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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세상

당산역, 삶이 흘러가는 길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들은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셔야겠지만,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승객들은 모두 전철을 타야하고, 전철엔 이미 탈 자리가 없다. 타지 않으면, 늦는다. 신체의 안전선은 이곳이지만, 삶의 안전선은 전철 속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곳을 택하겠는가.’

박민규의 단편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카스테라, 문학동네)의 일부이다. 이 소설은 지하철에서 푸시맨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등학생의 눈으로 IMF무렵 고단한 한국 사회를 그렸다. 요즘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푸시맨은 출퇴근 시간마다 ‘지옥철’로 비유되는 열차에 승객을 태우는 일을 맡았다. 제한된 자리에 필사적으로 끼어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리는 삶. 떠밀리고 부대끼며 흘러가는 사람들. 작가는 세상을 하나의 열차로 보았던 것이다.


서울메트로 2호선 당산역. 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한 이곳에서도 첫차 5:35분부터 막차 24:55분까지 삶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이른 아침이면 김포, 일산, 목동 등지에서 흘러온 직장인들이 무가지를 보며 열차를 기다린다. 2~3분에 한 대씩 들어오는 열차에 가까스로 발을 담그고 인근 여의도로 시청으로 강남방향으로 흩어진다. 넥타이와 하이힐 부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곧이어 이어폰 꽂은 학생들이 두 세 계단씩 성큼성큼 뛰어 오른다. 가까이에 홍대, 신촌, 이대, 서울대 등 주요대학이 포진해있어 당산역은 학생 이용객이 많다.

오전10시. 뜨겁게 달궈진 선로가 잠시 숨을 고른다. 역사도 헐거워지고 이용객들의 호흡도 느릿하다. 도시를 완보하는 산책자들이 여기저기 섬처럼 떠 있다. 표정도 나이도 목적지도 제각각이다. 멋쟁이 선글라스를 낀 조성자 씨(62)는 개통했을 때부터 드나든 당산역 25년 지기다. “집이 강서구청 쪽이에요. 을지로, 광화문, 종로 등 시내 나갈 때랑 결혼식 갈 때 자주 이용해요. 환승이 잘 돼 있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죠. 찾기도 쉽고. 요즘 새로 생기는 역은 구조가 복잡해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데 여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아요.” 류지혁 씨(17)는 기타를 메고 열차에서 내려 좌우를 두리번거린다. “그냥 가끔 지나간다”는 그에게 당산역은 낯선 공간일 터. 그는 소금쟁이처럼 가볍게 세상위에 떠서 흘러갔다.

당산역은 1984년 5월 22일 2호선의 완전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했다. 2009년 7월 24일 9호선이 개통되면서 환승역이 되었다. 천경례(51)역장은 “하루 이용객이 환승 포함 10여 만 명으로 서울메트로 1234호선 119개 역 중 30위 안에 드는 규모”라고 소개했다. 총 17명의 직원이 3조 2교대로 당산역의 살림을 맡는다. 역무원 김학노(42)씨는 게이트 근무 중이다.

“새벽 5시 35분 첫차에서 근처 인력시장 가는 분들이 많이 내려요. 몇 분은 금방 돌아와서 분풀이 하듯이 차비 없다고 하죠. 일감을 못 얻은 분들인 거죠. 어떤 승객은 차비가 없대놓고 한 시간 후 쇼핑백 한가득 사들고 오기도 하고....표정만 봐도 진짜 돈이 없는지 진실을 알죠. 사람들은 다른 거 같아도 다 비슷비슷해요.” 원칙적으로 무임승차는 금지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 인정을 무시할 순 없다고 안경너머 그의 눈동자는 말한다.

9호선 환승통로에서 액세서리 상점을 운영하는 한명희 씨(43). 주요 고객이 여성들이라고 했다. 대부분 열차를 기다리거나 환승하는 길에 들러 느긋하게 물건을 고르지 못한다. ‘눈요기’만 하고 가버리기 일쑤다. 매출이 쑥쑥 오르는 건 아니지만 환경도 쾌적하고 견딜 만하다고. 정작 고충은 다른 데 있다.

“길을 정말 많이 물어봐요. 근데 10명 중 3명만 고맙다고 말하고 그냥 휙 가버려요. 출구도 아니고 무슨 동이 어디냐고 물으면 저도 모르잖아요. 잘못 가르쳐줬다고 찾아와서 화내는 분도 있어요. 여기서 일하면서 그것도 모르냐고요.”


울고 웃고 토라지고 화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날이면 또 마주한다. 피할 수 없어서 삶이다. 지하철에서 승객과 역무원, 상인, 환경미화원 등이 만들어가는 ‘일일연속극’은 통속적이다. 그렇기에 각박한가 싶으면 또 넉넉한 인심이 우물처럼 숨어 있다. 당산역에 비치된 ‘사랑의 쌀독’도 그중 하나다. 지역주민들과 단체에서 쌀을 기부하면 어려운 이웃을 선별해 2kg씩 나눠준다. 작년부터 실시하는 연중 나눔 행사인데 늘 쌀독이 그득하다. 설날엔 제기차기, 봄이면 봄꽃 축제가 열린다. 당산역 출구에 연육교를 잇대어 한강에서 윤중로까지 벚꽃구경 가는 편한 통로를 열어두었다.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지나가고 흘러가는 곳이지만 900원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은근히 쏠쏠하다.”고 천경례 역장은 귀띔했다.

당산역은 승강장이 합정역 방향으로 당산철교와 통하는 지상의 고가 역사다. 열차가 당산철교를 지날 때면 강은 넓어지고 산이 다가오고 하늘이 탁 트인다. 풍광이 사계절 아름답다. 해를 머금은 한강의 일출과 일몰이 매일 펼쳐진다. 비라도 내리는 날, 승강장의 슬레이트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운치를 더한다. 사방에 어둠이 두껍게 칠해지면 열차는 ‘은하철도999’로 변신한다. 물빛과 불빛이 아련히 흔들리는 판타지의 세계로 잠시나마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막차가 운행되는 24시 55분. 구두 뒤축이 비스듬히 닳아버린 아버지들이 의자 곳곳에 스러져있다. 그들을 살살 달래서 삶의 안전지대에 보내고서야 당산역도 곤히 잠이 든다. 새벽 5시 35분, “띠리리리리~” 새날의 시동을 거는 첫 신호음이 울릴 때까지.

* <야곱의 우물>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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