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정구호라는 시스템은 늘 작업창이 여러 개 떠있다. 메인화면은 단아한 절제미의 모던스타일 여성복 ‘구호’가, 각각의 창에는 영화미술, 문구 식기디자인, 요리, 설치미술의 다양한 콘텐츠가 담겨있다. 이 모든 솔루션은 그가 짜고 그가 직접 클릭한다. 기회가 다가오면 즉시 접속하고, 판단이 완료되면 엔터키를 누름에 주저함이 없다. 평소 쌓아올린 내공과 민첩한 행동력으로 자신의 삶을 업데이트 시킨다. 하나의 몸으로 여러 번 사는 21세기형 아트전사, 정구호. 그의 삶이 작동하는 원리가 궁금하다.
상상하라 “5년, 10년 후 나의 모습 그린다.”
어린 구호는 남달랐다. TV에서 매듭공예가 나오면 곧장 재료를 사다가 그대로 재현했고, 순정만화의 캐릭터를 기름종이도 안 대고 똑같이 따라 그렸다. 남다른 눈썰미와 손재주를 타고났고, 잘 하는 만큼 욕심도 컸다. 소년 구호는 꿈꾸었다. ‘그래픽디자이너가 될 테야.’ 중학교 때부터 유학을 가려했으나 부모님의 반대가 완강했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직접 학교를 알아보고 수속을 밟아서야 떠날 수 있었다.
미국 휴스턴 대학에서 광고미술을 전공한 뒤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래픽디자이너로,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패션디자이너로 진로를 변경했다. 이유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른다섯이다.
“시작이 늦은 만큼 고민이 많았습니다.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무명의 패션디자이너 정구호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열심히 하자.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성과를 이룬다면 그 때는 좋은 기업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해보리라.’
“발로 뛰었습니다. 한국은 나를 잘 모른다. 우선 나를 알리자고 생각했지요. 주기적으로 패션쇼를 열고 업계 관계자, 언론사, 선후배들에게 초대장을 돌리며 나는 ‘이런 옷 만드는 사람’이란 걸 알렸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의 꿈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그는 현재 제일모직에서 구호 외에도 빈폴 등 10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맡고 있다.
집중하라 “시간을 쪼개고 지각을 몰입한다.”
정구호의 삶은 꿈을 통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됐다. 한반도의 강산이 변하는 동안 그의 삶도 수려하게 변모했다. 패션디자이너로서 뿐만 아니라 영화 <정사><텔미썸씽><황진이>등의 미술감독으로도 맹활약 중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는 시크한 한국적 멋을 살렸다는 평판을 받으며 영화제의 미술상을 휩쓸기도 했다. 흔히 ‘선택과 집중’의 논리로 한 가지에 올인 할 때 그는 두서너 가지쯤은 너끈히 해낸다. 비결은 지각과 시간의 세분화, 그리고 집중력이다.
“유학기간에 아르바이트를 스무 가지 넘게 해서 살았습니다. 열여덟 살 이후로 한 달 이상 편안히 쉬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일하고 일 마치면 집으로 가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다시 일하는 식이죠. 시간을 쪼개서 쓰는 생활이 몸에 배었고, 그래서 일의 집중도가 높습니다. 옷 한 가지를 하는 데 열 시간을 들인다 해도 실질적으로 전부 작업시간은 아니잖아요. 제 경우 일하는 시간은 짧지만 정말 5분도 쉬지 않고 일합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 훈련된 덕분에 그는 아예 멘탈세팅이 달라졌다. 옷 만들 땐 영화를, 영화 일을 할 때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전원은 저절로 꺼져버린다. 그는 오히려 다양한 일을 하면서 모드변환이 자유롭고,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고백한다.
철저하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선택해 완벽 기한다.”
멀티플레이어 정구호의 삶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절대원칙은 ‘완벽함’이다. 그는 하나의 작업을 시작할 때 완벽한 솔루션이 나와야 실행에 옮긴다. 시동을 걸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만 일단 걸리면 시속 150Km로 질주한다.
“우선 일을 선택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노력해서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또 하나는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가 입니다. 내가 맡음으로 인해 그 분야에 도움과 발전을 이룰 수 있는가를 놓고 고민하는 거죠. 예를 들어 <스캔들>같은 경우는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활을 새롭게 고증해보고 싶다는 의욕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스캔들>에서 한복뿐만 아니라 가구, 그리고 유판서 댁 안채 부용정, 조원의 별채, 숙부인의 우화당 등 무대세트를 손수 제작했다. 촬영세트를 짓기 위해서 무려 10여 개월의 고증작업을 거쳤다. 또 치맛자락 밑에 스치는 꽃신제작을 위해 무형문화재에게 의뢰하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을 기했다.
“일의 가짓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효율성이 문제지요. 고증작업을 일일이 나서서 하기보다 한복 만드는 일은 전통의상 교수님의 자문을 구하고, 대학원생들에게 자료조사를 의뢰하는 등 전문 인력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결과물을 취합해서 검토하는 일을 제가 하는 겁니다. 이러한 작업 과정을 통해 각 전문가들의 깊이를 배우고 또 생각의 폭도 넓히고, 옷을 만들 때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탐미하라 “쇼를 하라면 쇼를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얼핏 그는 일벌레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누구보다 즐겁게 논다. 하루 수면 4시간을 제외하고 완벽하게 일하고 빈틈없이 즐긴다. 일단 주말마다 반드시 떠난다. 여행을 가면 주말이 이틀이 아니라 4-5일로 늘려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의 품에서 충만하게 누리고 나면 돌아오는 5일간 일할 힘을 얻는다.
또 “나의 욕심과 대중의 취향은 다르다”고 말하는 이 현명한 탐미주의자는, 트렌드 파악과 문화적 자양분을 쌓기 위한 ‘놀이’를 게을리 않는다. 도시 안에서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며 떠돈다. 누구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완벽하게 ‘변장’하고는 대학가를 가거나 동대문 밤 시장을 돌고, 백화점 매장을 방문해 고객과 이야기를 나눈다. 날마다 한두 시간 씩 웹서핑을 하는 건 기본이다. 거의 모든 전시회는 빠짐없이 다닌다. IT분야의 호기심도 왕성하여 메신저가 처음 나왔을 때는 메신저로 회의를 하기도 했다. 그의 일상에 패턴화 된 건 없다. 오직 새로운 것, 다른 것, 독특한 것에 대한 주체 못할 열정만이 그의 세포를 팔딱이게 한다.
“어디서 ‘쇼를 하라’고 하면 쇼를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니까요.” 그래서인지 그는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스트레스 지수가 일반인 대비 무려 30%나 낮게 나왔다고 털어놓는다. 의사가 물었단다. “도대체 무슨 일 하는 분이세요?”
그리하여, 창조하라 “나무처럼 자라는 공간, KUHO”
나비처럼 유유자적 날며 보고 벌처럼 콕 쏘아 작품을 빚어내는 정구호.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 보는 자가 아니다. 더 충만하게 보고 더 간단하게 보고 더 강력하게 본다’는 니체의 말대로, 그가 공들여 본 것들은 제 안에서 무르익어 예술작품으로 열매 맺는다. 대표적인 것이 옷이고, 집이고, 길이고, 도자기이고, 궁극적으로 ‘정구호’라는 아이덴티티다.
“다시 태어나면 건축을 하고 싶을 만큼 공간에 대한 애착이 남다릅니다. 제게는 옷도 몸을 담는 공간입니다. 제 옷이 좀 크다고 하는데 딱 맞는 옷만 입어봐서 그런 거죠. 저는 몸과 옷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입혀지는 방식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호 고유의 실루엣입니다. 옷은 라벨을 떼어내도 색깔과 소재에 상관없이 실루엣에 따라 어느 브랜드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구호의 모던함과 구호를 입는 사람들의 감성은 늙지 않을 것입니다.”
아트디렉터로서 그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배열로 담을 수 없다. 99칸 한옥의 미로처럼 무궁무진한 놀이와 생성이 일어나는 공간적 지도로만이 설명된다. 정구호라는 집. 빛과 바람이 쉬이 드나드는 그곳에는 그가 뿌린 꿈들이 나무처럼 청푸르게 자라고 있다. 김송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