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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안하무인을 생각하다

일희. 2년 전 같이 공부한 분에게 온 문자

 

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저는***에 와서 ***랑 같이 일해요. 요즘, 시를 읽고 싶은데 추천 받고 싶어서요. 고독감, 소외감에 분노의 감정이 커져 있어요. 안하무인처럼 사는 사람도 많고, 자신은 괜찮은데 다른사람들이 문제라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견고함에 질리기도 하고.
 
솔직하게 살았으면..싸움일더라도 까발렸으면..
 
요새 한달에 두편씩 짧은 글을 써요. 내 인생에서 정말 즐거웠던 시간, 글쓰기의 최전선! 
고마워요, 지금도.

 

 

일비. 지난주 같이 공부한 분에게 보낸 메일

 

000님,

오늘 낮에 메일을 열어 봤을 때, 바로 답장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메일을 받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먼저, 환불을 요구하는 학인이 있고 "높은 분"을 찾으며 제 연락처를 요구하기에 멜 주소를 알려줬다는 반장의 전언을 받고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저와 반장은 서로 맡은 역할이 다른 연구실 동료일 뿐 강사-반장이 주종 관계도 아닙니다. 반장이 안 된다고 한 것을, 제가 "안 되는 게 어딨냐"고 (마치 은행에서 창구의 소란을 눈치채고 나온 지점장이 직원에게 지시하듯이)"처리해 드려라" 할 수 있는 처지와 형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희 반장은 연구실 전체 강의 구상과 진행을 맡은 '강좌 매니저'입니다. 굳이 위계를 따지고 싶으시다면 강좌의 운영에 관한 한 그가 저보다 "높은" 결정권자입니다.

 

<글쓰기의 최전선>을 3년간 진행하면서 오늘처럼 이런 참담한 경우를 처음 당합니다. '(은유샘과) 얼굴 붉히고 싶지 않다' '(대학생의)코 묻은 돈을 가져갈 셈이냐' '서비스' '환불' 운운하시니 저는 능히 당했다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오늘 이런 사례를 통해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에 있었는가 깨닫고 반성도 했습니다.

 

저는 생전가야 '얼굴 붉힐 일' 없는 고상한 인문학 연구자로 살기 위해 공부하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노동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끼니를 때우고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어떤 감정노동을 감내하는가 잘 느끼고,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졌다고 그의 돈은 과연 코가 묻었는가, 노동자의 돈보다 더 절실한가,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섬세하게 사고하고, 본의 아니게 얼굴 붉힐 일에 휘말리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깨어있어야 하는가, 그런 걸 알려고 공부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강좌가 개강하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연구실 회계가 처리되었고, 말씀하신 "한 강좌의 서비스를 제하고 남은 비용"을 계산할 명확한 기준도 없습니다. 그나마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배려는 나중에 형편이 될 때 글쓰기의 최전선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정도입니다.

 

현대사회는 사람을 '소비자' 정체성으로 끊임없이 위치 지우려 하고, 서로를 도구적으로 대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피폐하게 하는 배치를 만들어냅니다. 수유너머R은 그런 합리성, 효율성을 따지는 자본주의의 도구적 관계를 넘어서는 삶의 실험을 위해 모인 연구공동체이고 <글쓰기의 최전선>도 그런 고민과 지혜를 나누기 위한 사유의 자리입니다.

 

그것에 의문이나 비판을 하고 싶거나, 그래도 '환불'을 주장해야겠다면, 게시판에 정식으로 요구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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