지 헷갈렸다. 온통 넓은 집, 쾌적한 주거공간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찬 꽃수레는 삼성은 래미안, GS는 자이, 대우는 푸르지오, 현대는 힐스테이트 등 국내 유수의 아파트 브랜드를, 구구단보다 먼저 외웠던 참이다. 그 뿐 아니다. 아빠랑 둘이 부동산정보 웹서핑을 날마다 해대는 통에 집값이 싼 ..
인터뷰 현장스케치 # 술 나는 인터뷰를 사랑한다. 사람 만나서 얘기 듣는 게 좋다. 나는 술을 사랑한다. 사람 만나서 술을 마시는 게 좋다. 그래서 두개의 카드를 한꺼번에 써버리지 않는다. 아깝다. 인터뷰 마치고 가끔 밥 먹자고 해도 대체로 거절한다. 술 따로 밥 따로 인터뷰 따로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상엽작가 취재 때 5년만에 금기를 깼다. 처음으로 처음처럼 마시며 인터뷰 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연구실 후배까지 셋이 소주 3병. 내가 일점오병쯤 마셨다. 술한모금 메모한줄. 취할만 하면 깼다. 어찌나 아깝던지. 이래서 음주인터뷰가 나쁘다. 취하려고 마시는 술. 취하지 못하니까. 그날 인터뷰 분위기는 좋았다. 화기애애했다. 술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원래 자기정리가 된 사람은, 자기가 삶에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
미안한 충고 우연이다. 어느 단체의 기념행사에 갔다가 아는 선배랑 상봉했다. 거의 4년 만에 보는 얼굴. 반가웠다. 내가 다음 행선지가 있어서 헐거운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날인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었다. 선배가 물었다. ‘나 많이 늙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꼭 저렇게 물어본다. 식상한 대사가 웃겨서 ‘응’ 그랬다. 그리고 며칠 전에 인터뷰를 갔다가 다시 우연히,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두 번의 우연을 기념하여 일을 마치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더라. 재물운이 넘쳐 자랑거리가 많은 사모님 동창의 재회라면 모를까, 없는 자들의 사는 얘기는 사는 게 힘든 얘기로 흐르기 마련이다. 또 삶의 골치 아픈 문제는 대부분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냥 관계가 아니라 끊을 수 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관..
엄마와 수박 커다란 수박만 보면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전형적인 옛날엄마였다. 알뜰과 궁상의 화신. 그래서 여름에 수박을 살 때도 1만원이 넘으면 망설였다. 지금이야 물가가 올라서 1만원 이하 수박이 거의 없지만 4-5년 전만해도 내 기억에 1만 2천원이면 제일 크고 좋은 수박을 살 수 있었다. 근데 엄마는 소심해서 그걸 못 사고 꼭 7-8천 원짜리 수박을 샀다. 대략 아기 머리 크기의 수박이다. 운이 좋으면 잘 익은 것이지만 대부분 못난이 수박이라 그리 당도가 높진 않았다. 내가 5천원 차이로 웬 궁상이냐고 뭐라고 하면 엄마는 “시원한 맛으로 먹지~” 라며 끝까지 저가수박을 고집했다. 어쨌거나 ‘얼음’같은 수박을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할 만큼 엄마에게 여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여름에는 입맛도 없고 음식도 잘 상하..
꽃수레의 설계노트 때 이른 무더위로 푹푹 찌던 5월 마지막 일요일. 꽃수레랑 둘이 집을 나섰다. 동네서점에 찾는 책이 없어서 영등포교보에 가는 길이다. 버스는 냉동차처럼 시원했다. 모녀뿐인 텅 빈 버스에 아가씨 두 명이 탔다. 우리 앞쪽에 앉아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난 창밖을 보고 있는데 꽃수레가 말을 건다. “엄마, 저 부채 귀엽다!” 앞자리 아가씨들의 손에는 각각 팬시점에서 산 것으로 사료되는 노란 병아리 모양과 초록 개구리 모양 부채가 들려있었다. “어머, 저런 게 다 있구나. 정말 예쁘다.” 내가 봐도 깜찍해서 호들갑스럽게 맞장구쳤다. (아홉 살 생일날) 꾀쟁이 꽃수레 그리고 며칠 뒤, 밖에 있는데 전화가 왔다. 꽃수레다. ‘무슨 일이지?’ 요즘 꽃수레는 낮에는 전화를 통 안 했다. 엄마 일하는데 방해될까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