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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4사시 리뷰 - 좋은 제목 좋은 글

노래 상처가 아문다는 것

 

글의 짜임새와 완결성만으로는 지금까지의 글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한 호흡에 읽히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는 멋진 지도자가 되고 싶고 최소한 비겁하기 싫은 청춘이었고, 책과 씨름하던 어느 여름 날 충동적으로 사고를 쳤는데, 그 사고가 그의 삶에 중요한 사건이 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사건 이후 변화에 대한 정보와 해석이 많이 부족합니다. ‘살아내니 잊혀지더라는 마무리는 맥이 탁 풀리고요. 그렇게 잊혀졌다기엔 앞글이 너무 생생하니까요.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상처는 아문다?) 한 줄로 정리가 안 되는 애매함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 수정해보세요.

 

 

오늑 헤어 나올 수 없는 망각

 

부서지지 않는 암흑이 뭘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빈틈없는 어둠. 완고한 상황일까. ‘블랙홀’ ‘설산같은 문명적 용어를 넣지 않고 4개월 아이의 공포를 표현했으면 어땠을까요. 영화적 상황 이미지에 몰입하다가 그런 단어가 나오면 왠지 이성적으로 각성이 돼요. ‘아빠는 동네 목욕탕에서 씻고 (계시다가->)있다가 오빠의 외침에 헐레벌떡 뛰어(오시던->)오던 참이었다.’ 문장에서 존칭어 생략해야하고요. 투명인간이 뒤에서 미는 게 아니라 업혀온다고 쓴 이유가 있는지요. ‘아래로 추락하는 내 몸은 빈틈없이 찢겼고’ -> 살점이 빈틈없이 찢긴다는 게 뭐죠? 잘게? 남김없이?

글이 두 부분이네요. 영아기 외상 증언 계단공포증 분석. ‘잊는다는 건 영원하지 않다.’로 결론 내리면, 경험의 고유성과 글의 기괴한 분위기, 오늑 특유의 문체가 두루뭉수리 해져요. 더 자신감 있게 자기 분위기로 밀고 나가길.

 

 

소울리스 나는 왜 이렇게 조용한지

 

뜨끔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생각했거든요. 시간순으로 점층적으로 사례별로 말 많은 것의 무용론을 논증해나가는 데 글에 힘이 있습니다. 회사의 회의에 이어 훗날에는 글쓰기의 최전선 수업의 사례가 추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요. 현재를 고수하는 건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맞는데, 더 정확히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겠죠. 말 많은 것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악에 복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 뿐. ‘을 상황에 따라 삶의 유용성 전략으로 활용하라고요. 아무려나, 변화할 수 있음=유연성은 높은 단계의 힘입니다.

 

 

굳이 회의가 없어도 간단한 의사소통으로 전달과 점검이 가능한데도 이러는 건 회의를 통해 자기 지배력을 굳이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 간단한 의사소통으로 전달과 점검이 가능한데도 굳이 회의를 소집하는 건 그 자리를 통해 자기 지배력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경덕쿵 여행, 여행

 

 

내 맘대로 키운 여행의 무게에 목이 뻐근해질 때쯤같은 표현이 돋보여요. 문장은 좋습니다. 여행에 대한 열정도 알 수 있고, 대견하고 여행 많이 다녔구나 싶어 놀라고요. 다만 왜 여행을 가는지 잘 드러나지 않아요. ‘다녀온 여행들은 흡족했다.’ ‘많은 것을 보며 감응했다.’ 같은 표현은 여행 느낌들을 토로하는설명적 문장입니다. 대책 없는 떠남은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초월적인데 왜, 노가다를 감행하면서부터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자기 탐문해볼 일입니다. 여행을 통과한 내 몸에 대해,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더 깊고 짙고 친절하게.

 

 

랄조 스스로를 구하다

 

 

본 것, 한 것, 느낀 것대로 잘 썼어요. 글에 힘이 빠지니 훨씬 랄조님 목소리에 가깝고 경쾌하고 진솔해요. 창세기연수 같이 마친 거 같아요. ‘본인로 바꾸세요. 어색한 표현입니다. ‘있어 보이려고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날 노안으로 보면 화가 난다.’ 이것만 추려서 노안분투기 한편 써도 재밌겠어요. 외모중심주의 연령주의에 대해 공부해서 근거도 제시하고요.

평소 뜻도 모르고 멋있어서 기억했던 말. 스스로를 구하다.’ 이 문장 좋아요. ‘스스로를 구하다제목으로 추천. 랄조를 속 시원히 울게 한 아픈 기억은 뭘까요. 궁금증을 자아내내요. 마지막 단락은 천주교 신도가 아니라서 좀 헷갈립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기보다 과감히 생략할 때 주제가 살아나는 경우가 많죠. 글은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남기느냐가 관건입니다.

 

 

스콜라스티카 인생의 모토

 

 

스무살의 우리들은 과장되게 기쁨과 절망을 연기하는 연극배우들.’ ‘상터를 훈장 삼아 사는 것은 늙은 상이군인의 몫.’ 같은 문장들이 라디오에서 흐르는 디제이의 멘트 같이 반들반들 빛납니다. 귀에 쏙 박혀요. 관객이 된 서른과 대비한 정직한 삼십대의 정의도 좋고 분명해요. 뒷부분 주제의식이 모호해집니다. ‘부모 마음으로 (남의 자식을)동정하는 것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정의 이름으로 남의 통증에 손대는 것을 비판하고 다시 부모됨(나와 아이의 우주가 일치)의 일반론으로 끝나니 각기 다른 계열의 담론이 뒤섞여버립니다. 이 부분 정리하면 차분한 글 한편 나오겠습니다. 인용한 시는 섬뜩하게 좋네요. 통증은 나와 만물을 봉합할 수 있는 바늘이다. 귀한 시구, 오마주 다 고맙습니다.

 

 

슝슝 망각과 나와 노란 배와

망각의 기술 덕에 배운 지금 여기 함께 존재하는 심리상담’. 궁금해요. 다른 상담이랑 어떻게 다른지.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글감. 이번 과제는 앞부분 덜어내고 세월호 사건으로만 써야합니다. 일기가 아니니까요. 슝슝님 필력이 어느 정도 있으니 한 가지 주제를 자기 목소리로 담아내는 칼럼쓰기 연습하세요. 4월이 온 국민이 아이들 수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아 가장 충격 받은 시기인데 그 시기에 거리를 두었잖아요. ‘더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게 뭔지 자기성찰 해보고 그 후 죄책감으로 인한 행동들이 나와야 더 힘을 얻겠죠. 어른이 눈 떠야 아이들이 눈감을 수 있는 것처럼요.

 

 

선미 동무와 연인

백석과 자야, 길상사에 관한 자료 추리느라 애썼네요. 좋은 글의 요건에 충족합니다. 귀한 정보를 주니까요. 그런데 작가적인 욕심을 내야죠. 두 사람 러브스토리, 무소유 등에 관한 필자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런 글에 자기해석이 없으면 이 글은 다른 부지런한 누군가도 쓸 수 있는 글이 되어버리죠. 나만 쓸 수 있는 글 쓰세요. 절에 많이 다녀서 사찰의 정취와 감성이 누구보다 풍부한 필자의 해석을 곁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람도리 니체의 자기긍정을 먹다

만원버스 분노신이 묘사가 탁월합니다. 생사여탈권 쥐고 있는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이십년 전 등굣길 버스 안의 아저씨가 된다는 해석이 날카롭고요. 그런데 폭식으로 견딜 수 없는 하루를 위로한다는 부분은. ‘힘들게 보낸 하루의 정황은 미루어 짐작할 뿐 설명적이고 단정적이라서 글이 감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여느 직장인과 같은 고통은 아니지 않을까요. 만원버스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해주어야 자기부정’ ‘자기긍정같은 표현이 뒤에서 매듭처럼 글을 모아주고 힘을 얻죠. 폭식하던 시기가 언제인지 명시해주세요. 니체는 지난주에 읽었고, 스스로를 위해 요리한 때는 니체 읽은 날 저녁인가요? 그런데 스스로를 위해 요리하기 시작했다는 문장은 마치 폭식 이후 변화된 삶의 방식으로 읽힙니다. 바람도리님은 감정적-모호한 위험성에 빠지지 않으면 특유의 예민함이 글에 깊이를 부여합니다. 말이 커질 때는 주의하세요.

 

 

송이 - 나는 왜 이렇게 불쾌한가

 

 

광고 보고 커피 마실 수 있는 거 처음 알았네요. ‘공짜커피 아니죠. 영혼 강탈당하는 중노동을 하는데. 이런 세계 신기해요. 여자연예인을 이상향으로 내세우는 화장품 광고도. 남친 홀림을 컨셉으로 하는 의류광고도. 둘째 단락 자기초극과 자기긍정을 동시에 설파하는 <이 사람을 보라>와 연예 기사-성형 광고가 논리적으로 잘 연결이 안 돼요.

땀 흘려 커피 마시겠다고 광고 공해에 시달리고 옷 사러 가서도 그렇고 지속적인 불쾌를 경험하는 페미니스트. 그녀는 과연 가랑비에 옷 젖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안 젖을 수 있을지. 타인에게 위로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이상향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은 호기롭지만 글로는 약해요. 이 글의 주제는 무얼까요. 나는 광고 따위에 현혹되지 않으며 타인이 정한 미의 척도에 휘둘리지 않는다? 옷가게 사례를 간단히 줄이고 더 자기욕망을 따라가 보면 어떨지. 지금은 주장만 있고 자기관찰은 없어 아쉬워요.

 

 

 

도치 보이지 않는 봉사의 압력

 

 

봉사의 압력, 보이는 걸요.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는데 제목이 보이지 않는이네요. 보고 싶지 않은 봉사의 압력이란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종교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부장제. 여성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봉사시스템. 참 무지막지하네요. 관절이 굽고 휘는 지경이라니 말이죠. 시댁의 맏며느리도 은퇴하신 마당에 성당에 다시 취업하실 수는 없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피했어도 다른 여성들-할머니들의 혹사를 지켜봐야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문제겠네요. 봉사 없애달라는 기도만 계속 해야 하는 건지. 안타깝습니다.

이 글만 봐서는 봉사보다 신앙의 문제를 풀어야할 것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지만 말끝마다 주님의 뜻이나 아멘을 하는 건 불편하고’ ‘은총 받기 원하면서 공동체 활동은 하기 싫어한다는 내적 갈등이 드러나네요. 가족주의에 기반한 기복신앙의 관점에서도 자신의 종교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습니다.

 

 

 

스콜라스티카 기억

프랑스 작가 미셀 트루니에 글이 생각나네요. 삶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지켜보는 거리에서만 나오는 경쾌하고 사색적인 문체가 매력적입니다. 기억의 방/언어의 세계 언어 이전 몸의 기억/나로 향한 문 광풍으로 기억의 문고리가 뽑히는 치매. 생애와 억압과 기억의 문제가 회화적 이미지와 겹치며 잘 맞아떨어집니다. 두 번째 단락 나 라는 세계는 혼자 일 때 저절로 향하는 문이며 문 열면 보이는 풍경이 겨울바닷가’ ‘어둑한 동굴’ ‘오후햇살 비추는 다락방등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 한 사람의 내면에 저것들이 다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으니까. 나라는 존재는 늘 종잡을 수 없는 나이니까. 아무튼 고유한문체가 있는 기분좋은 글입니다. 앞으로도 잘 살리시고요,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 말고(바닷가, 동굴, 다락방) 다른 것도 도전해보세요.

히나 변하는 그녀에 대한 아쉬움

 

 

오래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자기 분신이자 거울 같은 존재죠.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으니까요. 변하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은 실은 변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음이 엿보인 글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솔직한 글이 되었고요. 그녀의 변신을 다채로운 사람으로 명명했다가 열등감으로 해석했다가 글이 혼란스러운데, 정교하게 다듬어야 합니다. 과거를 모조리 부정하는 친구의 자기망각경지의 미성숙한 태도에서 느끼는 배신감과 얄궂음만을 지적하려고 한다면, 이 글은 전지적 시점의 글이어야겠죠. 우선은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글을 쓰면서 더 솔직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는 연습이 필요할 시기입니다. 사려 깊은 글-삶을 위해서.

주희 어쩔 수 없는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을까

 

 

건조한 문장, 솔직한 표현으로 담아내어 내용의 파격성이 더 격렬하게 다가온 글이었습니다. 큰 아버지 일가의 몰염치가 한 가족에 덮친 불운의 그림자가 너무 길고 짙어서 속상합니다. 이 악연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가장 약자인 딸이 느낀 울분과 불안과 공포가 어떠했을지 추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자기감정의 변천사를 곁들여주세요. 자기 관찰을 통해 자기 전망을 살펴볼 수도 있고요.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던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외로움에 관한 해석도 또 다른 해석의 경지를 열어줄 것 같아요. 그리고 큰아버지에게도 보내고 싶을 때 시도해볼 수 있겠지요.

가비 - 인생, 이 지독한 블랙코미디

 

미완의 글인데, 미아가 될 뻔한 상황 묘사가 실감나서 읽는 동안 몸이 쪼그라들 것 같았아요. 트라우마로 인한 원한감정이 발생하는 과정으로 풀어갈 것인가요. 가비의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틀을 크게 잡아놓으면 글이 붕 뜨고 추상적이 될 수 있으니, 더 좁혀서 잘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