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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밤이 선생이다_과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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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막바지로 갈수록 여러분들 과제를 읽어보면 문장의 기술적인 부분은 손댈 것이 없어져요. 비문이나 반복구문이 없어서 잘 읽히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도 많이 생겨있고요. 자신만의 물음, 주제를 전달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요즘에는 글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겹으로 쌍으로 덤으로 번져나갑니다. 자기경험에서 출발하는 글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의 기억, 상실의 경험과 마주하게 됩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무엇, 눌러놓으면 다시 튀어 오르는 그것은, 대개가 고통의 감각이니까요. 행복은 삶에 스며서 대기로 휘발됩니다. 생의 불구성, 고통만 응어리로 남습니다. 단단하게 만져지는 종기 같은 무엇, 고통이 아니라면 어디서 사유의 계기를 얻을까요. 김조광수 씨가 어디선가 그런 얘길 하더군요. 나는 동성애자라서 남들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늘 고민해야했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요.

 

이 존재물음은 과연 사적인 영역일까요. 개인이 겪는 혼란과 위축은 대부분 당대의 사회적 제도와 척도와 도덕과의 충돌에서 발생합니다. 가족의 서사, 가난의 서사, 성애의 서사가 글쓰기 소재로 좋다 나쁘다 혹은 옳다 그르다 가치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영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형도도 이성복도 김수영도, 우리가 읽은 황정은도 가난과 가족은 지독한 영감을 주었죠. 글감의 원천이었습니다.

 

글 쓰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소재라기보다 관점이지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이 어떤 의미여야 하는가, 어떤 의미였으면 좋겠는가 하는 물음이 곧 글쓰기지요. 방향을 잡아주고 내용을 채워줍니다. 김조광수 씨의 정체성 고민, 그 엎치락뒤치락이 그의 정체성을 멋지게 형성해주었듯이, 우리의 물음과 시도와 시행착오와 숱한 미완의 글들이 서툰 글쓰기를 더 나은 글로 만들어 주리라 생각해요.

 

어디서도 쉬이 말하지 못했던 자기얘기를 집요하게 붙들고 쓰고 읽고 듣는 행위는 필요하고 소중합니다. 그건 삶의 순간순간을 명징하게 보는 기회니까요. 보는 것의 가치로움에 대해 황현산은 이렇게 말했죠.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192)

 

 

회피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볼 때 쓸 것이 있습니다. 테이블의 티스푼을 보고, 마당의 벌레를 보고, 장판에 들러붙은 밥풀을 보고, 엄마 손의 주름도 눈가의 피멍도 보고, 한 사람의 지루한 독백도 보고 남루한 욕망도 봅니다. 이미 세계--존재로 던져진 이상, 관계의 장에 놓인 존재에게 동정하고 존경받고 원망하고 변명하고 해석하고 해석당하고 오해하고 이해받는 일은 필연입니다. 삶의 불가피함입니다. 이 감정과 상황의 복잡계를 견디면서 깊이가 만들어지고 구멍도 생기겠지요. 그것을 언어로 채우는 게 쓰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까지가 내 속옷처럼 갈아입을 수 있고 감출 수 있는 사적인 나이고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공적인 나인가. (무재의 언어로 바깥사람과 안 사람?^^) 매번 바뀌고 유동하는 삶의 흐름을 감당하기. 그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글쓰기. 어쩌면 저는 삶에서 달아나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나에게서 달아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카, 가난

- 어떤 장애인이 자신이 장애에 대하여, 평생 같이 가는 친구라고 한 것을 본 것 같다. 난 가난과 친구가 되기 싫다. 그런데도 그 작자는 내 주위를 끈질기게 배회하고 있다. 이 놈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는 가족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악에 받혀 소리를 지르고 가슴 아파 눈물 흘리는데 거기서 묘한 생의 의지를 주는, 가난하게 산다는 것.

 

 

가난이 묘한 생의 의지를 준다는 것은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그냥 생각하면 풍족함이 생의 동력이 될 것 같은데 꼭 그렇지 않잖아요. 사랑도 서로의 좋은 모습만 보는 것보다 실수, 허점, 결핍까지 공유했을 때 완성되는 것처럼 삶도 가난이 채워주는 부분이 있죠. 물론 구카님 말대로 돈이 부패하면 행복 냄새가 난다도 맞습니다. 그게 냄새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돈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사건들이 있기도 하죠. 가난이 선이나 악 하나로 정의될 수 있다면 삶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지요. 가난에 대한 복잡다단한 마음, 겉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잘 써내려간 것이 좋습니다.

 

소리

- 나는 모든 명절과 모든 기념일들을 증오한다.

- 일산은 아무 죄도 없지만, 나는 일산에 있을 때 병든다고 느낀다.

- 내가 성인이 되어 대학 때문에 집을 나갈 때, 그들은 내게 말했다. 그래도 네겐 해줄 건 다 해줬다고. 그들은 그런 말을 하기위해 이 누덕누덕한 가정을 지켜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표정도, 어떤 감정도 없이 수고하셨다고, 고생 많았다고 말해주었다.

 

 

문장에 힘이 있네요. 동사, 형용사 선택이 고유해서 중간에 몇 번 놀랐어요. 한 달음에 읽히고요. 주어반복, 비문, 이중수식, 추상적 서술 거의 없어요. 퇴고를 많이 한 흔적, 한줄 한줄 공들여 쓴 것 같아요. 니체가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했는데. 피로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사는 것도 힘들었고, 더 이상 무력감으로 지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요. 덤덤히 살기엔 버거운 현실이고 무력감으로 지치기엔 아까운 현실이니까. 아무 일이거나, 아무 일이 아니거나. 어쨌든 내게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 인식에 이르기까지 쉽지 않은 뒤척임이 보여요. 흔들리면서도 직시하는 힘이 글의 긴장을 살려줍니다. 긴 글 쓰느라 애 썼어요.

 

 

 

에스디

- 내가 좋은 학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니 학벌이 꼭 필요하지는 않는 것 같다.

- 나는 공부도 내가 그냥 생각 한데로 공부하다 보니까 잘했고 특별하게 공부 잘 해야지, 좋은 그 촌놈은 세상을 빨리 읽고 기회를 얻으려고 무지 애썼겠고 누군가가 이끌어줄 만한 인연을 만나서 잘 배운 것 같다고 생각한다.

- 사실 지금도 목표가 없다. 학교 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공부를 한건 아니다. 버틴다는 생각으로 살면 되는 게 아닌가. 진짜 벼랑 끝이 아니면 좋게 좋게 사는 게 좋은 게 아닌가.

 

 

이 분의 삶이 드라마틱하고 흥미롭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펙으로 청춘을 보내고 지금은 벼랑 끝이 아니면 좋다고 말하는 중년이 된 한 남자의 말들이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고 힘이 있기도 하고 그럽니다. 일인칭 서술로 인터뷰 글을 작성해주셨어요. 독자를 위해서 나는 왜 이 사람을 왜 만나고 싶었는지, 언급해주셨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에 수줍은 듯 고백해 놓으신 두 줄의 이야기도 궁금하고요. 에스디님 덕분에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좋은 삶에 대해서, 타고난 재능의 불공평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저 슬슬 공부해도 전교 1등이 되는 실력은 부럽긴 하네요.^^

 

 

김현미

- 예년엔 전체 학년이 섞여서 했는데 이번엔 당 학년들만 모여서 했다. 조금은 서운했다. 저학년 고학년 섞여 함께 할 때는 서로 관람하며 학교 전체가 축제 같은 느낌이었는데 너무 개인주의적 상황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모님을 잇달아 보내시고 경황이 없으셨을 텐데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짧은 수필 같은 글, 현미샘의 목소리가 녹아있어요. 학예회를 따로 개최해서 아이들의 추억을 훔치고 개인주의를 야기하는 상황에 대한 통찰에는 공감이 갑니다. ‘청따리의 유래나 시편들. 엄마에게는 기약할 수 없는 꽃구경등의 이야기는 황현산 선생님의 글처럼 조용한 힘이 있어요. 조금 더 길게 깊게 이야기를 끌고 가시면 좋은 글 나올 것 같아 단편의 글이 살짝 아쉽기도 합니다.

 

 

 

맑음, 도시

- 아이의 초등학교엔 구멍이 살고 있다. 어른이 되지 못한 엄마들의 구멍은 교내의 웅성거림을 만들어냈다. 구멍투성이 엄마들.

- 냉소와 진심 사이, 그 어디쯤을 산다면 나는 다치지 않는 걸까. 나를 안다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상처를 확인하는 일인 걸까.

 

 

구멍들이 내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네요. 맑음님은 많은 정보와 구체적 묘사 없이도 상황에 긴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으세요. 생일에 맞추어 간 떠난 분에 대한 얘기는 생의 얄궂은 운명을 생각게도 하고요. ‘폭력이 무용담이 되고, 탐욕이 선을 낳기도 하는 이곳의 혼란 속에서 조금 영악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시선이기에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일상에서 두서없이 펼쳐지는 사건, 욕망, 인물에 대한 관찰을 섬세하게 해서 조금 늘여서 써보면 엄마들의 성장소설이 되겠어요. 맑음님이 수업시간에 흙 묻은 한살림 야채 싫다고 할 때 이상같았어요. 고유한 시선으로 좋은 글 써보세요. ^^

 

 

 

 

맑음, 인터뷰

-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도 날씨가 따뜻하다며 웃어 보인다. 미소 안으로 까맣게 삭아버린 치아, 검게 부푼 손톱, 여기저기 뭉친 머리카락과 퀴퀴한 냄새로 자신을 증명하는 이씨는 노숙자이다.

- 자신의 친구들이 하나 둘 이유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은 가장 무섭고도 슬픈 일이다.

- 그의 노숙은 길에서 노제를 지내는 행위이다. 전생에 죄가 많아 이 일을 한다는 이씨는,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날 때마다 절을 하듯 두 손을 모으고 굽신거렸다.

 

 

노숙인에 대한 정갈한 묘사, 노숙을 노제로 풀어낸 해석이 좋습니다. 근데 맑음님이 왜 노숙인 인터뷰 하시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대부분은 글을 읽으면 이 필자가 어떤 주제에 천착하고 있구나가 느껴지게 마련인데 그런 부분이 조금 덜 드러났어요. 그래서 노숙인, 산 사람보다 도시 미관이 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지적도 관성적인 언급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글 전체에 흐르는 세련된 정서는 돋보입니다. 내용에 조금 더 깊이를 만들어주면 멋진 인터뷰 되겠어요.

 

 

 

버스차장, 세결여 인터뷰

- 10년 넘게 몰려다니던 동갑내기 6명 중 그녀만 결혼했다. 것도 3번씩이나. 부익부 빈익빈 원칙은 살벌하게 살아있었다.

- 1, 2, 3번 중에서 3번이 제일 나아 매번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지. 좋은 점? 글쎄 주변에 친한 친구나 후배들이 결혼에 뭔가 고민을 하면 나는 실제로 갖가지 케이스를 겪어봤기 때문에 다 각각에 맞는 조언을 해준다는 거? 하하"

- 그때도 내가 돈 벌어서 학자금 다 냈지, 동생 용돈 줬지. 엄마 아빠 용돈도 드리면서 지냈는걸 뭐. 얘는 다 알아서 하겠구나 생각하셔. 결혼도 내가 재밌어서 내가 좋아서 하는 거고 맘에 안 들면 내가 그만 두는 거고. 어쨌거나 난 항상 행복한 상태라는 걸 엄마 아빠는 알고 있지.

 

 

세 번 결혼한 여자. 비결은 자원이 풍부한 자립적 주체에 있었군요. 어찌됐든 부럽습니다. 스말러님이 간결하게 맛깔나게 핵심적인 질문을 묻고 답하고 정리를 잘 해주셨어요. ‘내 몫을 빼앗긴 것 같은 정체모를 억울함으로 접근하는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태도라던가, ‘10억 짜리 그림이 벽에 무심히 걸려 있다는 것에서 가본적도 없는 백화점 VIP룸이 연상되는 곳이라고 한 것은 우리도 가본 적 없는 그녀의 직장을 보고 있고 매력 충만한 그녀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주네요. ‘이번에는 3번이 꼭 잡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는 마무리에서는 친구에 대한 애정도 느껴져요. 그런데 그녀는 3번 결혼을 통해서 어떤 자기반성이나 자기 한계도 경험했을 거 같아요. 그 점까지, 빛과 어둠을 고루 드러냈으면 더 좋았겠습니다.

 

 

 

버스 차장, 하프이탈리안 인터뷰

- 월급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니 합류를 만류했지만 꼭 그의 성공을 보고 싶었고, 돕고 싶었다. 굶더라도 정의로운 편에 서겠다며 치기어린 마음으로 합류했다. 집이나 친구들에게서 오는 메시지를 하루 지나 확인하는 일이 허다했고, 오늘 출근해서 내일 퇴근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출장 마일리지가 쌓이면 그 마일리지로 또 출장을 갔다.

- 이태리 거래처들은 그를 ‘half Italian’이라고 부른다. 기타를 치며 즉석에서 부를 수 있는 칸소네와 샹송이 약 20여곡이 넘는다.

-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이곳은 삶의 제2의 터전이기 때문에 행복과 직결되는 문제지” “정치는 말야,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지.”

 

 

두 페이지의 진술로 그분의 50여 년 삶이 엿보입니다. 신기하죠. 입체적으로 한 사람이 조명되네요. 일벌레 이미지, 낭만파 기타리스트이자 로맨티스트, 자생적 댓글부대, 정치적 시민. 한사람을 풍부하게 살려줬어요. 잘 알면 더 쓰기 힘든데, 정보가 적절히 공개되면서 재미와 실감을 주네요. 다만 정치에 대한 얘기가 중언부언 늘어지는 게 아쉽고요. ‘함께 아름다운 문화국가에 다가가기를같이 바라게 돼요. 스말러님이 정 많고 사람 좋아해서 인터뷰 글쓰기에 어울리네요. 친절하게 재밌게 들려주시는 사람 얘기에 매료됩니다.

 

 

 

구카, 인터뷰

- 나는 김밥 천국 아줌마처럼 자리에 앉아서 종일 김밥을 마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보기보다 일이 많아서, 주문도 받고 주방에도 갔다가 김밥도 말다가 배달도 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지글지글 끓는 뚝배기 불고기며 김치찌개를 네다섯 개 얹고, 손에는 철가방을 들고, 추우나 더우나 종종 걸음으로 음식을 날랐다. 얼마나 많은 굴곡을 겪었을까. 감히 묻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

- 그치만 간병은, 환자를 돌보는 거는, 노동하고는 쪼끔 틀려...그니까 험한 일을 많이 해본 나로서는 거 쉽게 할 수 있지. 그니까 믿음 생활...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면 좀 낫지"

- 엄마의 삶에 편파적으로 영향을 더 주고받아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이란 결국, '엄마의 희생으로 유지되었다'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차마 묻지 못한 말들을 우리는 다 들은 것 같기도 해요. 마지막 결론. ‘가족이든 집단이든 가지게 되는 그 고통이, 모든 구성원에게 똑같이 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더 고통 받는 사람이 있음으로써,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 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는 마무리가 그래요. 엄마의 일들에 대한 묘사가 실감나서 같이 뚝배기 배달하고 김밥 말고 고된 일을 마친 것만 같아요. 엄마가 노동에 임하는 자세, 내용 잘 드러났습니다. 잘 썼고요. 인터뷰이의 말을 조금 날렵하게 다듬어주면 더 글이 살겠어요. 구카님의 결론이 황현산 선생님 책의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체면을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 사람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체면에 손상되는 일을 누군가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내내 어머니와 아내들이 그 천역을 감쪽같이 감당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195)”

 

 

 

무재, 컵과 자아

- "더 큰 사유"는 다른 사람들의 사유고, 집단의 사유고, 사회적인 사유에요. 제주도에만 살다가 서울에 오면 제주도에서는 할 수 없었던 생각을 하게 되죠. 제주도와 서울은 다른 공간이에요. "질적으로" 다른 공간이에요. "질적으로 비약된" 다른 공간이에요.

- b에서는 a가 필연적으로 생긴다. ab의 의견, 주장, 기준, 도덕, 욕망, 지식, 관점, 정서, 기호, 영감, 아이디어.

 

 

컵과 내용물로 존재와 사유를 설명한 이번 글은 마르크스가 말한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네요. 재밌게 읽었어요. 한 사람의 지성, 감각, 도덕, 욕망이 형성되는 구조를 도식으로 파헤치려는 시도, 그 집요함이 나는 좋아요. 집단의 욕망 집단의 압력 집단의 사유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강제하는 부분까지요. 이제야 내면(안사람)과 나를 보는 나(바깥사람)’이란 용어도 익숙해집니다. 개념과 용어를 정의내리고 논리를 전개하는 무재 스피노자 같아요.

 

 

 

무재, 공공연한 중얼거림

- 나는 글을 쓰다가 자꾸 멈추게 하는 심리적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떤 판단과, 동정에서도 냉소에서도 물러나있고 싶다.

- 달리기를 할 때면 내 승부욕과 몸을 풀가동하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 무언가 잘못되면 그 자리에 멈춰서서 감정과 행동의 순서도를 분석하느라 질질끄는 내 패턴이 무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실패의 상황에서도 순식간에 단단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순간을 사는 느낌, 긴장 놓을 틈 없는 빽빽한 시간은 내 어떤 감각도 낭비시키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곳에 있게 했다. 고통을 주면서 늘 고통을 회피하는 나를 나에게로 돌려보냈다.

- 망상적인 거짓 자아.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모른다.

- 자꾸 NG나는 청춘 드라마보단 천박한 연기를 천박하게 하고 싶었달까. 가학적인 블랙코미디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아하지 않으면서 연인 관계로 있는것은 무언가를 팔고 있는 느낌이었다. 관계 유지를 위해서 자꾸 무언가를 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청춘의 봇물 터진 언어. 무재가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생각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이 글을 읽고. 그러니까 산문처럼 쓰인 무재의 글을 읽고요. 내용 전개의 탄력과 긴장과 언어 선택이 힘이 넘쳐요. 자기와 세상의 벽을 인식하고 부딪치기는 두려워하는, 나와 보이는 나의 분열을 주시하는 예민한 주체가 그려집니다. 문장과 인식에 대한 훈련은 계속 해나가면 될 것이고, 사안을 날카롭게 보는 능력, 문제의식 기르는 훈련만 잘 하면 작가든 기자든 될 수 있어요. 기자들이 글 쓰는 능력은 엇비슷해요. 문장력은 6개월 지나면 똑같아져요. 같은 사건에서 어떤 관점으로 취재하고 글을 풀어내고, 기획기사를 제안하는가. 이 힘은 어디서 길러질까요. 무재의 지칠 줄 모르는 자아탐구가 곧 세계탐구생활과 연동하는 그 아름다운 전환이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