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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글쓰기의 최전선 10기 -2차시 리뷰

가비

그간 겪은 이별의 사례를 나열했네요. 병렬식 구조라서 이야기가 개요식으로 짧게 전개되어 아쉽습니다. 이 중 가장 아팠던 이별 한 두 가지를 깊이 있게 써보는 게 글쓰기에 도움이 됩니다.

떠나보냄이란 표현이 낯설게하기 효과는 있는데 근거가 필요해요. 이별의 진부한 표현 대신 떠나보냄이란 단어를 썼으면 가비 고유의 해석이 뒷받침 되어야 말이 힘을 받습니다. 친척도 관계자들이란 사무적인 표현을 썼는데 필자에게 의미 있는사람이라는 바로 뒤의 뜻과 맞지 않고 이물스럽습니다.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날의 기억은 선명한 묘사가 생생하고요. 할아버지의 죽음을 더는 할아버지 가슴팍에 기대어 입으로 들어오던 각가지 맛난 것들이며, 귀로 들어와 머릿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주던 유년 시절’(-> 옛날이야기들로 가득한 나의 유년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보내 줘야 한다는 말이었다.”로 표현한 문장은 좋습니다.

 

 

주희

 

 

연극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고 주희님이 모노드라마 하는 것 같아요. 모난돌-고통담론과학 실험-통계로 이어지는 스토리가 점점 따라가지고 몰입하게 됩니다.

 

 

계단형의 그래프로 매끈한 곡선을 그리더군요. 왼쪽 끝과 오른쪽 끝에 있는 값들은 거의 무시되는 것을 보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변부에 대해 관심을 당연히 가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있는 값들이 무시된 것에 대해 화가 났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그것이 실체를 가지고 구체화되는 것에는 눈을 돌리고 있네요.’

 

 

이 부분을 계속 증명해나가면 더 흥미로울 것 같아요. 다음에 더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서 써보세요. 문장이 명료하고 감정이 날것이고 표현이 꾸밈없으므로 이 추세로 분량 늘이면 되겠어요. ‘더 길게!’

 

 

소울리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네요. 무심한 듯 조분조분 할 말은 다 하는. 글에는 어디에도 신음소리는 없고 외려 (안구건조증처럼) 건조한데 이상한 아픔이 전해져요. 마음이 뻑뻑해져요. 자기 객관화에 성공한 글입니다. 아버지와 형이 세상에 없는데 난 지금 자유로운가에서는 쿵, 가슴이 내려앉고요. 내게 닥치는 모든 걸 무화시키는 방법을 터득했다. 고통 받거나 타자화된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이 마지막 문장이 참 날카롭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주체가 형성될 수 없는 건지, 왜 그런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01의 분명한 세계가 고통 없음의 상태라면 그렇게 살아왔기에 고통을 계속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겠지요.

 

 

 

 

 

 

노래

 

 

엄마란 불안을 견디는 직업이 아닐까 하는 생각합니다. 엄마의 불안. 겨울날 동굴에 칩거 중인 딸과 엄마. 또각또각 엉뚱 발랄한 딸의 몽상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엄마의 눈빛 같은 것들이 대조를 이루면서 불안이 잘 드러납니다. 아프리카 양떼 이야기는 내용적으로는 매우 적합한 사례인데 정서의 톤이 안 맞는다고 할까요. 일일드라마 보다가 갑자기 다큐멘터리가 삽입되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글에 녹이기 위해서 배치를 달리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딸에게 지금 여기를 살라고 말하는 엄마. 결론은 멋있는데 교훈적 마무리의 강박이 느껴져요. 그렇게 말하기 위해 내가 포기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거세되지 않은 불안을 더 밀고 나가보세요. 제목이 왜 딸아 지금 여기를 살아라가 아니라 , 지금 여기 살고 있는가인지 궁금합니다.

 

 

자녀 대안교육 시키는 용감한 엄마로서의 삶, 그러나 일상적 외로움, 두려움, 불안함은 는 무궁무진한 글감이 되겠네요. 궁금합니다. 양떼 틈에서 교육을 시켜도 외롭고 불안하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더 섬세하게 표현해주세요. 제도 밖에서만 보이는 것들을요. 앞으로의 6. 살뜰히 기록해 보시길 응원합니다.

 

 

날아라지구로

 

 

근래 읽은 글 중에 가장 속상합니다. “남의 집에 시집을 오면 너 하나 희생하여 가정을 화목하게 해야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이나, 결혼 20년이 지나서야 명절 때 친정을 납골당으로 가는 대목은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며느리 은퇴라는 극적인 사건이 글에 중심을 잡아줍니다. 차분하게 잘 쓰셨어요. 그런데 라디오에 보내는 사연을 넘어서려면, 한 평생 시집살이에 대한 넋두리가 아닌 글로 승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개인적 사건을 이 세계의 징후로 읽어내는 구조적인 안목으로 며느리의 삶을 재구성한다면 이야기에 한층 힘이 실릴 것 같습니다. 마지막 결론 부분은 생생한 본문에 비해 설명적이고 막판에 장남론까지 끼어들어 가족 문제로 확대되니 논점이 흩어지고 긴장이 떨어집니다. 며느리 이야기만, 한 번에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해주세요.

 

 

지금은 덜하지만 30년전 만해도 아니 현재에도 여성들 중에서 며느리로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소수자일 것이다. (비문입니다) -> 지금도 덜하지 않다. 30년 전만 아니라 현재에도 며느리로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소수자의 지위에 놓이는 일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관계라 생각한다. (무슨 관계? 혈연관계를 넘어서야 한다?) 장남이라 이래야 돼고(->되고) 막내라 저래도 되고가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좋은 부모 자식 관계를 형성하면 무슨 노릇이라는 의무가 필요하겠는가? (->표현이 명료하지 않습니다. 부모자식 관계가 노릇이 없으면 좋은 관계라는 뜻인지. 좋은 관계에 대한 이미지를 더 구체화시켜주세요.)

 

 

상상

자 들어가는 이름 에피소드->엄마의 시집살이, 허스토리-> 둘씩 떨어져 자란 남매들-> 세월이 지나 함께 모여 사는 남매 관계의 모호함-> 갈등 중재자 역할-> 나의 지지자 아버지의 죽음 이후 중재자의 역할에 피로를 느낌-> 이방인의 자유를 갈망.

 

 

소재 자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는데 글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죠. 장구한 가족사를 다 말하려니 그렇습니다. 가족사를 더 축약하고, 앞에 자 들어가는 이름 에피소드나 어머니의 시집살이 이야기는 빼도 좋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드러내면서 관계의 갈등조정자를 그만두고 이방인 되고픈나의 욕망을 이야기하면 글의 구도가 좀 명료해졌을 것 같습니다. 일문일사 원칙 지키면서 하고픈 이야기를 좁혀서 풀어 가면 재밌는 글이 나오겠네요. 이야기가 톡톡 튀는 맛이 있고 무겁지 않게 흐르는 상상님의 리듬이 있습니다. 비문 고칩니다.

 

 

10살이나 차이 나는 맏이 오빠를 제외하고 밑으로 딸이 줄줄이 4명이나 되었으며 딸 3명의 이름 앞뒤로 자가 들어갔던 나는, 그 웃음의 파도위에서 기꺼이 증명사례를 자청했었다.

-> 나와 큰 오빠는 10살 차이다. 아래로 딸이 줄줄이 넷. 그중 세 명의 이름에 자가 들어간다. 그날 웃음의 파도 위에서 나는 기꺼이 사례 증명을 자처했다.

나 또한 위로받고 싶은 존재였구나를 알아채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는 순간들도 있었다.

-> 나 또한 위로받고 싶은 존재였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했다.

 

 

오늑

한껏 끼를 부려보는 글이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문장이 개성 있어요. 이런 시도는 좋습니다만, 과유불급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문장을 주어목적어동사로 우선 편안하게 써보세요. ‘그의 몸에 부딪혀 밤공기는 공명한다.’ -> ‘밤공기는 그의 몸에 부딪혀 공명한다.’ 처럼요. 제가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그간 읽어본 소설들의 단단한 문장에 항상 감동받았거든요. (철학자나 시인이 쓴 산문과 다르게) 고칠 데가 없다! 소설은 서사의 힘이라 잘 읽혀야하는 게 기본이라서 그런가보다 했어요. 그런데 오늑님 글은 문장이 술술 읽히진 않아요. 일부러 장치를 둔 건지 모르겠지만요.

 

 

이렇게 큰 고요함이 충돌하는 곳에’ -> 큰 고요란 밤공기몸짓인가요? 그렇다면 썩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밤만 되면 카트 끌고 열심히 달리는 요정아저씨는 주인의 향이 모두 휘발된 거리의 사물들을 찾아 나서며 (어디에? 사물에?) 엉겨 붙은 차가운 공기의 실타래(->적합하지 않아요)’를 걷어내고 그 아래에 아직 간신히 붙어있는 숨결의 간절한 얼굴이 생매장되어 묻힌 채 발견한다.’ (이 문장은 비문입니다.)

->요정아저씨는 밤만 되면 카트를 끌고 열심히 달린다. 주인의 냄새가 모두 휘발된 물건들을 찾아 나선다. 그 물건에 엉겨 붙은 차가운 공기를 걷어내면 아직 간신히 붙어 있는 숨결의 간절한 얼굴이 드러난다. 생매장 된 것이다.

 

 

망각을 부여 받은 그의 외로움이 노트르담의 곱추였던 콰지모도 마음속의 굴절처럼 사람들의 빛줄기들이 만나는 곳이 아닌 어둠 속으로 자신의 자취를 뻗은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문장이 최고로 난해하네요.

마지막 단락은 법정스님 어법이어서 글의 통일성을 방해합니다. 끼는 살리되, 더 담백한 문장으로 하고 싶은 말을 구체화해서 써보세요.

 

 

바람도리

 

 

도입부가 좋았어요. 진부한 거 같기도 하지만 시적이고 암시적이고. 뼈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는 거 같은 청각적 효과가 나더군요. 불길한 느낌이 조여 왔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제목은 내용을 담기에 너무 말이 컸어요. 나는 병들었는데 그는 아프지 않았다 쯤 되는 이야기가 펼쳐지니까.

 

 

글을 써서 읽어보면 탁탁 걸리는 부분이 있죠. 고칠 곳입니다. 어색한 문장이고요. 과제 발표하면서 잘 알아차리는 거 같았어요. 읽으면서 퇴고하세요. 제일 정확합니다. 내 귀에 거슬리면 잘못된 문장이에요. 그리고 내용을 피상적인 표현, 감정적인 어휘를 피하고 구체적으로 써보세요. 설명하지 말고 보여준다는 마음으로. 정보와 팩트를 수집한다는 책임감으로. 이 글은 줌 아웃해서 그림자만 잡아챈 글이라면 점점 줌인해서 마주하고 눈에 보이는 걸 묘사하는 거죠. 글이 구체화될수록 마음은 가벼워집니다. 작은 뼛조각까지 짚어서 꺼내놓는 거니까요. 감정의 결이 올올이 살아있어서 또 울분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섬세하면서 강한 글이 나올 거예요.

 

 

경덕쿵

 

 

문장이 안정적이에요. 밝고 깊고 고민하는 모습도 생기가 있는 청년감수성 뻗치는 글. 약간 시트콤 같은 분위기가 유쾌하고 좋았어요. ‘수시로 경로를 바꾸는 변덕스러움의 구체적 사례는 이 글에서 중요한 정보입니다. 꼭 넣어주시고요.

 

 

노력과 의지로 그에 부합하는 성취를 누리던 산업화 세대의 미덕에 균열이 간 지 오래. 성취감에서 삶의 동력을 얻기 힘든 시대에 다른 미덕을 추구하는 시도는 건전하다는 생각이다.’

-> 노력, 의지, 성취, 산업화, 미덕, 동력, 건전 등등 이런 죽은 말들이 연타로 들어가면서 글의 활기가 사그라집니다. 글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그럴 듯한 마무리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거 같아요. 현재의 희로애락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도 좋은 마무리입니다.

 

 

무얼 지망하느냐는 질문에 더 패기 있는 대답을 욕심내 봅니다. 화두로 품어보세요. 난 뭘 지망하고 있을까. 왜 꼭 지망해야하느냐. 지망의 뜻이 뭐지, 왜 그런 질문이 생겨났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겠죠. 그런 생각들을 꿰매고 벗기고 해체하고 그 중에 괜찮은 놈으로 하나 골라서 멋지게 대답해주는 걸로!

 

 

히나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을까. 울림 있는 화두네요. 고통도 삶의 속성이다, 하면서 사례로 들어가는데 중간에 외할아버지를 잃은 엄마의 아픔은 전체 맥락에서 튑니다. 삶의 기본 속성으로서의 고통의 보편성, 외할아버지나 자살남 사례가 보여주는 고통의 상호이해 불가능성, 등 주제가 광범위해요. 짧은 글이니 바로 치통에서 실연의 이야기로, 나의 고통에만 집중해서 주제를 좁혀보는 게 좋습니다. 실연담도 어떤 정황 제시 없이 고통스럽다는 상태를 또 고통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식이어서 아쉽고요. 지난 시간에 배운 감상보다 줄거리를 명심하고 내용을 붙여주세요. 그런데, 글이 매우 조신하고 산뜻합니다. 글의 내용이 꼬이는 부분 없이 잘 전달되는 건 훌륭한 미덕. 아무튼 지금 이 분량으로는 곤란합니다. 줄거리를 구체화해서 분량을 길게 잡고 써보세요.

 

 

슝슝

"당신은 지금 실력 있고 순종적이면서 버리기도 쉬운 사람을 뽑고 있는 거네요." 이걸 했어야하는데 아쉽네요. 이 대목이 완전 돋보이는 명대사가 되었을 텐데 말이죠. 그 말을 지르는 상상으로 시작해서 풀어가도 좋았겠습니다. 지금 이 글은 시간순으로 친절하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잘 읽힙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에 긴장이 떨어집니다. 건전가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문장을 술술 쓰는 것도, 비유가 적절한 것도 필자의 뛰어난 능력이지만 미생의 대사를 비롯해서 왠지 어디서 한번쯤 본 것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글을 다 써놓고 더 나은 배치로 단락 구성을 바꿔보던가, 주제문단에 더 독창적 해석과 사유를 녹여보세요.

 

 

고개를 숙이니 면접 전 역 근처를 뒤져 구두방에 들러 광을 낸 구두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 소설적인 장면인데, 여기서 끝나니 아쉬워요. 얼굴이 어떻게 보였는지도 더 쓰고. 면접 일정 알리는 전화가 왔지만 기쁘지 않았다는 이유도 더 구체적으로 써보세요. 나를 판매하는 게 뭐가 제일 어떻게 싫은지. 슝슝님 색이 짙어가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글 기대합니다.

 

 

 

랄조

용서는 숭고하다. 강요할 수 없다. 용서로 끝나는 게 해피엔딩은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담은 글이네요. 그런데 너무 장황합니다. 특히 앞부분 장례식 일화. 고통이 돈이 된다고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여기서 고통보다는 건강이 적합한 표현입니다. 물론 건강이 악화되면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담보로 보험이라는 상품이 나오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거지만요.

단락을 나누어 보세요. 첫째, 장례식장 일화 = 건강이나 죽음도 상품이 된다. 둘째, 고통은 개별적이다. 피해자에게 제3자의 충고는 월권이다. (그럼 어떤 윤리적 태도가 필요할까?) 셋째, 용서는 숭고하다. 용서를 하는 게 우월하고 안 하는 게 도덕적 결함은 아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가 됩니다.

 

 

문체가 단단하고 문제의식이 좋은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혼란스럽게 뒤섞여있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셨으니 영화에서 고통-복수 서사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해도 좋겠네요. 우선은 글을 쓰고 하고 싶은 이야기별로 단락 나누기. 일문일사로 끊어 치기. 그리고 적합한 단언 선택으로 글에 혼란을 최소화하기에 주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