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 글쓰기란 다수 경험의 결과물이다

[글쓰기의 최전선]

아침에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는 후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번씩 안부와 수다를 전하곤 해요. 일상 잡사가 꼭 젠더와 정치 문제로 연결되는데. 주로 프랑스의 빛과 어둠을 주로 얘기하죠. (살아보니) '' 보기와 달리 프랑스가 얼마나 보수적인가, 또 어떤 사안은 얼마나 급진적이고 합리적인가. 일전에 후배의 프랑스인 레즈비언 친구가 그랬다네요. 너네 한국 부럽다고. 우리는 68혁명 이후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되고 여러 제도가 개선되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국은 70년대에 비하면 얼마나 여성(소수자)의 지위가 크게 변했느냐가 요지입니다. 일견 타당한 말인데, 마치 전교 1, 2등 하는 친구가 너무 성적 올리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려서 허허로운 웃음이 나왔어요.

후배는 프랑스도 어차피 마찬가지라고, 남자들 기득권층이고 그래서 보수적이라고. 거기도 TV CF에는 여성이 푸른 잔디밭에서 아이를 안고 하얀 천을 휘감고 나오지 (피죤 선전인가요? ㅎㅎ)남자가 아이를 안고 나오진 않는다고 하더군요. 육아의 주체를 여성으로 상징화하는 거죠. 그래도 10년 전 후배가 처음 프랑스 가서 "여기서 애 낳으면 출산수당 준다"고 해서 무척 놀랐는데 한국도 출산수당이 나오긴 합니다. 육아살이 나아진 건가요. 우리 사회 하층계급 여성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죠. 주거비용 부담이 늘고 비정규직으로 고용 불안정 커지고 교육환경 악화되고 삶의 조건은 더 나빠졌어요.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이 숫적으로 얼마나 증가하는가보다 어떤 방인가, 빚으로 얻은 방인가, 방음이 과연 되는 방인가, 그 방에서 과연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하겠죠.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국가에서나 삶은 힘듭니다. 억압받는 자는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아 힘이 들고, 억압하는 자는 소유욕과 획득에 대한 욕망으로 스스로를 비인간화시키니까 인간 본성이 왜곡되고요. 울프가 말한 셰익스피어의 누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평범한 여성, 샤로트 브론테와 제인오스틴, 파리에서 공부하는 후배, 글쓰기에 모인 우리들. 모두가 사는 동안은 '자기 자신에 대해 투쟁을 벌여야하'는 존재이죠. '저녁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 할 수 없고 사랑도 잘 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으니까요. '큰 재산을 모으는 한편 열세 명의 아이를 낳는 것, 그것은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고 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합니다.

 

울프의 글을 보면서, 결혼을 앞둔 밤밤의 글을 보면서, 주거형태와 욕망추구 사이에서 방황하는 백납의 글을 보면서, 수정액으로 수공업 교열의 신공을 발휘하며 요약 정리해온 나무와 강님의 글을 보면서, 힘과 용기를 배웁니다. 선지자의 지혜가 아니라 갈지자로 휘청하는 모습에서 배어나는 삶의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는 힘과 용기를요. 같이 수업하는 동안 무엇이든 느낀 그대로를 말하고 주고 받고 하면 좋겠어요.우리가 서로의 삶(의 경험)에 영향 받고 공유하고 서로의 삶(의 진실)을 참조하는 존재임을 울프는 아래와 같이 표현했지요제가 <자기만의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리뷰 들어갑니다.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여러 해 동안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배롱.

목가적 글쓰기의 절정을 보여주시네요. 추리소설보다 이쪽에 더 재능이 있으신 듯하다고 말하면 삐지시려나요? 절반의 진실입니다. 감칠맛 나게 이야기를 끌고 가시니 팔공산 자락 끼고 앉아 시간여행 하는 것 같아요. 경주 최씨 마을 17대 종부의 삶. 마을명칭의 유래, 종부의 역할, 복숭아 수확 장면 등 충실한 정보와 정확한 묘사와 밀도 있는 전개가 할머니의 일생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네요. 이 향토적 산문에서도 행간에 배롱님 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긴장과 서늘함이 묻어난다는 겁니다.

 

'한 평생 종부로서 노동하는 여성으로서 고생만 하다가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 이야기가 흔히 빠지기 쉬운 결말을 절묘하게 피해가요. '메주가 서까래에 매달려 있거나, 삭힌 감들이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기도 했답니다.' 같은 김윤숙 여사의 '자기만의 방' 장면이 그래요. 따뜻한 외가의 풍경이 아니라 당시 살림의 한 용도로 살다간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처연과 연민을 넘어서는 인식의 힘을 준달까요. '서안이나 지필연묵을 가져본 적이 없는 할머니'가 남긴 이야기가 배롱님의 육체를 타고 흘러나오도록 계속 쓰세요. 본 자, 들은 자는 말을 해야죠. ^^

 

-외할머니는 백지가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써지기 전의 백지가 아니라 지우개로 하나하나 지워진 백지. 거기에 얼룩얼룩 이야기가 남아 있어 가끔은 노래라도 흘러 나왔지만, 이젠 노래마저도 끊어졌습니다.

 

지원. 반성문이 절절해요. 책을 읽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글을 쓰는 건 더더군다나 힘들다. 느낀 그대로를 말하는 건 중요하죠. 지원은 자기상태와 감정을 말하는 것에는 능숙한 것 같아요. 그게 시작이에요. 그간 독서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왜 최전선 교재가 이리도 어려울까에 대한 물음은 특히 귀합니다. 단지 교재의 난이도 문제인가. 독서 방식에 문제가 있었는가. 더 집요하게 파고들어보세요. 수업 이전에 읽은 책들 목록 10권을 적어보고, 그리고 혼자 읽는 사적 독서와 수업에서처럼 같이 읽고 토론하는 공적 독서의 차이도 세 가지 정도 찾아 보세요. 책 읽고 글쓰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 같이 화두는 추상적일 수 있지만, 그것의 근거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이어야 글이 자기독백의 일기 형식을 넘어섭니다.

 

이요르.

핸드폰케이스를 샀다. ~ 핸드폰 케이스를 사길 잘했다. 리드와 엔드가 호응하네요. 그간 이요르 특유의 관념적인 글에서 한층 구체화시킨 시도가 돋보여요. 같이 알록달록한 핸드폰 사고 만지작거리는 느낌을 줍니다. 연필 한 자루를 사는 것에도 소심하고 절제하는 모습이 사고 싶은 것은 사버리는 반대 유형의 동생과의 대비로 더 잘 드러납니다. 이런 구도 좋아요. 그런데 왜 언제부터 검약한 생활이 몸에 밴 건지. 절제와 인내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부모님이나 교과서의 훈육이 내면화된 것인지,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건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세요. 궁금하네요.

 

이 글이 단지 핸드폰케이스를 산 행위에서 나아가 가치관의 변화, 삶의 양식의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죠. 본인도 '용기'라는 표현을 했고요. 정확해요. 다른 삶을 사는 것은 안 하던 짓 하는 실천이니까요. 5만원 교통카드 분실 사례 등 '허무하게' 잃은 사례 적절히 배치했어요. 돈에 저당잡히지 않고 돈을 활용하면서 살 수 있는 삶은, 수업료 내고 미친 짓도 해가면서 가치를 저울질 하고 하나씩 배워나가는 것 같아요.

 

-내 인생인데 나를 너무 억제해왔다고 느꼈다. 너무 어깨를 좁히며 지냈다. 이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었고 조금씩 어깨를 펴왔다.

 

겨울.

작은아버지의 죽음. 가까운 지인의 죽음은 큰 혼란과 자극을 가져다주죠. 죽음이 삶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죠. 이별이 사랑에 대한 가치를 되돌아보게 해주듯이요. 겨울님도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지셨는데요. 왜 작은 아버지는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셨을까? 과연 내 삶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일까? 등등. 그리고 얼마나 생을 사랑하느냐, 온몸을 다해 간절히 담았던 것이 무어냐, 삶을 향한 의지를 묻는다 등 큰 단어를 막바지에 집중적으로 나열했습니다.

 

그런데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 그 이후의 변화가 글에서는 중요하죠. 생각의 파동, 심란함, 싱숭생숭을 넘어선 무엇. 죽음을 간접체험하고 구체적 일상적 변화 없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겨울님의 고유함이 안 살아나거든요. 작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살이 3~4키로 빠졌다던가, 일을 하지 못했다던가 등 어떤 상태 -그것이 깨달음이든 아니든요-를 이야기하는 게 외려 더 호소력 있습니다. 타인의 죽음이 나의 삶을 어떻게 다르게 구성하게 했는가는 꽤 중요한 진술입니다. 그간 몇 편의 글에서 겨울님의 뒤척임, 존재의 몸부림이 일관되게 전해져옵니다. 무엇보다 문장이 가지런해지고 있어요. 초점을 맞추는 사진가의 손놀림처럼 진지한 문장들. 전체적으로 점점 더 선명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밤밤.

결혼을 앞둔 그대를 위해 준비한 듯 맞춤한 책이었네요. 그래서인지 이전보다도 더 절실하고 밀도 높고 생생한 '외치는 글'이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삶의 행사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죠. 기존의 가치로 감당 안 되는 일이 많아지니까 자연스럽게 온갖 물음이 퐁퐁 솟아납니다. 예비 신부의 예민한 촉수로 자기만의 방을 빼앗길 거 같은 두려움, 빼앗으려는 낌새들, 빼앗기지 않겠다는 집념을 잘 진술했습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아무도 심지어 부모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했어요. 아마 밤밤님도 스스로 말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겠죠. 글에서도 '익명의 존재가 되지 않겠다'는 어떤 저항의 원칙은 있는데 '어떤 삶을 살겠다'는 생성의 원칙은 나오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헐겁게 느껴지거든요. 신혼집에 자기만의 방, 혹은 나만의 책상은 있는지, 그곳에서 하루에 몇 시간 정도 고독을 보장받을 수 있는지 등등 그런 소소한 부분부터 물적 토대를 점검하는 식으로 글을 풀었다면 앞의 유모차 끌고 나온 여성들 삶과 맞물리면서 더 진한 글이 되었을 거에요.

 

가부장제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는 일이 여성성을 자각하게 하고 세상에 날을 세우게 하지만, 그 두려움과 예민함과 긴장감이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생성하는 에너지가 되어야겠지요. 앞으로 밤밤님의 글쓰기가 그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되길 바라고 응원할게요.

 

-주어진 역할로 존재하지 않고, 나로서의 존재양식을 인정받는 것은 여전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다면 저는 저의 삶에서 당신이 말했던 16세기 여성들처럼 익명을 요구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제가 끊임없이 저의 성을 의식하고자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니까요.

 

백납.

삶의 욕망(사랑)과 삶의 조건(주거)을 조율해나가는 과정이 잘 그려졌어요. 빈집이라는 독특한 주거형태에 관한 사례가 나와서 글이 더 흥미롭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보적인 가치가 있고. 디테일 묘사 충분해서 지루하지 않고. 다만, '하지만'의 오남용으로 글이 흐름이 끊기고 어지럽고. 논리의 비약과 혼란이 발생하고.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바보다. 하지만 정말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핵심문장을 잘 처리하지 못하니까 메시지 수용에 대혼란. 글의 후반으로 갈수록 논지가 명확하고 명료해져야해요. (뒷심을 잃으면) 글쓰기는 언제나 허리케인!

 

우리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가장 일 순위는 욕망보다는 조건이다.-> 욕망과 통장()이다. 정도가 어떨지. 삶의 조건의 상부구조(욕망) 하부구조 ()이 아닐까 싶고.

 

- 오는 10월 월세 계약이 끝난다. 이후의 주거형태에 대해 고민이 된다. 집사람은 나를 사랑하지만, 혼자 살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자기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자기만의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 스마트폰 첫 화면에는 피터팬의 좋은방 구하기바로 가기가 놓여있다. 당장 이사할 것도 아니면서 경기침체기 주식보유자처럼, 계속해서 검색하고 있다. 삼백에 이십. 삼백에 이십.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