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의 최전선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다는 것

11월 15일 합정동에서 작은 북토크쇼가 열렸다. 지난5개월 성폭력피해여성들과 글쓰기수업 하면서 쓴 글을 모은 문집의 발표회 자리다. 제목은 <굿바이 회전목마>. 성폭력이 반복되는 현실, 고통이 영원회귀 하는 상태와 굿바이 하자는 의미가 담겼다. 참가자들에게 공모해서 뽑힌 제목이고, 표지디자인도 디자이너로 일하는 참여자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과정이 쉽지 않았다. 어떤 글을 실을 것인가, 누가 참가할 것인가, 글의 제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낭독할 분량과 내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결정과 선택의 순간이 회전목마처럼 돌아와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버겁고 막막한 상황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조율하고 이해하고 행하면서 한 고비 한 고비 넘겼다. 비교적 효율과 성과 위주로 살아온 삶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의 감각은 전면 새롭게 세팅되어야 했다. 내가 어디까지 타인과 수용하고 변화하면서도 조응할 수 있는가, 시도하는 좋은 배움의 과정이었다. 함께 한 참가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는 흔들리면서 주저앉았다가 털고 일어났다가 더듬더듬 왔고, 회전목마를 떠나보냈다.

 

마지막에 발표자들이 그간의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최연소 열세살 참가자 유정이가 했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나오기 싫었고 지루했는데 좋은 이모들(ㅋ) 만나서 재밌어졌다는 뜻의 말을 하면서 "제가 겪은 일이 큰 일인 거 같기도 하지만 아무 일 아닌 거 같기도 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진실에 근접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고통을 해석하는 다른 하나의 관점을 더 얻었으니, 그걸로 고마운 거다.

 

 

 

 

프롤로그: 글쓰기 워크샵을 마치며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다는 것

 

내가 성폭력피해경험자들과 글쓰기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피해경험이 없는데 그들과 같이 수업할 수 있을까?” 하나같이 당연히 내가 성폭력 경험이 없다는 전제 하에 얘기했다.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여성들에게서 성폭력 피해의 가능성은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 성폭력 피해자는 언론에나 나오는 이들로 타자화 하고는 당연히 지금-여기에는 없는 듯이 행동했다. (마치 모든 사람이 대학을 다녔음을 전제하고 초면부터 학번과 전공을 묻는 사람들처럼) 그런데 여기저기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관계가 깊어지면서 여성이기에 겪어야하는 아프고 내밀한 피해경험을 몇 차례 들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하는 친구가 말해주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아서 그렇지 여성의 40%는 성폭력을 경험한다고. 그래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펴낸 '성폭력피해자를 위한 DIY가이드'북 제목이 <보통의 경험>이라고 했다. “네가 수업을 하든지 모임을 가든지 그 무리에서 최소한 두 명은 있다고 생각하면 돼.” 친구의 말을 듣고는, 그간 나도 모르는 사이 뱉었을 서툰 말들을 생각하니 뜨끔했다. TV나 뉴스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에휴, 저 아이 (혹은 저 여자)는 이제 어떻게 살까.” 속상하다며 무심코 한 마디씩 간섭을 하는데, 그 말이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현재진행형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성폭력피해자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통이 만연한 세상이다. 무지는,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음은, 분명 죄다. 그런데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큰 편이다. ‘노동자의 고통’ ‘88만원 세대의 고통’ ‘여성의 고통은 그런대로 학습이 되었는데 왜 이렇게 성폭력피해자에 대해 무지할까 생각해보았다. 그와 관련해서는 거의 정보를 접할 기회가, 특히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폭력피해 당사자가 주어로 된 기사조차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관련 기사는 대부분 가해자 중심의 보도가 나간다. ‘서울 어디에 사는 김 모 교수는 제자를 수차례 성폭행했다는 식이다. 순결이데올로기 같은 사회적 편견, 너무도 사적 영역인 몸에 각인된 수치심 등 때문에 피해자는 죄인처럼 어디에다 말 못하고 이중 삼중의 고통과 소외를 당하는 게 성폭력 사건이었다. 미디어에서 통제 혹은 밀봉된 당사자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당사자가 아프지만 당당하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성폭력피해경험자의 글쓰기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가 된다. 노동자의 심정을 자본가가, 장애인의 입장을 비장애인이, 동성애자의 아픔을 이성애자가 대신 말하는 것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고착시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고통, 성폭력 피해의 고통을 남성의 언어로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피해자의 언어가 필요하다.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피해경험자들과 같이 사건의 서사를 구성하고 아픔을 나누고 의미를 발견하면서 피해자의 언어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고통을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때 2, 3차 피해의 가속화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글쓰기 수업이 진행됐다. 어떻게 무엇을 쓸지 글쓰기 방법론에 관해서 학습했다. 그리고 소설, 에세이, , 여성주의이론서 등 매주 정해진 한 권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내용과 느낌을 돌아가면서 발표했다. 이 부분이 왜 좋으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하고 말하는 기회를 가졌다. 인류 최대 비극인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생존자가 직접 쓴 르포르타주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얘기했다. 아들이 쓴 엄마에 대한 기록문학인 <소망 없는 불행>을 읽으면서 우리 역시 엄마에 대한 글을 썼다. 고통에 대한 아름다운 응시를 담은 최승자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을 읽으면서 고통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길어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일상의 성정치학을 다룬 <페미니즘의 도전>을 보면서 여성으로서 피해자다움이라는 성 역할을 강요당한 사례, 나이듦, 모성 등에 관해 질펀한 수다를 떨었다.

 

이것은 해석의 힘을 길러주었다. 철학자 니체의 말대로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앓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성폭행을 당했으니) 여자 인생 끝이라는 해석, 여자가 행실이 부주의해서 생긴 일이라는 해석, 치욕스러운 일이니 입을 다물라는 해석 등등 난무하는 말들의 장대비까지 맞는다. 책을 읽고 더 사려 깊은 말들과 다양한 해석과 입장을 접하는 과정은 우리의 고통이 도대체 어디서 오고 왜 나를 아프게 하는지 더 침착하고 냉철하게 인식하는 기회와 말들, 피해자의 언어를 모을 수 있었다.

 

매주 읽고, 말하고, 생각하고, 썼다. 그 반복적 행위는 존재를 외부로 펼치고 안으로 다져주었다. 이것이 내공일까? 뭔지 모를 자존감과 돌파력이 점점 생긴 참가자들은 하나둘 자신의 속 이야기를 꺼냈다. 가족사를 쓰고, 피해경험을 쓰고, 일상의 곤란을 썼다. 삶을 교란 당했던 그 과거의 기억, 가슴 한 켠에 구겨 던져 버렸던 종이 뭉치를 다시 펴고 과거의 아픔을 정면으로 하나씩 응시하는 시간을 견디면서 A4용지 한두 장은 거뜬히 넘기는 이야기를 담아왔다. 그렇게 고통으로 뭉개졌던 시간은 가지런히 언어로 재배치되었다.

 

우리는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자극을 받았다. 각자의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읽어내고 눈물 흘리면서도 낭독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는 말은 밖으로 나오려하고 고통은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온몸이 귀가 되어 들어주었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같은 성폭력 피해자로 만났지만 그 안에서 차이는 존재했다. 저마다 상황의 특수함, 사건의 각별함, 실존의 절실함을 그래도 서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피해경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게 되는 것, 자신의 아픔으로 꽉 찼던 자아에 타인의 아픔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우리가 덤으로 얻은 고마운 선물이다. 우리 품은 넓어졌다. 자아가 확장되면 상대적으로 고통은 줄어들기 마련이니 일석이조다.

 

애초에 나는 내심 바랐다. 글쓰기 치유워크샵이 끝나고 나면 참가자도 나도 조금씩 달라져있기를.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재확인이 아니라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가고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했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나는 변했다. 끝내 몰랐으면 부끄러웠을 고통의 한 세계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고맙고 귀한 시간을 살았다. 참가자들도 변했다. 눈빛, 표정, 발걸음, 사용하는 단어 같은 것들. “힘들 때면 맥없이 자거나 TV보거나 폭식을 했는데 이제는 책을 본다며 시간을 보낼 또 다른 오락거리가 생겼노라 말하고 글쓰기가 조각이랑 비슷하다며 창작의 희열을 수줍게 터놓는다. “우리 힘들었지만 이겨내고 잘 살아왔다며 서로의 존재를 쓰다듬고 칭찬한다. 우리는 책과 사람, 그리고 글쓰기라는 이전에는 없던 친구가 생겨 있었다. 삶이 다소 견딜만해진 것이다. 인생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 없다면, 견디는 것도 삶의 좋은 방편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순도순의 힘으로 어제를 잘 살았듯이 우리는 오늘도, 살아갈 것이다.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꾸면서

 

2013. 10.은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