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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8차시 리뷰_섬세한 몸부림이 필요한 시간

글을 쓰면서 자기 느낌과 자기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풀어내는 일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작업을 수행하면서 뭔지 모를 괴로움과 불편함을 느끼는 상태를 지나고 있는데, 이런 기분, 조금씩 움찔거리고 달라지는 마음의 결을 계속 글로 계속 풀어보는 것, 그러면서 다른 내가 되는 것이 글쓰기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치)

박연준의 시어를 계기로, 그간 마음에 불편함을 안겨주고 고개를 돌리게 하고 반면교사로 삼게 했던 험한 말들의 사적 경험을 열거했습니다. 김기덕 영화, 중학교 시간강사 생활, 고2 체벌 경험, 동서와 시동생 사례. 개인적 삶에서는 자연스레 뒤섞인 이야기지만, 글쓰기라는 작업은 그런 무질서한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위의 사례를 예술 (박연준 시와 김기덕 영화)과 일상(학교와 가족) 두 가지로 분류하면 주제 전달이 더 명확해지겠네요.

 

‘말이나 글이나 순한 표현을 선호’하는 취향의 독자가 ‘무시무시한 단어’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창작품을 접했을 때의 느낌과 심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글입니다. ‘언어든 몸이든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줄여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지 않을까?’라고 필자는 묻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논리모순이 발생하네요. 책장 덮듯이 현실을 덮어버릴 수 없는 무방비 상태로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이 노출되어야 보호받을 수 있고,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요. 시인이 그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알콜 중독과 치매를 앓는 아빠에게 태어나 언어와 몸이 폭력에 노출되어 30년을 살아가는 존재의 신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요.

 

도치임, 힘들게 읽고 힘들게 쓰고 힘들게 읽고, 그렇게 글 한편을 살아내느라 많이 애쓰셨습니다.

 

(랄조)

‘배운 적은 없었지만 묘사는 늘 자신 있었고, 꽤나 교내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쉬는 시간이면 옆반 친구들 혹은 모르는 애들도 내 노트의 그림을 보러왔었다.’ 그림 그리는 어린 학생의 의젓한 모습이 떠올라요. 대개는 솜씨를 인정받으면 그림을 배우러 가는데 그 같은 절차를 거부한 이유가 더 듣고 싶어요. 끝없는 실기와 작업 그리고 과제. 꼭 학원이 아니라 이런 강제와 반복이 예술에서는 필요하니까요.

 

‘난 폴 세잔이 아니다. 내가 그리기 싫은 사과를 잘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슷한 출발점에서 시작해 닮은 듯 다른 노선을 걷는 미대생과 나. 그들에게 그림은 지금 행복한 존재로 다가올까?’ 미술로 고통스러운 그들과 미술이 추억으로 남은 나, 둘 중에 누가 더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행복한가, 아쉬운가, 더 내밀하게 자기탐구하면 글이 풍요로웠겠어요. 앞으로 살면서 2007년 그 애처럼 좋아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세잔처럼 멋지게 그려주고 싶을 거 같아요. 그러면 랄조가 다시 붓을 잡을까요.

 

(고구마가)

‘지구가 기억의 행성이라면, 인간은 기억의 종이다. 존재의 칠할 이상이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억을 탈진하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냥 그 기억의 조합 덩어리 자체가 우리 자신-몸일 것이다. 어떤 기억은 의미 있고 어떤 기억은 의미 없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고 정치일 것이다.’

 

이런 문장들 통찰이 아름다워요. 두물머리 싸움 경험을 있는 그대로 덤덤하게 전달하고 이 문장 단락 넣은 다음에 장소를 철거하는 건 기억을 철거하는 것이다, 라고 마무리했으면 글이 담백하고 명료하겠어요.

 

글에서 힘 빼는 건 사랑니 뽑기만큼이나 힘들어요. 그래도 고구마가가 겪은 귀한 경험과 거기서 길어낸 성찰이 가지런히 담기려면 취사선택을 해야겠죠. 필자의 삶처럼 밝고 귀엽게 진지한 글이 되도록, 자유롭게 풀어놓고 가지런히 정돈해보기로.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 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좋아서 남겨둠.

 

(바람도리)

‘내장 깊은 곳에서 말들을 뽑아내던 기억은 난다. 왜 사람들과 함께하는지 묻지 않았다.’ ‘시민단체가 욕하고 돈을 뺏고 필요하면 나를 이용하는 깡패처럼 두려웠다.’ 가끔씩 바람도리님 글에서 요즘말로 ‘심쿵’하는 표현들이 나와요. 오랜 뒤척임에서만 나올 수 있는 표현들. 잘 살리고 싶네요. 이제 글이 추상적이지는 않은데 설명적이고 심리적이죠. 이걸 잘 살리는 에세이스트가 되는 것도 좋아요. 모든 글이 사례 중심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만 촘촘해야 해요. 왜? 뭐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경험의 시간대를 넓게 잡으면 곤란함.

 

‘직장이든 모임이든 사람들과 만나면 나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부채가 남지 않도록 깍듯이 관계를 맺는 연습을 했다.’ -> 이건 일반적인 내성적인 사람들 특징이므로 더 고유하게 표현하고. ‘타인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 남들의 표정을 보지 않을 때 내 표정도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아닌지 이야기 더 풀어주시고. ‘우리 이제 친해지자는 말이 친구의 말을 자꾸 생각난다...봄이 되니 꽃 봉우리를 내미는 내 마음도 살아있다.’ ->저도 설렘요.

 

(오늑)

“식물은 비명이 없어 좋다”는 시구를 나의 채식 체험과 연결 지어 풀어주니 좋네요. 식물의 생명은 안 불쌍하냐는 이상한 논리. 그에 대한 반박으로 고통을 최소화하는 선택인 채식론을 폈습니다. “인간의 윤리는 어느새 효율적이고 편리해져서 이것마저도 오만일 수도 있겠지만 둘 (식물먹는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하나 (식물)만 희생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논리적 폭력 말고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불편도 곁들이면 더 풍부한 주장이될 듯. 브로콜리 낫질 앞부분은 필자의 개성이 드러나요. 더 섬세할 필요는 있고요. 수동태 표현이 많아서 그런지 매끄럽게 읽히지는 않아요. 박연준 시인의 당당한 반어법에 필자의 해석이 더해지니 “오히려 식물에게 비명이 없을 거라 여기며 무덤덤하게 먹었을 현대인들을 깨우는 것 같”습니다.

널부러지다-> 널브러지다, 뿌리채-> 뿌리째.

 

 

(슝슝)

‘송전탑이 왜 필요한가. 전기가 생산되는 곳과 소비되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자력발전소(이하 원전)는 특성상 발생되는 열을 식히는 대량의 물이 사용 가능한 바다 옆에 지어지고 전기는 서울, 부산, 울산 등의 대도시나 산업단지에서 많이 쓴다. 그래서 밀양 송전탑 싸움은 원전과의 탈핵 싸움과 이어져 있다.’

 

말쑥한 글.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매끄러워요. 그런데 밀양-쌍차-강정-세월호를 묶는 해석은 상식처럼 되어버려서 남의 글에서도 볼 수 있으니 여기에 슝슝님만의 고유한 해석을 넣어줘야 해요. 밀양할머니 북콘서트의 분위기를 중심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면 좋죠. 북콘 현장의 디테일을 살려서. “아들을 바다에 묻은 엄마가 마이크를 잡는다. 순간. 삼키지 못한 치명적인 슬픔이 콘서트장 전체를 뒤덮는다. 여기서 편두통, 가슴통증을 느낀다.” 엄마가 쏟아낸 말을 생생하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거기 온 사람들 반응도 묘사하고, 그렇지 않으면 편두통 가슴통증에 독자는 마음으로 공감하지 못해요. 필자는 다급하고 독자는 의아하죠. 다음부터 콘서트장 갈 때 수첩과 연필 혹은 스맛폰으로 메모하시고 남들이 흔히 쓰는 말이 아닌 내 느낌, 내 언어, 내가 보고 들은 것으로만 글을 쓰겠다고 욕심내어 보세요.

 

‘같은 전쟁의 다른 전선이다. 전세는 다급하다. 아픔을 아는 이들은 일어나라. 지금이 싸울 때다.’ 결론이 너무 크고 급해요. 어디서 어떻게 일상에서 실천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나아요. 콘서트 찾아간 것도 그런 실천일 테고요. 다음에도 이런 북콘서트 또 가봐야겠다, 책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녹색당 가입해야겠다 등등의 수위로 마무리하면 좋을 듯요.

 

(소울리스)

‘우선 사랑에 대한 정의부터 접근해야겠지만, 주는 사람은 그렇다지만 받는 사람이 힘들어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거다.’ 이 표현 좋네요.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주로 부모의 언어가 통용되는데 이런 자식의 말이 널리 유포되면 좋겠네요. ‘끈적하게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 때문에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은 이유가 설득력이 없어요. ‘누구나 ‘다르게 살겠다’ 다짐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길을 간다. 결국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아버지가 되지 않는 거다.‘ 이런 일반화 시키는 건 쉬운 논리이고, 작가는 더 치밀하게 다르게 사유해야 해요. 좋은 아버지, 좋은 부자관계 사례가 영화나 작품에서 소개해준다든가, 논리에 균형을 잡아주세요.

 

‘자식을 낳아서 아버지가 되는 게 아니다. 먼저 아버지가 되어야 자식을 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표현도 ‘먼저 아버지가 되어야’ 같은 표현은‘먼저 사람이 되어라’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하죠. 아버지가 된다는 게 뭔지 나마의 기준을 따져보는 문장이 요구됩니다. 그럴 때 ‘선택의 여지없이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시류에 쫓겨 섣불리 부모가 되지는 않겠다.’는 다짐에 공감하겠죠. 이런 틈새만 막아주면 더 좋은 글이 되겠네요. 하나의 톤으로 논지가 연결되는 데 성공한 글입니다.

 

(밀애)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새파란 젊은년이랑 사귀면서 나에게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30살 나는 우연히 만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한 아이에 엄마가 됐고 그와 연락을 끊었다.’ 소설 같아요. 솔직하게 주저없이 밀고 나가기 글에 긴장이 살아요. 문장도 가지런해지고, 말줄임표도 줄고. 제목도 좋아요. 삶의 무게감이 커서, 남자친구에게 의지하는 자기모습을 보았다는 그 부분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더 내면을 파고들어보세요. 삶은 어차피 외로운 건데, 혼자 아이 키우고 돈 벌면서 살아가는 여성이 겪는 고유한 외로움이 뭔지 보여주어야, 다음 문장이 힘을 받습니다.

 

‘인생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라 늘 말해왔지만 가끔씩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사람만은 나를 이해해 줬으면 마르지 않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나와 같이 맘이 아팠으면 했다.’

 

(노래)

전체 통일성이 살아있는 글. 저 무수한 물음표가 존재 혼란을 말해주네요. 하지만 글쓰기는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 물음표를 느낌표로 혹은 느낌표를 물음표로 전환하는 일. ‘내가 흔히 듣는 말 속에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들이 고스란히 내포되어 있다.’ 이걸 하나씩 꼽아 키워드 삼아 풀어보면 어떨까요. 듣기 싫은 말 세 가지를 통한 자기탐구. ‘나를 아는 것과 나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로 풀어보는 것도 흥미롭겠습니다.

 

이렇게 ‘머릿속이 풀리지 않는 질문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을 때 풀어내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입니다. 여기서 하나씩 핵심적 질문을 골라내고 탐구하는 게 곧 철학의 부재에서 자기 철학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일 테지요. ‘나만의 언어, 새로운 언어, 상투적이지 않은 언어, 살아 있는 언어, 내 삶과 밀착된 언어, 그 언어를 만들어 내기’에 제대로 부대껴보는 방편으로써 글쓰기, 서두르지 말고 한 편씩 해보세요. 독자가 같이 고민해드립니다.

 

(경덕쿵)

하품 같은 글. 무심한데 의젓한 글. ‘아홉에서 하나를 더했을 때 바뀌는 큰 자릿수의 표정은 쓸데없이 의미심장하다. 괜히 심각한 척 나이듦을 통속화한다.’ ‘동양에선 나잇대별로 이립(而立)이니 불혹(不惑)이니 이름 지어놓고 그에 맞는 품격과 소양을 은근히 강요하니 이걸 세글자로 줄여 '나잇값' 이라 하더라.’ 이런 문장들은 너무 좋네요. 필자의 고유한 생각과 음성이 들려요. 경덕쿵의 글감은 ‘무엇도 되지 않은 나’ ‘유보하는 나’의 존재 탐구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 모습, 사회에 수렴되지 않은 이질적 존재로 살아가는 일을 기록하면 그 글이 필자의 삶에 향기를 불어넣어줄 거 같아요. 대개는 살아온 대로 글을 쓰지만, 글을 쓴 대로 살아지기도 하더라고요. ‘도착하지 않기로, 한평생 잘 날아가다 사라지기로’가 필자의 영혼을 피어나게 하는 주문이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