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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그을린 예술>- 휴식과 재생산의 밤을 사유와 쓰기의 밤으로

휴식과 재생산의 밤을 사유와 쓰기의 밤으로 지켜내야하는데 그러기가 얼마나 힘이든지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새로 나간 직장에서 계속 컴퓨터로 뭔가를 쓰는 작업하다보니 집에 오면 컴퓨터 앞에 앉게 되질 않더라고요. 눈도 허리도 아프고. 몸을 가로로 눕히고만 싶은 거죠.

 

부디 직장인도 수업들을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말에 동조하여 토요일 6시에 수업을 마련해놓고 저는 성찰의 계기를 안게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의 척박한 노동현실에서 일상의 불길로 그을린 예술 수행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의 삶에서 하나-를 무한히 욕망하고 추구하는 건, 삶을 살아가는 자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도 글쓰기수업이란 새로운 영토에 자신의 몸을 들여놓았을 테고요. 그것이 점차 좌절되는 것을 집단적으로 같이 응시하고 겪어야하는 일이, 또 하나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애초 글쓰기의 최전선은 일상의 글쓰기입니다. 심보선 말대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선동하는 게 아니라, 글 쓰는 사람 따로 있지 않다는 심심한 진실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독자의 분리, 문학-비문학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의 치안적 질서는 각 개인의 역능과 재미를 제한합니다. 그것 외부에서 세계의 비참에 대해 말하려는 의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을 시도하고 가꾸어나갈 때 최소한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삶을 재건하는 창작의 기쁨을 느껴보자는 것이 일상의 글쓰기를 제안한 취지입니다.

 

 

그러나 말은 정교하지만 삶은 산만합니다. 심보선은 자크랑시에르의 말을 빌어 오히려 자신에게 부과되는 규범적이고 기능적인 역할과 정체성을 거슬러, 누구나, 자유롭게,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역량을 선언하고 수행함을 문학의 정치라고 얘기하지만, 우리는 삶으로 확인합니다. 그 고유한 실천(“할 수 없는 것을 하기”)과 그 실천에 수반되는 탈 정체화(“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기”)까지 가는 길은 너무도 가파르다는 것을요. 중간에 그만두거나, 과제를 내지 ()못하거나, 책을 앞부분만 읽거나, 과제를 안 했는데 출석해야 하나 말하야하나 고민하거나 등등 여러 상황에 직면하는 것 자체가 그래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자기인식이기 때문에요. 자기인식은 곧 자기(한계) 인식이죠. 한계는 또 출구입니다. 한계를 알아야 거기서 벗어나죠. (노예를 벗어나는 길의 첫 번째 조건은자기가 노예임을 아는 것이라고 하듯이요.)

 

 

수업시간에 직장인들-대학생들이랑 다시는 글쓰기 수업 안 해.”라고 삐져서 말했지만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하는 자들과 그 고단한 일상에 틈을 열고 리듬을 맞춰가며 그을린 예술이 가능할 런지 고민하겠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장인으로 등장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무대를 준비해보려 합니다. 꽃이 빨리 피고 순간 져버린 이번 봄을 예측할 수 없었듯이, 그저 감내해야하듯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그저 응시하고 견디는 것 외에 별 방법이 없네요. 그게 쓸쓸하고 또 어쩌면 그래서 살만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수업시간 남산벚꽃나들이, 화사집, 그리고 사람이야기를 기약해봅니다.

 

 

 

배롱

나 이거 쓰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라는 글쓰기반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해져옵니다. 저도 글 쓰면서 모니터 앞에서 닭똥같은 눈물 엄청나게 흘렸습니다. 혼자 보내는 애도의 작업이었겠지요. 울 수 있었던 그 말랑말랑한 신체의 상태가 그립기도 합니다. 지금은 더 속상한 일 많아도 예전처럼 눈물이 나진 않아요. ‘더 잘하고 싶을 따름이지요.’ 삶의 장인으로서 가장 멋진 슬로건이라고 생각해요.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태, 이 긴장을 잘 유지하시면 글이라는 반려예술과 재미난 시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글쓰기는 어느 날, 내 삶에 중요한 것으로 들어왔지만, 일순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순위가 51%의 비중이라면 글쓰기는 49%의 비중이었기 때문에 일순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항상 목말랐다. 글쓰기를 삶의 전면으로 내세우기까지 개인적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바람이 일깨워 주었다. 지난 시간 숙제에 나오는 제천 휴게소의 바람이었다. 어느 봄날, 제천 휴게소에 갔는데 초라한 휴게소에 바람이 매우 심하게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출발이 이러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나무와 강

영화 얘기였네요. 봄이면 무슨 기일 돌아오듯 이 영화가 떠오르곤 했는데. 덕분에 달리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우선 글이 일목요연해지고 문장의 군더더기가 제거되어 수월하게 읽힙니다. 얼마나 퇴고를 정성스레 했는지 느껴집니다. 필자의 생각도 마지막에 정리해주셨고요. 저는 조금 결이 다르게 느꼈어요. 볕은 따뜻한데 바람은 스산하고 무척이나 변덕스럽고 느닷없이 사라지는, 그런 봄날처럼 얄궂은 상태가 사랑의 본질이라고 영화가 말하는 게 아닐까. 주인공의 캐릭터를 통해 극대화되었는데, 저런 인격을 가진 여자는 어른 아이다. 피터팬 증후군이다, 라고 인격의 문제로 드러내기보다는 어떤 성품, 성향적 특징들이 사랑이라는 사건을 통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봄날씨처럼요. 이영애의 문제라기보다 사랑의 문제.

 

 

이건 제 생각이고요. 나무와 강님처럼 선하고 모범생적인 성향, 저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은 이영애처럼 그러지 못하겠죠. 그럼 인격의 문제인가? 그건 또 쉬이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구조에서 어떤 충동과 성향이 어우러지는 게임 같은 거니까요. 결론을 끝까지 밀고 나간 시도는 좋습니다. 그것이 판관의 시선이기보다 조금 더 섬세한 결을 살피는 시선이면 좋겠어요.

 

 

-봄날은 참 짧다. 잠시 한 눈 팔면 언제 왔다 갔는지도 모를 만큼. 놓쳐버린 봄에 대한 아쉬움이 누구나 봄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는 자신에게 찾아온 짧지만 아름다운 봄을 온몸으로 즐겼고, 가는 봄날이 서러워 온몸으로 아파하며 보냈지만 그래서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는 가는 봄을 잡기위해 온몸으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마음이 붕 뜬 것처럼 어정쩡한 상태로 삶에 대한 권태와 무기력이 이어지는 시간을 보낸다.

 

 

 

 

멜로

정리를 잘 해놓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와 닿지 않는다라고 하시네요. 멜로님이 후기 쓰실 때도 가끔 와 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흔한 비유로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가 좀 떨어져있는 걸까요. 말할 수 있는 이성적 역량에 시간과 공을 들인만큼 느낄 수 있는 감성적 역량도 노력을 하면 발달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웹툰을 찾아보고 일상적인 것에서 소수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으로 결론내린 글은 모범생의 답안지처럼 정확합니다. 교양이란 게 어려운 철학사 꿰고 값비싼 뮤지컬 보는 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중요한 척도가 되는 이유도 그렇겠지요. 삶을 생을 세계를 세상을 풍부하게 느끼는 것만큼 나의 세계도 풍요로워질 테니까요. 멜로님의 멜로-소수 감수성 뻗치는 일상이야기^^ 멸치 다듬는 남자의 일상적이어서 정치적인 글쓰기 기대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글로 된 일상물은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워낙 심심한 내용이다 보니 시각적인 자극도 없이 글로만 풀어내려면 그 만큼 일상을 깊이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게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자,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그들만의 평범한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비슷한 방식으로 풀어낸다면 웃음을 주는 재미는 덜하겠지만,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이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에게 감춰진 소수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공감하고 타인의 처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심보선이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준

글이 일상으로 많이 하강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줍니다. 한준 글은 호수처럼 죽은 듯이 고요하지도 파도처럼 사납지도 않은 어떤 정서가 특징이에요. 가령, 한강에 잔파도 이는 날의 풍경이랄까. 잔잔하면서 약간 요동치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중요한 건, 한강. 서울 한강이 바다처럼 넓고 크긴 하지만 인공적인 기술이 많이 개입해서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주거든요. 어떤 순간에 거대한 욕조처럼 보이기도 해요. 한준 글도, 난 더 자연스러우면 좋겠다. 특별히 폼을 잡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더 심연으로 내려가지도 않아요. 이건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럴 거 같아요. 그럼에도 이번 글은 군데군데 성찰이 돋보여요. 지적할 부분은,

 

 

일단 일반론은 얘기하지 않는다. 취업의 어려움. 누구나 얘기하고 어디서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얘기는 제외한다. 친구, 가족 사이에서 오간 생생한 말과 사례를 엄선해서 대략적인 배경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본론. 딴 짓 예찬, 이라는 주제를 잡았으면 이 글을 읽은 사람이 딴 짓 하면 인생이 행복하구나, 풍요롭구나느낄 수 있게 해줘야죠. 딴 짓에 빠져든 이유(학과공부를 멀리한 이유), 보컬, 연극, 수영 등 딴 짓의 각각 재미까지 묘사합니다. 특유의 유머리스한 문체가 돋보이겠지요.

 

 

-어른들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알지만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언제나 무리로부터 이탈을 꿈꾸지만 이탈은 곧 낙오라는 불안이 항상 차오른다. 친구들이 하나 둘 기업에 입사 할 때마다 지금이라도 준비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회사 다니는 친구를 여럿 만났다. 진로와 적성을 고민하는 내게 일단 입사 하고 생각해라라는 현실적 대답이 돌아왔다. 맞는 말 같았다. 어떤 친구는 사십이 넘어도 진로 고민은 언제나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이 들어서도 진로고민을 한다니 웃기지만 슬프기도 했다. 중년의 진로고민은 다른 직업에 대한 열망일까 퇴사와 치킨집 사이의 갈림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