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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경철수고 -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

왜 이렇게 어려운 걸 교재로 택하느냐는 원성을 듣는 책들이 있습니다. 맑스, 벤야민, 니체의 책, 지난 기수에는 에드워드 사이드. 그리고 장르로는 시집등등. 그런데 쉬운 책이 꼭 좋은 책은 아니거든요. 나의 인지적 정서적 관습적 토대에 아무 이물감 없이 스미는 책은 혼자서 읽어도 무방하잖아요. 공적독서의 장에서는 좀 낯선 책이 좋습니다. 어려운 책이 곧 나쁜 책은 아니며, 불편한 책일 따름이죠. 화를 돋우는 의미에서요. ^^ 기존의 가치와 충돌을 일으키는 새로운 것과 접속할 때 인식의 지평이 흔들리고 그러면서 새로운 사유의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삶이 답답할 때는 뭔가 새로운 논리 근거, 인식의 틀이 필요한 거고요.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사물이든 화나게 하는 존재를 가끔은 의도적으로 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경철수고를 읽을 때, 못 알아듣겠는 백 마디 말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 알아듣겠는 한 줄 문장에 반해서 빠져들곤 했어요. 분업, 화폐, 사적 소유, 감성 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문장이 가슴을 뛰게 했으니까요. 더군다나 25세 청년 맑스가 자본주의라는 당대 삶의 토대를 이루는 질서를 낯설게 바라보고 집요하게 밀고 나가면서 소외된 노동의 비밀을 밝혀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신기한 거죠. 존경스럽고요. 그 팔딱이는 사유들이 완전 모둠으로 담겨있는 이 책이 저는 철학책, 경제학책, 사회학책이 아닌 아포리즘으로 읽혀요. 그 감흥을 같이 나누고자 했습니다. 어디서는 이 책으로 10주 내외 강의도 열리니까 꼼꼼히 읽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어떤 것을 배울 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관계 맺기보다 지속적인 대화를 한다는 자세로 접하는 것도 하나의 책 읽기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외라는 말. 일을 한다고 다 소외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맑스의 사적유물론(역사유물론)은 그것을 밝혀낸 거죠. 노동은 어느 사회나 있어왔는데, 똑같이 보여도 반딧불과 번갯불만큼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요. 우리는 자신이 만든 노동생산물의 일부를 빼앗기고 노동에 대한 간섭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작되기 전엔 이런 통제가 본격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농노도 농기구와 자기 땅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자본주의 들어서 체계적으로 노동 소외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외는 외부의 세계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뜻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공사장에서는 내가 일을 하는 건지 모자와 삽이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고, 재봉틀 앞에서 누가 잘랐을까되뇌이며 퇴근할 때가 되어야 제 정신이 돌아온다고 한 전태일이 느낀 감각이 바로 소외죠. 생산과정의 소외.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이 소외는 심리적 박탈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박탈도 포함합니다. 이게 다 사람이 분업체계의 한 부속품이 되는 바람에 생긴 일입니다. 분업으로 인해 타인과 관계도 차단되고, ‘공감능력도 상실합니다.

 

 

맑스가 참 정이 가는 이유가,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경구를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가슴 따뜻한 사람인 거죠. 전태일도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맑스와 전태일은 말해줍니다. 최고의 감성은 최고의 이성과 통함을,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진보적임을. 맑스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경유하여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맑스를 잘 읽은 것이겠지요.

 

 

배롱- 딱 맞는 비유가 아니면 쓰지 마라

수사법이 몇 군데 묘합니다. ‘한물 간 가수의 얼굴처럼 처량하고 몽롱하다.’-> 한물 간 가수의 얼굴이 처량한 건 맞는데 몽롱하다는 어색해요. ‘코끼리만 한 몸집을 가진 당나귀의 귀는 작고 귀여웠다.’-> 코끼리만하다는 것과 작고 귀엽다는 모순적이에요. ‘나는 그 해가 애매한 것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다. 목요일마다 서는 아파트 장터 같은.’-> 장터의 이미지는 활기참, 북적임 같은 건데 애매하다는 게 (당나귀 땜에 그런 거겠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원래 딱 맞는 비유가 아니면 안 쓰는 게 낫습니다. 어설픈 수사가 메시지 수용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글이 산만해져요. 특히나 직유법은 작가의 바닥을 드러내는 가장 빠른 수사법이라는 말이 있어요. 진부한 수사법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거겠죠. 이 글에는 암웨이 동생, 속물적인 동네 엄마들, 신문아저씨, 분식집, 건어물, 아이들, 남편, 3층 아줌마까지, 글의 분량에 비하면 등장인물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지는 생생한 인물 한 두명만 등장시켜 공을 들이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이 어딘가 소설적인 요소를 모아놓긴 했는데, 조금씩 다 애매하게 부족한 듯하고, 무엇보다 작가의 가치관을 파악하기 어려워 아쉽습니다. 그것을, 즉 말하고 싶은 결론적 부분을 배롱님이 독자의 짐작과 추론과 상상에 맡기는 경향이 있어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래도 소설적인 것의 완결성에 욕심내기보다 인물 캐릭터, 어떤 장면 등 한 가지에 도전하는 게 더 좋겠습니다.

 

 

밤밤-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다

장래희망이라는 이름의 사기극. 제목 좋아요. 주제의식으로 다가가는 노력도 좋고요. 다만 너무 설명으로 서사를 끌고 가니 글이 딱딱하고 지루해요. 읽고 나서 정말 사기극이네...’하는 허탈함을 안겨주려면 하나의 주된 인물이 등장해야합니다. 전태일을 통해 소외된 노동을 실감하듯이 그렇게요. 그게 자기 자신일 때 가장 생생한 이야기와 묘사가 가능하겠죠. 그것은 절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희망도 고통도 사회적인 의미망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이니까요.

주제가 좋은데, 문장이 군데군데 지뢰밭입니다. 복문과 비문이 많아요. 일문일사. 글 쓸 때 상기하세요. 아주 의도적으로 끊어치기 해야 합니다. 한 가지 문장에 하나의 정보를 담겠다. ‘직업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문장 가장 피해야합니다. -> 직업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야. 말로는 외쳤지만 행동은 아니었다. 유사고시에 매달렸다. 이런 느낌으로 다듬어보세요. 아래 문장은 좋습니다. 자기 이야기를 풀어갈 때 글이 엉키지 않고 힘이 있죠.

 

 

-이후 대학은 막연히 자유를 느끼며 노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학교 수업을 적당히 듣고, 남는 시간에 꽹과리나 장구를 치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술이나 마셨던 것 같다. 돌이켜 보고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직업을 향해 달려가야 할 동기를 잃은 순간 방황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어리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직업을 향해 달려 가는 것 외에는 해 본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을 오직 장래 희망에 가둔 채 생각한 결과였다. 나에겐 살고 싶은 삶이 없었다.

 

 

이요르 표정이 있는 이야기의 힘

성장소설의 한 페이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흥미롭고 신서하고 궁금해요. 엔딩이 착한 결말이 나서 좀 당황스럽지만 그 마저도 어떤 통일감 속에서 읽힙니다. 자기소개연습의 첫 장면부터 생생하고요. n수생을 보면서 느끼는 대학진학의 어려움, 경쟁이 일상화된 세대들에게서 나타나는 쓸쓸한 풍경과 내면의 혼란이 잘 드러납니다. 사람은 고유성을 갖고 싶은 본능이 있기에 타인과 차이를 만들어내려고 하게 마련인데, 그게 왜곡되어 천박한 경쟁심으로 변질되기 쉬운 세상인 것 같습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오다 보니 위계질서의 혼란이 오고, 그 안에서도 또 계급화하려고 하죠. 삼수생이 될 뻔한 자신이 처지를 떠올리면서 겸손을 다짐하는 결말이 아니라,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더 길게 써보길 권해요. 글에서 어떤 표정이 읽히는 건 좋은 징조거든요.

 

 

-줄곧 좋아해온 우울한 노래, 삼수생이 되면 정말 싫다. 우울한 문구도 싫다. 무기력, 진짜 싫다. 예전엔 쓸데 없다 생각했던 웃긴 게시글, 엄청 필요하다. 그거 없으면 죽는다. 공부하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밥이 맛있을 때 정말 행복해서 눈물 나온다.

 

 

나무와 강 다 아는 얘기는 과감히 줄여라

이 글이 칼럼이 되려면 우선 지하철 에피소드를 세 줄로 줄여야합니다. 지하철을 탔다, 자리를 노렸다, 아이가 가로챘다, 엄마가 야단치지 않았다. 이게 배경이면서 글감이 되겠지요. 이 정보가 너무 장황하게 나와서 글이 늘어집니다. 모두가 한번쯤 경험했을 예측 가능한 상황을 오래 끌고가면 글에 긴장이 떨어지죠. 그 다음, 이 글감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모임에서 털어놓았더니 아무도 호응하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나치게 규범적인 인간인가, 를 중복해서 자문자답합니다.

 

필자의 자기반성이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려면 더 구체적이어야지요. ‘지하철에서 자리를 가로채는 아이는 버릇이 없다는 관습적 해석에서 벗어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글은 그게 없어요. 모임에서 들은 말들에서 번뜩이는 해석-나를 찌른 말들 하나를 다듬어야죠. 또 하나. ‘나이 들면 고지식하고 자기고집이 강해진다를 이 글의 주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지하철 에피소드와 유사한 사례, 옳다고 믿었던 판단이 흔들렸던 에피소드를 병렬로 간단히 두서너 가지 제시해주면 좋겠지요. 일단 길게 잘 써주셨고 칼럼-시도를 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고 돋보입니다. 자기반성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자기성찰, 자기연민을 넘어서는 무언가 발견이 있어야 좋은 글이지요. 조금씩 시도해보셔요.

 

-갑자기 내가 정답이라 알고 살았던 것들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엇인가 정해진 것은 없었던 것처럼 정해진 정답도 있을 수 없다. 단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변화된 생각에 맞추어 삶의 방법도 달라질 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답을 찾고 있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속 작은 외침을 지울 수가 없다. 왜 살수록 삶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헷갈림의 연속이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짱아치 청소년 노동문제란 없다

청소년에게 학교는 삶과 가장 밀접한 주제다.(->‘장소다혹은 화두다’ ‘문제다가 나아 보여요. ‘이 동적인데 주제라는 단어는 정적이고 추상적임) 꿈을 이루기 위해 학교를 다닌다. 꿈이란 무엇일까. 직업이다. 글의 초반에 학교, , , 직업 등 너무 큰 말과 무거운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글을 시작하네요. 과해요. 청소년을 설명하기 위해 학교를 학교를 설명하기 위해 꿈을 꿈을 설명하기 위해 직업을 가져오지만, 정작 아무 것도 설명되거나 화두로 던지고 있지 못하는 꼴이죠.

 

글의 서두는 작고 구체적인 일화로 시작하는 게 좋아요. 바로 청소년 꿈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암울하든 발랄하든 바로 어떤사람, ‘어떤현장으로 데려가야죠. 청소년 노동 문제에서 웹툰의 캐릭터 예를 든 시도는 참신합니다. 이야기 초반에 윤아이, 나일등 등 캐릭터를 정리해주는 건 좋은데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설명형식이라 쟁점부각이 안 되고 문제설정이 식상하고. 뒷부분 알바생의 증언이 외려 생생해서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고 잘 읽히네요. 월급 떼어 먹는 사장들, 온갖 부당한 대우들. 그것에 맞서 청소년 유니온을 만들거나 어떤 움직임도 있는 걸로 아는데, 그걸 소개해주면서 끝냈으면 어땠을까요.

 

청소년 노동문제를 어른에게만 맡겨둬야 할까이 질문 역시, 선동도 아닌, 계몽도 아닌 애매하고 아쉽네요. 청소년의 꿈과 노동문제 일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학교 밖 청소년의 아르바이트생의 현실이라고 주제를 명확히 해야 글이 제 방향을 찾아갑니다.

 

 

 

 

-노동문제는 누구도 비껴나가지 않는다. 우리는 꿈꾸지만 그 꿈마저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기업들이 있다 교육의 이름으로 인력을 동원하는 일들이 취업준비생들을 넘어 대학생들에게까지 이제 고등학생들에게까지 일어나고 있다 청소년의 꿈을 어른들에게 맡겨둬야만 할까 청소년들은 자신의 노동에 관한 문제를 어른들에게 맡겨놓기만 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