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다니던 길가, 가던 장소라 해도 매번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기분과 상황에 따라 보이기도, 아니 보이기도 하는 법. 하필이면 그날따라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동네의 사회복지관에 큰 아이 서예수업을 신청하러 갔다가 사무실 복도에 붙어있는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어요. 담당자에게 물어봤더니 주 2회 어른들 무료급식 하는 일이었는데 일손이 부족해서 사무실 직원들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 이제는 해야겠구나 싶었지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봉사활동을 보고 자란 탓에 “언젠가 나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서정민 씨. 그녀가 오랜 동안 다져온 마음바탕에 ‘기회’라는 꽃씨가 날아온 순간이다. 마침 아이들도 초등6, 초등2학년으로 자기 앞가림 할 나이가 됐으니 모든 여건이 무르익었다 판단한 것.
첫 봉사활동은 주방장의 지시에 따라 썰고, 다지고, 볶고, 급식이 끝나면 설거지하는 일이었다. “몸은 피곤해도 즐거웠어요. 함께 자원봉사 하는 사람들이 바르고 착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 나누면서 많이 배웠지요. 또 봉사활동 하고나면 항상 웃으면서 돌아갔으니까요.”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하다보니까 자신이 즐겁고 도움 받게 되더라는 그녀는 봉사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씩 넓어졌다고 말한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녹색어머니회’ 일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교통체계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스쿨존도 지켜지지 않고 신호체계도 그렇고요. 정말이지 아이들이 아침에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오는 오는 것은 ‘신이 보호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1년 동안의 녹색어머니회 경험을 통해 교통문제에 대해 심각성을 느낄 즈음 그녀는 신문에서 ‘녹색교통’이란 단체를 알게 됐다. 녹색교통은 친환경 교통정책을 수립, 연구하는 시민단체다.
교통사고 피해가족 돌보며 배웠다
“제가 문제의식을 느꼈던 부분이고 취지에 공감을 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회비를 내면서 회지도 받아보고 관심을 갖다가 봉사활동을 시작했지요. 회지발송 등의 일을 하면서 교통사고 피해가족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뜻이 있으니 곳곳이 길이었다. 교육학을 전공한 서정민 씨는 교통사고 피해가구를 한 집씩 방문하면서 교육상담하는 일을 맡았다. 이 일을 통해 다양한 세상살이를 목도하고 “자신의 편협한 생각, 즉 편견을 깰 수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흔히 ‘편모슬하의 아이들은 결핍이 있고, 삐뚤어졌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만 막상 가까이서 지켜보니 아이들은 밝고 생활력 강하고 건강했습니다. 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어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로 집에 있고 본인이 일해서 아이들 둘 키우며 지하 전세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지요. 상담 때 추가적으로 도움이 더 필요한 부분이 있나 물었어요. 예를 들면, 아이학습지도나 물품지원 등 개인마다 원하는 게 다르거든요. 그런데 그 분은 ‘지금도 충분하다. 아이들 건강하고, 아빠 살아있고, 내가 몸 성해서 일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띵하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그녀. “저 분이 나를 돕는 사람이고 나의 스승이다. 세상은 내 영혼의 학교라는 절절한 느낌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이후 봉사활동에 탄력을 얻게 된 서정민 씨. 방문상담 외에도 교통사고 유자녀 여름, 겨울 방학 때 캠프 일일교사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렇게 그녀의 활동무대가 넓어지는 것에 비례하여 마음 밭도 더 기름진 옥토가 되어갔고 소중한 직함도 얻게 됐다. 녹색교통 이사가 된 것. 대개 환경, 교통 분야의 교수나 전문가가 이사직을 맡았는데, 자원봉사 출신으로는 그녀가 최초의 사례다.
나 대신 남에게 쓰는 '참 좋은 후원 '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봉사’와 ‘후원’은 함께 했다. 8년 전 봉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월 1만원부터 후원을 시작, 그녀는 현재 보육시설, 노인복지센터,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등 5군데에 총 십여만 원의 후원금을 내고 있다.
“아이들 둘 키우면서 생활비가 가장 많이 들 때였어요. 하지만 그 돈 없다고 해서 당장 밥 굶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어떤 이유로든 못하겠다 싶어서 적은 돈이라도 일단 시작하자 결심했습니다.”
서정민 씨는 45세다. 하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트머리로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은 수수한 차림이다. 염색, 파마, 화장 등을 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쓰는 돈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들 사교육도 최소한으로 지출한다. “나에게 쓰는 대신 남에게 쓰고, 내 자식에게 쓸 돈 나누어 남의 자식에게 쓰는 것”이라며 덤덤히 말한다.
이런 좋은 뜻은 가족의 공감을 얻었고 기부바이러스는 온 집안에 퍼졌다. 남편은 물론 아이들도 월 5천원, 3천 원씩 후원금을 내기 시작한 것. 고3 때까지 반에서 유일하게 핸드폰을 갖고 있지 않았다가 올해 대학생이 되면서 핸드폰을 선물 받은 큰 아들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축구공보내기’에 선뜻 내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적은 돈이지만 기부금 내는 것에 익숙한 터라, 불필요한 소비를 절제하고 지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쓰더라는 것. “후원은 당장 돈이 나가는 것 같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을 얻게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봉사, 후원, 독서, 여행... 삶의 기둥
서정민 씨는 녹색교통 외에도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안내도우미를 한다. 그곳을 이용하려는 어르신들의 회원증 만드는 절차를 돕고 이용안내를 맡고 있다. 그리고 자원봉사를 마친 나머지 시간은 독서와 강의 듣는 것에 쓴다.
“배우고 익혀야지요. 공부는 졸업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나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책, 그 다음은 내가 사는 나라, 나아가 내가 사는 지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책을 기준으로 선택해서 읽고 있습니다.”
‘자원봉사, 후원, 독서, 여행.’ 이 네 가지가 자신의 삶을 이루는 뼈대라고 소개한다. 저 중 하나만 실천하고 살아도 헛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녀는 네 가지 모두 수월히 해낸다. 얼핏 엄격한 원칙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에게 억척스러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다.
“제가 특별하고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니에요. 돈과 시간을 좋은 곳에, 남과 더불어 쓰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