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초문. 철학자 자크 데리다(사진)가 1983년 파리에 연구교육의 어소시에이션 <국제철학콜레주>를 창설했다고 한다. 문턱없는 밥상이 아니라 교문없는 철학대학이다. 그것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오늘 수유너머N에서 봤다. 니시야마 유지(Yuji Nisiyama)라는 일본 감독이 만들다. 그가 직접 와서 상영회 후 토론회도 가졌다. 이렇게 좋은 영화인줄 알았으면 미리 홍보해서 여럿이 같이 볼 걸 후회했다.
<국제철학콜레주>는 국가적인 교육기관 인가를 받은 곳이 아니다. 하나의 비영리 시민단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조건적이고 무제한적인 학술활동이 일어난다. 철학과 철학, 철학과 경제, 철학과 예술 등등. 본거지는 파리5구영의 데키르트 거리에 있지만 고유한 시설은 없고 공간을 빌려 운영되고 있다. 이것이 장점이다. 정해진 곳이 없으니 어디든 철학교육이 일어난다. 예술가 노동자 누구든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저녁에 수업이 2-3강좌 열리면 영화처럼 선택해서 듣는다. 5명도 듣고 200명도 듣는다. (우리나라 '수유+너머' 와 비슷하지만 결정적으로 수유너머는 국가보조를 안 받고 콜레주는 받는 차이가 있다.) 또한 파리의 대학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대학 전 세계 여러곳에 기생해 강의를 다니며 철학의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고 있다.
영화는 콜레주에서 강의 및 세미나를 진행하는 디렉터들 인터뷰로 구성됐다. 논리정연하고 막힘없다. 옛날에 하품 쩍쩍해가며 보던 프랑스 영화처럼 사람 얼굴 크게 잡히고 계속 말하는 장면만 나온다. 근데 재밌다. 솔깃하다. 설득된다. 철학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 이 중단될 수 없는 물음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 바로 <국제철학콜레주>다. 콜레주를 만든 데리다는 "철학을 위해서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실천했다고 평가된다. 데리다가 만들었지만 데리다주의자들의 집합소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적대적인 세력들도 모이게 하는 것이 데리다의 목표이자 바람이었다고 한다. 철학책을 영상으로 읽는 것처럼 밑줄 긋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한마디는 이것. "철학은 활동이다."
다른 나라도 우리와 대학의 상황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돈과 자본이 지배하는 전지구적 시장경제 속에서 대학이 기업화 되고 있다고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철학적 사유를 지속한다는 것,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의 가치를 물음으로써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갖는 '저항적 의미'를 영화는 섬세하게 드러냈다. <철학에의 권리> 핵심 키워드였는 데리다가 말한 '제도적인 것의 해체(탈구축)'이다. 이진경 선생님은 토론자로 나와서 우리(수유너머)도 자본주의나 국가로 회수될 수 없는 외부를 창안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며, 영화 엔딩크레딧으로 이 영화를 상영한 곳이 올라가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런 활동 어때?라고 제안하는 영화. 대학의 외부를 촉발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네요."
<철학에의 권리>는 작년 9월부터 미국, 일본, 프랑스, 홍콩에서 순회 상영을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35회 상영되어 2500명 정도가 보았다고 한다. 내일은 연세대 학술정보관 620호에서 2시부터 상영한다.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비제도로서 제도를 밀고나가는 힘(정정훈)을 감지하는 순간 잔잔한 감동이 밀려온다. 좋은 작품은 언제나 우리의 신념체계와 상식을 건드린다.
자막은 한국말이지만, 감독은 일본인인데 영화가 불어다. 인터뷰도 불어로 진행된다. 감독이 프랑스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서 그렇단다. 불어는 철학이랑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언어다. 아니, 사색하는 언어는 다 아름답다.
감독니시야마 유지(사진) 1971년 에히메현(愛媛県) 출생. 파리 제10대학 철학과 유학. 히또츠바시(一橋)대학 언어사회연구과 박사과정 수료. 동경대학 특임강사(글로벌COE「공생을 위한 국제 철학 연구센터(UTCP)」 ) 를 거쳐, 현재 수도대학동경(首都大学東京) 준교수.
저서『쟁의로서의 문학―모리스 블랑쇼의 고독, 우애, 공동성』(御茶の水書房), 편저『철학과 대학』(未來社)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자크 데리다『조건없는 대학』(月曜社), 『이름에 관하여』(未來社), 엠마누엘 레비나스『윤리와 무한』(筑摩書房), 꺄뜨린 말라부『헤겔의 미』(未來社)등이 있다.
* 국제철학콜레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0월 13일 발행 위클리수유너머 36호에서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