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무슨 글을 쓰고 싶은지 모르겠어요.” 수업시간에 공통적으로 호소하셨죠. 글이 삼천포로 빠지고 주제와 논점을 이탈하고 마무리가 안 된다고. 원래 그럽니다. 사는 것도 그렇지 않던가요. 비냉 먹으려고 했다가 물냉 시키듯이; 암튼, 저는 글에 문제의식 담는 비법?을 족집게로 집어드릴 수 없고 능력도 안 됩니다. 제가 아는 거라곤 책 읽고 공부하고 글 쓰고 밖에 없어요. 그리고 방법을 알아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로 (나만의) 방법이 나오는 거거든요. 특히 창작분야는 그래요. 쉽게 빠르게 얻어지는 것은 내 것이 아닌 경우가 많죠. 암튼 우리는 잘 가고 있는 겁니다. 우직하게 오늘도 한 걸음 내딛었고 다음 주도 한 걸음 내딛고. 같이 최소한 열두걸음 가는 겁니다.
(상상)
같이 동행했네요. 그곳에 처음 발 들였을 때의 겁에 질림, 긴장이 생생합니다. 필자와 감정의 진도가 벌어지는 지점이 있어요. ‘“교도소 오기 전까지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설명을 듣고 나서야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 지 알 것 같았다.’ -> 여기부터네요. 무슨 말을 해주었을지 알고 싶고 고통스러운 2시간을 짐작할 뿐입니다. 공간에서 발생하는 긴장보다 그들과 함께 정서적으로 엉켜서 폭풍처럼 지나간 시간의 묘사가 독자가 더 궁금한 부분입니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 이 부분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법제도의 틀에서 범죄자인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러면 우리도 상상님처럼 “결과는 남고 과정은 삭제된 푸른 그녀들”을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겠지요. 글이 점점 밀도가 생기고 주제의식이 선명해집니다. 아파하면서 쓴 글, 아파하면서 읽었습니다.
(노래)
질투와 결핍, 자존심과 소심함, 열등감과 포장술, 질투와 희망. 대비구도로 글을 끌고 가니까 글이 구조적이고 또 그만큼 몰입이 잘 됩니다. 다만 질투가 평생 온갖 부정의 기제로 작동하다가 갑자기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된다는 게 비약적이에요. 시간 부족으로 인한 급 마무리의 흔적이겠죠. 질투의 근원 언니, J로 인해 노래님의 어떤 부분이 생기고 어떤 부분이 무너졌을까요. 누리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지. 질투가 나의 힘이 된다는 것, 그건 질투를 좋은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텐데요. 질투와 질투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이죠. 더 감정을 세분화시켜보세요. 막판에 희망이라는 말이 커서 두루뭉수리해져요. 모든 감정과 경험이 성장으로 수렴되어야한다는 자기계발담론식 강박은 독창적 글쓰기 방해 요소입니다.
(고구마가)
‘그 추함을 잘 모사할 재간이 모자란다.’ 이 문장은 글 쓰는 사람이 자제해야할 표현이죠.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시도해야합니다. 놀랍다, 눈이 간다라는 설명 위주의 앞 단락은 빼고‘아이들과 엄마는 얼굴이 크고 손가락이 굵고 짧다. 짧은 것인지 관절이 하나씩 빠져 있는 것인지 정확치 않다.’ 여기서부터 글을 곧장 시작해주세요. ‘난 이렇게 빤히 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면서도 샅샅이 본다.’ 그 가족의 이상한 점을 구성원의 외모, 정서(다정함)적 관계 등의 요소별로 풀어준 것은 좋습니다. 추함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 일상을 낯설게 한다는 것, 그래서 추함도 미학적 힘이라는 것. 이 이야기가 어린이 사례까지 나아가 일반론으로 너무 확장되었네요. 그래서 가족에 대한 글인지, 추함에 대한 글인지 통일성이 없습니다. 제 생각은 추함에 관한 글로 가는 게 낫겠어요. 매력의 매자가 도깨비 매라는 정보 고맙습니다.
(랄조)
자기 경험에 충실한 자기 배려의 글쓰기입니다. ‘난 공황장애가 있다. 약간의 불안장애와 강박증은 덤. 현대 문명에서 필수적인 항목이라는 지하철. 난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에둘러가지 않는 서두도 좋아요. 앞 단락에 병(원)에 대한 편견과 거부가 드러나는 대목을 더 써보세요. 자기가 정상인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잖아요. 그리고 큰 트라우마가 없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뭔가 더 자기 탐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나의 환부를 아는 게 나를 아는 일이니까요. “왜 못 타는지 설명하는 게 제일 힘든 거야." 라는 아버님의 말씀이,글쓰기에도 적용됩니다. 왜 아픈지 모르는 게 제일 힘들고 그래서 글로 써야하는 게 아닐까요. 6개월 간 긴 싸움, 글쓰기가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바람도리)
단편영화 비열한 거리네요. 당당함. 거짓말. 이상한 생명력. “무엇을 팔아도 그들은 당당했다.”는 두려울만 하네요. 룩소르 사람들이 설득력 있게 그려집니다. “그들의 가난은 지나치게 힘이 세다.” 이런 표현도 생생하고요. 나의 가난하지 않음-그러나 허기짐으로 이어지는 구성 좋습니다.
앞의 이야기에 비해 ‘공허한 거리’ 편은 영화가 되기엔 좀 부족해요. 배고픔의 정체는 생생하게 와 닿는데 허기의 정체는 일반적이라고 할까요. 삶의 공허함 말고 바람도리의 공허함이 더 잡히길 바라는데 약간 아쉬워요. 삶은 매양 목적 없고 방향 없고 흘러가는 것이기도 한데 뭘 갈망했을까요.
(소울리스)
서두로 신화이야기를 압축하면 글이 지루해지기 십상이에요. 아는 사람한테는 알아서 지루하고 모르는 사람한테는 복잡해서 지루합니다. 글이 시작하고 다섯줄이 지나도 주제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리드쓰기에서 배운 원칙 아닌 원칙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의 메시지를 다양한 참조를 통해 풀어가려는 시도는 좋습니다. ‘욕망에 휘둘려 선택하고 후회하는 에피메테우스’와 ‘욕망을 억제하고 후회하는 소울리스’ 두 대비로 이야기가 전개 되었으면 어땠을지 그런 생각도 드네요. 마지막 단락은 참 식상한 내용인데 참신하고 진실하게 전개되어요. 개론서와 정답지, 어중간한 나 라는 비유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껏 위악 부리지 마시고 악을 부리세요. 도둑질! 또 다시 어정쩡해지지 않게.
(도치)
도시여자의 귀농 이야기. 드디어 시작되는 군요. 일 많고 불편하고 힘들어 절대 고향으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일반적인 여자에서, 남자처럼 자연이 주는 노동과 선물에 푹 빠지게 된 경우가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잘 전개됩니다. 밤줍기의 기쁨은 (저도 누려보았는데) 인간의 무한축적-부의 욕망과 닿아있지 않나 싶어요. 왜 그렇게 벌레가 먹도록 과욕을 부리는지 추적해볼 일입니다. 자연의 위대함은 무한축적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고요. 밤줍기에서 밤까기 방앗간까지 나아간 건 논점 이탈 같고요. 자연이 공짜로 주는 선물을 마구 독점하려는 행동에 대한 성찰이 더 연결된다면, 그것이 자연이 주는 풍요의 또 다른 선물이 아닐까 싶어요. ‘그림을 다 그리고 색만 조금씩 바꾸게 되어서’ 이런 표현은 정말 살아있네요.
(박선미)
1. 나의 열무사랑 - 여름철이 되면 아무리 바빠도 냉장고에 열무김치만은 떨어지지 않는다.
(어린시절 고무 다리이 추억–삭제 혹은 아래 동생과의 추억에 병합)
2. 친정엄마/나의 열무사랑 - 엄마 열심히 담그고 나는 열심히 먹고 “책가방에 김치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반찬투정 하지 않았다-삭제)
3. 열무김치의 추억 - 엄마 기다리며 동생과 먹던 열무비밤밥 /열무김치 담그던 9살 아이.
4. 엄마 김치 맛도 늙다 – 내가 담가드릴 차례
이렇게만 글이 전개되어도 한 가지 음식을 매개로 두 사람의 생애이자 삶의 풍경이 그려지네요. 주제의식 부분은, 음식은 단지 음식이 아니다, 가 되겠지요. 먼지 하나에도 우주가 담긴 것처럼요. 이제 글을 써놓고 불필요한 부분을 최대한 덜어내는 데 공을 들여 보세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경험과 감성을 최적화해서 구현하는 일이 남았네요.
(오늑)
포장마차에서도 감정노동이 이뤄지는 풍경이 현대인의 각박한 일상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위로를 교환이 아니라 일방향 떠안김을 ‘폭력’으로 아주머니의 거리두기와 팔짱끼기를 ‘침묵의 몸부림’으로 표현한 게 시어의 긴장이 발생하기엔 말의 느낌이 크고 장황해요. 미리 준비해두는 꼼꼼함과 아닌 척 하지 못하는 솔직함이라고 했지만, 그 솔직함이 정작 자기 욕망에는 솔직하지 못한 거니까, 시적인 표현은 아닌 거 같고요.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은 장어 세 마리가 아닐까 싶어요. 모든 걸 다 보고 있는 장어 세 마리의 시점으로 써본다면 어떨까요. ‘하루 종일 생선 비린내 참아가며 다듬었을 장어 세 마리/또 누구의 한숨에 식혀질까’
(슝슝)
환골탈태. 지난번보다 더 소설에 가까워졌어요. 그래도 주제의식이 잡힐 듯 잡히지는 않아요. 삶이나 인간에 대한 통찰이 깃들었다 하기엔 아쉽고요. 소소한 이야깃거리와 글맛이 있습니다. ‘공짜 상담을 하면 백이면 백, 연락두절이다. 이 얄궂은 직업은 처음부터 가족 보다 더 가까운 사람으로 만나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관계를 거쳐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면 웃으면서 끝난다.’ 산경험이 이래서 중요하죠. 나는 글을 통해 이 세상에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가족보다 더 많은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분명 할 이야기가 있을 테죠. 전반적으로 그간 쓴 글이 붕 뜬 듯한 느낌이거든요. 잘 쓰겠다는 욕심보다 내가 느낀 삶의 가치, 삶의 이해를 일부라도 공유하려는 마음으로 소박하게 출발해보세요.
(까탈림)
형식실험의 글인가요. 일부러 노이즈를 넣은 음악처럼 집중해서 듣게-읽게 되네요. ‘힘들 땐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힘들어서 글을 쓸 수 없고, 힘들지 않을 때는 할 말이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 이병은 치료약이 없고 평생 앓아야하는 만성질환이다.’ 이런 설명보다는 지금은 힘들 때인가 힘들지 않을 때인가 생각하고, 나는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게 낫죠.
글 쓰고싶다 병에 필연적인 주변인 이야기. 삶의 도용. 은밀한 작업. 이걸로 글과 삶의 관계를 풀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갑자기 ‘나를 불편하고 귀찮게 하지 않을 애인’ 얘기로 뻗어나가서 글이 산만해요. 마지막 부분에 쓴 채식주의자레지비언의 상실감을 흔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음. 보편 감성으로 해석당하고 싶지 않음‘은 참 좋은 글감이니 한 편 분양해서 글을 써야 해요. 미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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