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머릿속에는 사람이 산다. 들판에서 연을 날리며 뛰노는 코흘리개부터 호텔의 연회장을 향하는 기업 총수까지. 그리고 그들을 향한 오랜 관찰과 성찰은 삶 속에 응축되어 예술의 힘으로 폭발하곤 한다. 건축계의 거장 류춘수, 그가 밝히는 성공의 비결은 ‘사람과 공간을 향한 몰입’이다.
건축, 과학과 예술의 조화
온 세계가 월드컵의 열기로 달아오를 때마다 그의 이름이 회자되곤 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전이 치러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의 설계자 류춘수다. 하지만 월드컵 이전부터 그는 이름난 건축가였다. 1992년에는 배우 안성기보다 먼저 커피 광고모델로 TV에 출연해 부드러운 남자의 면모를 선보였다. 중국 해남시 868타워 국제 현상설계에 당선된 건축가라는 타이틀과 ‘잊지 못할 순간’이라는 자막이 흘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도 그의 손을 거쳤다. 대한민국의 잊지 못할 순간이 그의 삶의 궤적과 일치하는 셈이다. 2000년에 영국에서 만난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과 올림픽에 사용된 구조물을 모두 설계해 본 사람은 지구상에 당신밖에 없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영광이죠. 건축은 미리 정해진 것도 더 쉬운 것도 없습니다. 호숫가의 갤러리는 정적으로 표현하고, 스포츠 경기장은 역동적으로 해야 하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조건, 상황, 환경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건축은 예술과 달라요. 화가는 상상하는 대로 기상천외한 것도 표현할 수 있지만 건축가는 고려해야할 컨텍스트(context)가 무척 많지요. 과학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작업이 건축입니다.”
건축가는 멋진 직업처럼 보이지만 힘든 일이다. 월드컵경기장을 예로 들어 보자. 창호지를 타고 들어오는 햇살의 이미지, 한강 위에 떠있는 돛단배 느낌 등 한국적 조형미 이면에는 치밀한 공간 구성이 계획됐다. 선수, 감독, 관중 모두 동선이 다르다. 선수가 들고 나고, 일반 관객이 화장실 가고 밥 사먹고 지하철 타러 가는 것 등 모든 움직임을 통제해야 한다. FIFA의 경기장 건축 규정에 따라 지붕은 반드시 열려야 한다. 지붕은 관중석의 60% 이상, 기자석과 VIP석의 100%를 덮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또 쇼핑몰, 사우나, 영화관 등의 부대시설은 고작 한 달 남짓에 끝나는 월드컵경기 이후의 수익구조를 고려한 실용적 설계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방대한 설계 과정 끝에 아름다운 건축물을 탄생시키는 고난도의 작업, 류춘수는 그것을 해낸다. 특별한 비법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사람에 대한 치밀한 배려다.” 건물주, 일하는 사람, 드나드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 등의 입장에서 입체적으로 사고할 뿐이다.
"일을 중심에 놓고 판단했다"
류춘수는 동양적 감수성과 서구적 합리성을 두루 갖춘 세계적인 건축가로 통한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들로 산으로 뛰어놀던 유년기부터 대학에 두 번 실패하고 절에 들어가 생활한 경험까지, 그가 살아온 날들과 지나온 산천은 전부 삶에 자양분이 되었다. 특히 절에서의 생활은 가장 고통스럽고 값진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마음공부를 많이 했고 계절 따라 변하는 풍광을 보면서 자연친화적인 건축의 안목을 길렀기 때문이다. 1974년부터 1986년까지 故김수근의 ‘공간’에서 혹독한 도제과정을 거친 후 그는 ‘이공건축’을 설립해 독립했다. 서울 경복궁 역사, 리츠칼튼 호텔, 한계령 휴게소 등 폭넓은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명성을 쌓아갔다. 그는 한 번도 최고가 되고자 애쓴 적은 없다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는데 월급이 만 원이었어요. 은행이나 대기업은 3만 원 받을 때였죠. 하지만 꿈에도, 꿈에도 이직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김수근 선생님을 찾아 ‘공간’에 갈 때는 3분의 1이나 월급이 깎였지요. 통금시간까지 일하느라 아르바이트도 못하고 월급은 줄었지만 배운다는 일념으로 일했습니다. 자기 일터에 뿌리내리는 게 중요해요.”
삼십대에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는 건축설계사 시험을 치러 전국 2등으로 합격했다. 만 명이 응시해 17명이 붙었다. 모 대기업에서는 집과 차를 주고 사무실을 내준다며 손짓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세 가지 이유다. 첫째 나이와 경륜 능력이 부족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둘째, 김수근선생님에게 제자로서 배울 것이 아직 많았다. 셋째 독립하면 내 뜻대로 자유롭게 작업해야 하는데 대기업에 종속된다면 그것은 건축가의 길이 아니다. 즉, 실패냐 성공이냐를 떠나서 초지일관 ‘일’을 중심에 놓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창작은 곧 깨달음’이라며 붓펜을 꺼내 한자를 써내려갔다.
“스님들이 도를 닦을 때 계향(戒香), 정향(定香), 해향(解香)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릅니다. 계향은 정보와 지식을 취합해서 공부하는 것이죠. 그 다음 정향과 해향이 성찰단계입니다. 이를 거치지 않고 해향으로 바로 가는 것이 카피(copy)입니다. 남의 것을 그대로 내놓는 것이죠. 설계에서도 정(定)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적당히 도면과 자료를 버무려서 내놓는 것은 안 될 일이죠. 적어도 카피는 안 하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고민하다보면 “어느 날” 폭발하듯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상암월드컵경기장도 그랬다. 처음엔 평범한 둥근모양의 경기장으로 설계했다. 그즈음 우연히 기내지에서 방패연을 보았다. 순간 전율했다. 이전의 설계를 백지화하고 방패연을 직사각형 모양의 축구경기장 이미지로 연결시켰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월드컵경기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마 외국에서 공부했으면 방패연을 봐도 별 느낌이 없었을 것이라는 그. 류춘수를 키운 8할이 무엇인가 묻자 사람 좋은 미소로 답한다. “당연히 대한민국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