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길거리에서 누군가 그를 보고 “감독님~"하고 부른다면 사람들은 영화감독보다는 야구감독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다큐멘터리 <송환>으로 유명한 김동원 감독. 그는 만화에 자주 나오는 캐릭터를 닮았다. 호랑이처럼 무섭지만 가난한 2군 선수의 집에 남몰래 쌀 한가마니 갖다 놓을 것 같은 ‘휴머니티’한 인상이다.
서류가방보다 괴나리봇짐이 어울리는 그가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영 어색하다고 하다는 김동원 감독. 하지만 교수실은 물리적 공간일 뿐. 그가 거주하는 장소는 그대로였다. 인터뷰 당일 연락두절로 애를 태운 그는 “새벽에 광화문에서 물대포 좀 맞다가 핸드폰을 분실했다”고 터놓는다.
물대포 세례에 핸드폰 분실한 ‘우리들의 교수님’
물론 카메라를 가져간 것은 아니다. 그냥 사람들하고 술 한 잔 하고 들렀다가 새벽까지 있게 됐단다. 매사 그런 식이다. 장대한 기획과 심오한 의도는 없다. 사람의 끈끈함이 있는 곳에 발길이 향하고 마음을 붙이면 쉬이 거두지 못하는 천성에 따를 뿐이다. 그런 질박한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한 번씩 영화로 만들어진다.
상계동 주민과 함께한 3년을 담은 <상계동 올림픽>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작품은 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들떴을 때 서울 상계동 달동네 주민들이 상계동에서 명동성당으로 다시 부천시 자투리땅까지 내몰리는 과정을 담은 기록영화다. <상계동 올림픽>은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실천적 다큐멘터리의 정수로 꼽힌다.
“우연히 방송국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다 상계동 빈민촌 철거 현장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 1년은 다큐멘터리를 의식하지 않고 찍었어요. 그 때 상계동에 하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정일우 신부님이 일일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까 힘들 것 같아서,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용도로 시작했어요.”
철거민과의 동거...'끌림'이지 '정의감' 아니다
이후 상계동에 머무는 날이 늘어갔다. 같이 있으리라 결심했다. 철거촌이라 돌이랑 못 등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공부방을 차려 아이들의 숙제도 봐주고 공도 찼다. 점점 그들과 ‘식구’가 되어갔다.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3년을 훌쩍 넘겼다. 그 축적된 기록을 추려서 부천의 철거 위험을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 <상계동 올림픽>이다.
“그걸 보고 남들이 다큐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죠.(웃음) 저보고 다큐 찍으면서 철거촌에 3년 있으라고 하면 못 있죠. 근데 저는 거기에 있는 게 그렇게 싫지 않았어요. 아줌마 아저씨들이랑 술 먹고 노는 끈끈한 분위기가 저한테 되게 따뜻했어요. ‘끌림’이지 ‘정의감’ 그런 건 아니에요.”
상계동 생활을 거치며 “인생관이 변했다”는 그는 영화의 나래이션을 빌어 고백한다. 무자비한 권력의 횡포에 짓밟힐수록 “우리는 엄연한 인간이 되어갔다.”고.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길을 결심한 것도 이 때다. 카메라와 테이프 몇 개만 있으면 자유로이 다니면서 작업할 수 있으니 극영화보다는 자신의 소극적인 성격에 맞았다고 한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진실을 스스로 마음에만 묻어두지 않기로 결심한 김동원 감독. 그의 절정은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을 다룬 다큐멘터리 <송환>에서 꽃피운다.
이 작품에는 늘 여러 수식이 따라붙는다. 제작기간 12년, 테이프 500개, 800시간의 촬영분량, 2045년의 수감 기간,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선댄스 영화제 ‘표현의 자유상’ 수상작 등등. 하지만 이 엄청난 통계치는, 영화를 보는 순간 무력해진다. <송환>에는 그저 주름 자글자글한 촌로들의 눅진한 삶만 있기 때문이다.
<송환> 장기수 할아버지들처럼 늙고파
“제가 만났던 장기수분들은 우리의 기준으로 불행한 사람, 지독한 사람입니다. 그래야 되는데 막상 만나보니 편안해 보인다는 거죠. 보통 일흔 살 넘은 할아버지들의 찌들고 의욕을 잃은 모습을 보아왔는데 이분들은 맑아보였어요. 반했지요. 나도 나이 먹어서 저런 눈빛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불의나 고문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사사로운 유혹이든 신념이든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만 있어도 늙은이가 됐을 때 떳떳할 수 있음을 그들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송환>의 편집 도중까지도 이 분들의 삶을 어떻게 포괄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500여 개의 테이프에서 ‘고갱이’를 추리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터. 그는 “생각이 있어서 정리했다기보다는 작업을 하다 보니 생각이 정리가 됐다”며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헝클어진 부분을 그 기회를 통해 풀어나갔다.”고 말했다.
날카로운 이념의 대립을 넘어 ‘사람’에 대한 순정한 시선을 드러낸 <송환>에서 그는 설명하는 태도가 아닌 한 걸음 물러서는 처신으로 작품의 균형을 잡는다. 그리곤 말한다. “이념도 이성의 한 부분이고 이성도 사람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고. 구수한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이념이 세상을 바꾼 적이 없었음을, 삶보다 우월한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송환>이 미국에서 상영됐을 때는 이런 질문도 나왔다고 한다. “당신은 남한에서 왔습니까? 북한에서 왔습니까?"
“차갑게 관찰하고 뜨겁게 참여한다.”
이렇듯 김동원 감독의 미덕은 절제된 시선에 있다. 기록자는 너무 빠져들어도 너무 비껴나도 안 될 것이다. 그는 안에도 있지 말고 밖에도 있지 말고 중간에도 있지 말아야 하는 다큐의 법칙을 지킨다. 대상화의 섣부름이 없다. 그들이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차갑게 관찰하고 뜨겁게 참여한다.”
십 년 세월을 묵묵히 받아 안은 <송환>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그는 마지막 날 ‘할아버지들이 버스 타는 이별장면’을 꼽는다.
“촬영을 해야 하는데 촬영할 때가 아니잖아요. 이별할 때잖아요. 카메라 들고 이별해야 한다는 게... 카메라를 던져버리고 싶고 그 때 참 힘들었어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조연출이랑 카메라가 두 대 갔지만 또 그 순간은 제가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까스로 찍었다며, 그는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들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한다.
도(道)를 알고 정(情)을 아는 다큐멘터리의 맏형, 김동원 감독은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네 삶의 뿌리가 어디냐. 어디다 뿌리를 내릴 거냐. 네가 뿌리만 잘 내리면 잘 해결 된다고. 몇 년을 같이 살았다고 해서 그들의 아픔이나 가난이 이해되지는 않겠지만 내가 목격한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면 그 다음엔 자기와의 약속에 의해 작업이 지속된다고.
어떤 고난도 받아들이겠다는 것. 촛불집회 초기에 시민들의 닭장투어도 그런 심정에 따른 행동일 거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고통, 불안, 두려움은 겪기 전까지는 큰 일 같은데 막상 겪고 나면 별 거 아니라는 걸 많이 경험했다”며 따스한 시선 아래 단단한 속내를 드러냈다.
‘춥고 배고픈’ 독립영화 감독생활도 그에겐 거뜬하다. 물질적 궁핍의 긴 터널을 통과했으되 불행하지 않았다. 3일 이상 밥 굶어본 적이 없지만 배고플 때 먹으면 반찬이 없어도 밥은 언제나 맛있게 먹을 수 있단다. 호텔 뷔페에서 먹는 거나 된장찌개 먹는 거나 느끼는 행복은 똑같다며 그만의 ‘행복 밥상론’을 편다.
‘끝까지 함께 가겠다’ 자신과의 약속 지킬 것
“개인적으로 제도권에는 안 들어가리라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원칙을 배반했습니다. 상계동에서 약속한 게 제 기준이거든요. 근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산동네가 아파트보다 재밌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전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거든요. 교수자리에 오래 있을 것 같진 않고 있는 동안 다큐멘터리 교육방법 개발 등 자료를 체계화할 계획입니다.”
대관절 ‘상계동의 약속’이 뭐 길래. 말해줄 수 있는가 묻자 지천명의 그가 열혈 청년처럼 나지막이 입을 뗀다.
“끝까지 같이 가겠다.”
잘 가고 있다. 김동원 감독은 여전히 자신의 영화로 시대와 대결한다.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에 충실하다. 지난 봄 중국, 네덜란드, 한국, 필리핀 4개국의 위안부 할머니 5명이 등장하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끝나지 않은 전쟁'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였다. 또 <상계동 올림픽> 다음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그의 본향 기록영화 제작집단 ‘푸른영상’도 건재하다. 감독 예닐곱 명은 한 달 활동비 50만원으로 버티며 미군기지에 반대해 싸우는 대추리를 두 편의 영화에 기록했고, 학습지 교사 파업투쟁 등을 담아내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펼친다. 작품 감상 후 비평, 주위에 소개 등 회원들의 능동적인 후원으로 운영된다.
촛불집회 다큐, ‘생명력 있는 가치’로 만들어라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그는 촛불집회를 어떻게 볼까. ‘촛불’이야기에 이내 얼굴이 밝아진 그는 ‘위대한 사건’이라며 더군다나 시위 생중계는 생각도 못한 일인데 모두에게 아주 중요하고 신나는 장이 열렸다고 말했다. 특히 기록에 나선 시민들의 카메라가 몰리는 데만 몰리지 말고 독특한 시선으로 담아내라고 당부했다.
“다큐로 만들 계획이 있다면 이 상황이 끝난 후에도 힘을 가질 수 있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져야지요. 일지형식의 기록은 이미 언론사에서 하니까 시사적인 가치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투사해서 좀 더 보편적이고 생명력 있는 가치로 승화시켜야합니다. 가령 촛불집회 구석에서 목격한 일이라던가, 촛불집회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던가 등등..”
80년대에 치열한 삶의 현장을 지켜온 이들의 선택을 두 가지로 갈렸다. 사람을 등지거나 더 보듬거나. 김동원 감독은 후자다. 인간 안에는 스스로 균형을 잡으려는 힘이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때문에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된 지난 20년 동안에도 큰 절망은 없었다. 차면 기우는 법. 다들 한 쪽만 추구하다가 ‘이게 아닌데’ 느끼던 즈음 촛불집회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못 견뎌서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희망사항이었죠. 이렇게 빨리 확인할 줄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 집회를 통해 자기가 모르는 뭔가를 알아가고 그것들이 자기에게 힘을 준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확 타오르는 거죠. 조중동의 실체를 알았듯이 점차 철거민, 비정규직 등의 문제도 알아가고 사회를 읽는 눈이 깊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가난 안에서 행복 찾는 기술 있는 사람들이다”
새만금 사업, 뉴타운 추진 등 ‘개발과 번영’의 논리는 여전히 득세한다. 권력에 의한 힘없는 국민의 추방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사회의 주류질서에서 밀려난 소수자의 문제를 없애진 못하리라 조심스레 내다보았다. 누구도 우리 동네 뉴타운 해달라는 주문만 있지 개발 싫다는 사람이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모를 부유함이 최대의 가난이라고 했던가.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지 않음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와 동고동락한 철거민 역시 더 많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최소한 삶의 터전과 최소한의 존엄성을 위해 싸웠다. '살던 데서 살게 해달라' '집을 부수더라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에 해달라'고 절규했으나 무시당했다.
“우리는 관심을 갖고 그들이 심리적 박탈감을 덜 느끼도록 손 잡아주고, 또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 정도면 그들은 살만 합니다. 그 분들은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기술이 있는 분들이거든요.”
마지막 퍼즐조각처럼 이야기가 완결된다. <송환>에서 통일이 아닌 사람에 대해 얘기했듯이 그는 늘 ‘사람’에 대해 사유하고 질문한다.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는 생을 걸고 풀어야할 큰 질문이자 궁극적인 질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답을 안고 출발했는지 모른다. 데뷔작 <상계동 올림픽>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린다’ 고.
* 오마이뉴스 <백인보> 2008. 7.1 김송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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