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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3차시 리뷰 - 왜 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설거지를 하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매주 학인들의 글을 읽고 또 읽다보면 속상하다 웃기다가 곡진하다 잔잔하다 그럽니다. 이토록 온갖 감정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이야기가 쌓이면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 그런 부제를 달아봅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사람책입니다. 밀양 할매처럼 “소인으로 태어나서 이만하면 됐다” 말할 수 있는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고, 저에게 운수 좋게도 ‘미리보기’ 기회가 주어진 거 같습니다.


 

소울리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팔의 고통보다 모처럼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 이 부분이 반전이네요. 아버지가 무뚝뚝하셨는지, 다른 둘째들처럼 관심 받고 싶었는지, 그런 정보가 더 궁금합니다. 화상 사건이 단지 반팔을 입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떤 부분을 닫아버리고 내보이지 않게 되면서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거 같아요. 그 부분을 ‘멍에’로 간단히 처리하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려다 끝나버렸어요.

 

‘그동안 정성을 기울이던 활동과 맺어진 사람 관계들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 그동안 정성을 기울이던 (어떤?) 활동과 사람 관계가 지긋지긋 하던 때였다.

‘나와는 완전 다른 성향의 친구’ -> 나의 성향은 어떻고, 친구의 성향은 어떤지, 어떤 점이 좋아서 ‘흉내내기에 이르’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또 이 글에서는 영화를 본 행위 자체보다 보게 된 경위, 즉 ‘날선 신경’의 발생 원인 등을 치밀하게 써주세요. 그래야 영화를 강박적으로 취침용으로 보게 된 행위가 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일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일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지는 않는다.”는 십장 아저씨의 말은 정말 가슴에 쿵 박히는 명언이네요.

 

소울리스님은 이야기를 툭툭 던지듯 풀어내지만 글에 어떤 묘한 ‘울림’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유와 배경까지 더 치밀하게 좁혀서 써보세요. 키노 기사처럼.

 

고구마가

 

어릴 때 듣고 자란 ‘말들’로 성장기를 구성한 기획력을 높이 삽니다. 무의식의 명령어처럼 나를 통제하고 경향성을 만들어준 말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주니 글에 힘이 있어요. ‘대본의 지문처럼 내 행동을 지시했다’는 표현이 돋보여요. 팔을 움직이다가 엄마 가슴에 닿았을 때 이상했던 감촉, 이 일화가 의젓한 첫째에 대한 강박증과 결핍감 같은 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엄마가 출산을 마쳤을 때보다 많은 나이인데도 자기 포지션을 ‘아이’에게 둔다는 지적도 좋은 자기 설명의 사례이고요.

 

글의 마무리가 문제네요. 부정의 말들이 형성한 인격. 너는 눈치 보는 사람,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역시나 남들의 말들만 전하며 황급히 마무리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에 대한 자기 입장-해석이 들어가야죠. 그런 성격으로 살아가는 유/불리한 점을 이야기해본다던가. 본인은 자신을 어떤 성격이라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부정적인 말들이 영향을 안 미친다고 했다가 아직 찌른다고 하니까 더 모호하죠. 자기 감정에 더 집중하여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살아가는 장단점만 잘 보여주어도 좋은 글이 됩니다. ‘쟤 성격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까탈림

 

두서없는 굴곡진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 글이고, 두서없고 반복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이제는) 듣게 되었다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대한 의미부여가 부족합니다. ‘딸이 엄마를 보며 느끼는 연민과 부정, 애증의 모순된 감정’이 글의 핵심인데 너무 한줄 요약 했어요. 그래서 글이 평면적이에요. 결을 살리려면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더 상세히 쓰거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심정을 더 생생히 묘사하면 참 두서없어 좋은 글이 될 거 같아요.

 

‘엄마의 폐경’이란 단어가 눈에 확 띄는데 그것에 관련된 수다를 담아도 좋을 것이고요. 엄마는 딸이 자취집에서 굶는다고 여기지만 나는 얼마나 잘 먹는지 실상에 대한 정보를 주어야 딸만 보면 먹이려는 엄마의 과잉 행동이 더 부각되겠죠. 그런데 이제는 엄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는 딸을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주희

 

외로운 아이가 취학 전과 취학 후 성장기를 어떻게 보내는지가 잘 그려집니다. 주희님 글은 짧은 문장이 무심한 듯 이어지는데 힘이 있어요. 소싯적부터 워낙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서 내면 독백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그런 듯합니다.

중학교 시절 급식 줄 앞뒤로 친구들 무리에 끼어 있는 아이, 혼자 하교하는 아이. 그게 왜 편했는지 궁금해요. 감정 노동 안 해도 되는 점?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하는 바람에 친구가 ‘조금 더’ 생겼는데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뭐가 피곤하고 싫었는지. 저는 4-5명씩 무리지어 친구들과 우르르 어울려 다니면 깊은 대화를 못 나누고 공허한 말들만 하니까 그게 싫어서 거의 단짝 친구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예 단짝 친구도 필요 없는 주희님 같은 ‘강자’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글이 재밌어지려는데 요점 정리로 끝나버려요. 대학 진학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 질척한 행동들의 면면이 완전 재밌을 거 같아요. 다음에 2탄 써주세요. ‘관계가 여전히 어렵다’고 느끼기엔 관계를 차단하면서 산 게 아닌가 싶은데요. 관계 없음에서 오는 어려움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의 비교분석도 좋은 글감이겠네요.

 

슝슝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라임을 넣게 되네요. 어설픈 래퍼처럼요. 참 대단한 능력이세요. 끊어치기 최강자? ㅋㅋ 이렇게 다른 장르로 도입하여 쓰지 않으면 단지 암울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아요. 가벼운 문체가 짐승들의 세계 같은 남학생의 성장기 잔혹사를 잘 보여줍니다. 단 마지막 문단의 의미 전달이 조금 확 다가오지는 않네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친구를 왜 쳤는지. 한번 쯤 ‘가해자’로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는지. 나보다 착한 친구한테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건가요? 정신없이 쏟아지는 펀치 속에 우정은 싹트지 않았다. 양쪽다 편치 않다라는 결말이 좀 허무하다고 할까요. 앞부분의 압도적인 흡입력에 비해 뒷심이 부족해보입니다. 성장기 잔혹사가 에피소드처럼 제시되고 말아서 아까워요.

 

그리고 슝슝님 글이 매끄러워요. 가독성이 좋은데 너무 좋아서 휙휙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할까. 휘발성이 강해요. 아는 선배가 기사를 감각적으로 쓰는 후배한테 ‘반짝이 패션’처럼 글을 쓴다고 비유해서 웃었는데 슝슝님도 그래요.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감각적이면서 묵직해지라고 하면 ‘청순하면서 섹시하라’는 요구처럼 무리일까요.

 

공부도 왠만큼 했어. -> 공부도 웬만큼 했어.

 

 

날아라지구로 (도치)

 

안정된 서사 전개력과 문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입니다. 한달음에 같이 4학년이 되어서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빵같이 달고 맛난 사랑에 같이 배가 부릅니다. 도치님이 교사의 꿈을 가진 것도 놀라워요. 그런데 후반부에 ‘학교와의 인연은 쉽게 닿지 않았다.’는 부분이 모호합니다. 채용이 되지 않았던 건지, 결혼을 해서 그런 건지. 큰 딸의 사춘기와 교사의 꿈이 다시 태동한 것의 연결고리도 중요한 부분이라 설명이 보완되어야 합니다.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느낀 일상의 에피소드도 전해주었으면 도치님의 유년과 대비되어 글이 더 생명력 있을 거 같습니다. ‘학교 어디에도 ***선생님은 없었고 43년 전 학생들도 없었다’는 설명 문장으로 퉁쳐 버리니 글이 앞처럼 생생하지 않고 맥이 풀리거든요. 인터넷 사이트 비밀번호 가입마저 없어졌다는 이야기로 글의 앞뒤를 열고 닫아주는 수미쌍괄식 구조는 좋습니다. ‘귀농 백일장’ 수상자의 저력을 확인합니다.

 

상상

 

‘쓰고 싶기는 하나 못 쓰겠는 거. 쓰고 나면 좋으나 힘들어서 하기 싫은 거’ 솔직하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크면, 글을 쓰게 됩니다. 글로 퍼내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체한 거 같을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거 같습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픈 핵심’을 차분히 응시하고 도전해보세요.

 

아버지와 읽고 쓰기 공부하는 장면은 고칠 곳이 한 문장도 없게 잘 쓰셨어요. 친척 집에서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다만 글에 이모티콘과 괄호로 처리하는 부분은 다 문장으로 대체해주세요. 오글거리는 느낌, 얄궂은 마음 모두 번역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주방에는 입식의 식탁이 있었다. 당시에는 식탁도 부의 기준이었다. 보통의 집은 개다리소반에 밥을 먹었다.’ 뭐 이런 식으로 일문일사 원칙에 의거하여 한 가지 사실씩 쓰면 됩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여성들의 구술사 꼭 완성하면 좋겠고요. 가슴에 돌아다니는 상상님의 이야기까도요. 기억을 살살 흔들어서 하나씩 꺼내보세요. 한꺼번에 범람해 다시 어깨 통증 오면 안 되니까요. ‘살아온 생과 살아질 생의 구분이 방법적으로 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는 부분이 어떤 뜻인가요. 살아온 생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과거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겠다? 정확한 표현을 해주세요. 지난번 글보다 훨씬 나아졌고 자연과 교감하던 교문학소녀의 영감이 되살아난다면 글이 더 부드럽고 섬세해지리라 기대합니다.

 


경덕쿵

 

취업복음이란 게 있군요. 재밌어요. 서점에 넘치는 자소서 매뉴얼 책 제목, 특강 제목 열거해주세요. 그 세계를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을 대상으로 놓고 ‘생생정보통’처럼 살아있는 정보를 제시해주어야 좋은 글입니다.

 

궁금한 거 몇 가지. 조선일보에 어떤 사진 기사가 났나요. 중학교부터 입시라는 ‘급류’ 표현은 과해 보입니다. 특목고 준비가 아니라면 딱 맞는 표현은 아닌 거 같아요. ‘정처 없이 건물을 오르던 꼬꼬마로 회귀하듯 전방위적 행보’를 보인다는 문장은 좋습니다. 앞의 에피소드와 연결고리도 생기고요. 왜 그리 경험 축적에 집착했는지 궁금합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것. 물질적 기본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하다는 지적. 개인 서사에서 갑자기 일반론으로 넘어가니까 글이 커지고 톤이 깨지네요. 아니면 위에 나열한 온갖 경험들이 나답게 사는 방법이자 실천이었다고 이어주면서 그러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답게 사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경제적 안정에서나 가능한 사치다로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겠죠.

 

‘(나 답게 사는 것은)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신만의 길일뿐이다.’ 문장이 명료하지가 않아요.-> 나답게 사는 것은 생존이 보장된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적 행위, 그 뿐이다.

마지막 두 줄. 자신은 여전히 실천력이 부족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쉽게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사람이라는 마무리는 좋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우리는 대부분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박선미

 

글을 읽고 났더니 부지깽이가 내 손에 들려있네요. 불이 잘 타도록 땔감을 정돈하는 부지깽이 이야기라 그런지 글이 일정한 온도로 가지런히 탑니다. 아궁이 밖에 편편하게 불씨를 펴서 김을 굽는 이야기는 정말 동화적으로 그려져요. 전체적으로 행간이 발갛게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랫목처럼 등짝이 따뜻합니다. 이삿날 부지깽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소녀의 고민도 전해져오고. 부지깽이 하나로 어린시절 설명할 수 있으니 사소하지 않죠. 사소한 것은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죠. 한 가지 소재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집니다.

 

첫문단.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올랐다.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이 두 문장이 이어지는 부분이 중복이죠. ->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올랐다. 그 맘 때면 집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오늑

 

문장이 전부 시각화가 가능하네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첫줄에 ‘나의 외관은 형성되어 갔다’에서 외모라고 안 하고 외관이라고 하니까 사물화의 효과가 있어 좋습니다. 글을 건조하게 만드는 단어 선택들이 눈에 띄고. ‘형제의 불완전한 그림자’ 이 부분은 형제의 일그러진? 삐뚤어진? 같은 시각화 가능한 단어가 나겠어요.

 

‘학업, 연예, 가십에 질식하는 것보다 예술이라는 공기 속에서 숨 쉬는 게 더 편했다.’ 비문입니다. 질식이라는 단어에 이미 숨이 막힌다는 뜻이 있어요. 숨을 못 쉬는 것과 숨을 쉬는 것은 비교급이 될 수 없어요. 숨을 못 쉬는 것보다 숨을 쉬는 것이 좋았다? 이상하잖아요. -> 학업, 연예, 가십은 나를 질식시켰다. 예술의 공기 속에서만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자기혐오와 자기사랑의 분열증에 시달리지 않은 예술가는 없었으니, 내 안에 혼돈을 갖고 있어야 아름다운 별을 탄생시킨다고 니체도 말했고요. 예술로서 불멸을 꿈꾸는 오늑에게 이 글은 어떤 출정 선언문 같습니다.

 


바람도리

 

대물림된 궁상. 제목이 좋아요. 내용은 궁상스럽지 않고 당황스럽게 정갈합니다. 문장이 고칠 게 거의 없네요.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고. 자기와의 거리 확보의 힘 같습니다. 자기객관화에 성공했다고 할까요. 다만 직장생활 초년에 소비도 고구마 이야기처럼 구체적 소비 사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소비 후의 공허감이라는 말에, 공감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의 궁상과 나의 궁상(처럼 보이는 삶의 양식)의 결정적 차이가 있지 않나요. 화폐와의 관계 측면에서요. 엄마는 궁상을 통한 적게나마 축적을 도모하셨고, 바람도리님은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검약에 가까워요. 그래서 결핍도 느끼지 않을 수 있고요. 엄마의 금욕적인 소비 습관이 대물림 되었지만, 어떤 차이가 있고 그걸 얘기했어도 좋았겠다 싶어요.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때면 찢어진 이불처럼(->이불 같은) 초라한 살림을(->세간이)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웠다.)

 

 

노래

 

진정제도 독약도 아닌 성장기의 기억들. 순둥이의 순종의 나날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지도 몰랐던 무지의 시간들. 대학교 입학 후 자유의 달콤함 이후 찾아온 통증.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내가 가식적으로 살지 말라고 울부짖음’의 사건이 찾아오는 어떤 계기가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뭔지 모르겠는’ 그것을 글로 발견해내면 글에 힘이 있겠어요. 처음 만나는 자유를 누리면서 새삼 억압을 인식할 수도 있고, 주변의 다른 삶의 경로를 밟은 친구들을 보면서 (알고보니) 억압의 사춘기를 보냈구나 알아차릴 수도 있고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남이 생각하는 나’ ‘가면 뒤의 애써 감춰왔던 나’ ‘자의식’ 같은 표현은 추상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가급적 절제하는 게 좋아요. 사례를 통해 그런 면을 보여주고 독자가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한줄로 설명해버리면 독자는 글을 디딜 근거가 없어요. 유순한 유년보다 뒤늦게 온 사춘기가 더 중요한데 묘사가 앞에 치중되어 있고 뒷부분은 설명으로 훅훅 지나가니 글에 균형이 안 맞지요. 다음에는 그 혼란을 글로 풀어보셔요. 좋은 글이 나올 겁니다.

 

‘유난스레 툭 튀어나온 이마와 뒤통수, 곱슬거리는 머리, 터질듯한 볼, 쌍커풀 없이 작은 눈, 오리 입처럼 말려 올라간 윗입술을 한 꼬마아이’ 묘사는 탁월합니다. 화가 같으세요.

‘진정제도 독약도 아니었지만 성장촉진제였다.’ 진부한 듯 정리가 되는 한줄 요약입니다.

 


박이한

 

3차시를 ‘열차의 난’으로 만든 화제의 글. 파토스 넘치는 문체가 수업에도 활기를 뿌렸습니다. 해와 달, 회색분자, 모나리자, 평생 좌석 등 활달한 비유의 오남용 사례로 학인들에게 유익한 배움의 기회도 제공했고요. ‘내가 늘 보던 뒷산에 칼을 꽂아둔 거 같아’ 라는 청도 삼평리 어르신의 귀한 촌철살인 말씀도 글에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과잉정서로 밀고 나가서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글로 옮기세요. 글을 다듬는 퇴고의 기술과 시간만 있으면 글은 얼마든지 좋아집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게 존재한다.’ -> 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

‘그 자리는 내가 처음 통성명을 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 사람들과 통성명을 했다.

‘나는 가시지 않은 여운을 정리하지 않았다.’ -> 나는 가시지 않는 여운을 느긋하게 즐겼다.

‘사무실 때문에 간 청도 덕분에 나는 상당히 탈피했다.’ -> 업무 지시로 청도를 다녀온 후, 나는 다큐멘터리는 따분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시간표 없이 살아본 성인으로서의 첫 해’ -> 좋은 표현은 역시 삶에서 나오네요. 멋집니다.

 


가비

 

동화적 판타지로 독자를 데려간 멋진 글이었어요. 엄마의 뱃속에서 불시착한 한 생명이 놀이를 통해 커가는 장면이 파스텔톤 그림 동화처럼 스쳐갑니다. 유년을 가로지르는 놀이의 기억. 이후 단절의 시간이 길어서 더 아련하게 다가온 거겠지요. 축적한 딱지가 쓸모없게 되어버린 이유, 수업시간에 이야기한 취학통지서, 삼육재활원 이야기 보충하면 글이 더 풍부하해질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혼자 남겨짐의 시간들. 회피하고 싶은 부분을 직시해야 글이 된다고 하잖아요. 암전 시켜버린 기억을 조금씩 복기해본다면 ‘아무도 살지 않은 시간’에 대한 훌륭한 증언 문학이 되리라 믿어요.


‘허망함이란 놈의 복사뼈’ 이 수사법이 다른 문장에 있었으면 더 빛났을 텐데요. 유년 시절의 끝자락에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으로 ‘허망함’은 너무 늙고 칙칙한 단어입니다. (?) 이 표시는 안 쓰는 게 좋고요. 말줄임표도 자제해야 좋은 글입니다.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니까요. 지난번 글보다 월등히 좋아졌습니다.

 

고구마가 (2차시 누락분)

 

‘20대에는 모든 게 분명해 보였고 30살에도(->서른 살에도) 오십살에도 (-> 쉰 살에도)’

‘100일 넘게 혼자 외국 여행을 해도 돌아오지 않더라. 그 상큼한 두근두근은.’ -> 도치법의 좋은 예.

‘내 집 욕망은 촌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영원성을 맹서하는 결혼도 낙후시켜버렸다.’ -> 동사의 활용의 좋은 예.

‘결혼 안 하고 나이 먹도록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흐름이랑 반대로 살려고 하는 힘이/ 내 안에서 은근 발휘되고 있었던 걸까’

-> (주어부가 너무 길어요.) 결혼 안 하고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삶. 그와 반대로 살려는 힘이 내 안에서 은근 발휘되었던 걸까.

 

늙은 아이의 이야기 1탄. 삶이 다르니 글도 참신해요. 귀농 귀촌의 글이 갖는 ‘자연으로의 회귀 예찬’ 이라는 일관된 패턴이 있는데 젊은 처자의 귀농 생활이라 그런지 참신해요. 고민도 풍부하고 살아있고요. 속도감 있게 읽히고. 당당하게 보이지만 흔들리고 갈등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 글에 탱탱한 긴장을 줍니다. (세상과) 욕심껏 불화하면서 부모들과 우정을 쌓으며 아이까지 낳고 살고 싶다는 마무리까지, 글이 긴장을 놓치지 않고 흐르는 게 큰 미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