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된다는 것. 구성진 트롯 가락으로 접하고서야 고개를 주억거린다. ‘서울이 좋아요’가 ‘강남만 좋아요’가 됐다는 것. 발랄한 포스터를 보고서야 무릎을 친다. 비통하거나 혹은 통쾌하거나.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삶의 비의(悲意)를 누설하는 예술가 덕분에 우리는 삶을 감각한다.
서울시정 홍보포스터로 도배가 된 거리에 웃음의 숨통을 반짝 틔워준 주인공은 젊은 예술가집단이다. 서울대 미대 선후배로 구성된 디자인 창작그룹 에프에프(ff). 지금은 동문의 벽을 넘어 5~10명이 활동한다. 이들은 지난 4월 ‘불법 서울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시의 상징인 해치 가면을 쓰고 직접행동에 나선다 하여 일명 ‘해치맨프로젝트’로도 불린다. 노란가면을 벗은 장우석(29), 민성훈(26), 최보연(25)씨를 홍대 앞에서 만났다.
“서울디자인을 주제로 2007년부터 다큐작업을 진행했어요. 노점상, 시민, 학생들, 교수, 공무원 등등 여러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했는데 전문가나 학생이나 내용이 다 비슷비슷했어요. 쉽게 비판하는 내용들 있잖아요. 소통이 없다. 상명하달식이다. 전시행정이다 등등. 어느 순간 서울시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듣는 게 소모적이란 생각이 들었죠. 이건 더 이상 다큐가 아니다. 디자인을 공부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목소리를 내자. 그래서 캠페인이 시작됐습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민성훈씨. 그는 동료들과 이야기하면서 구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디자이너 이지별씨의 ‘버블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뉴욕 시내의 수많은 광고 포스터에 말풍선 모양 스티커를 붙이고 누구나 그 위에 원하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한 이 프로젝트는 이지별씨의 아이디어로 뉴욕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해치맨에 의해 서울에서도 시도된 것.
“디자인서울의 핵심은 시민참여다”
‘디자인 서울, 그저 웃지요’ ‘겉모습이 가장 중요한 도시, 서울에 잘 오셨습니다’ ‘서울이 좋은지는 우리가 판단할게요’ ‘와! 서울이 서울랜드가 되었어요!’ ‘그냥 좀 내비둬라. 노점상이고 달동네고 동대문운동장이고’ ‘한강에 나무 좀 그만 뽑으세요, 그늘이 하나도 없어요’ ‘디자인하느라 애들은 굶어요’ ‘서울은 365일 공사중’ ‘서울사람은 고향이 없어요, 디자인됐으니까요’
재치가 만발한다. 그들이 개설한 홈페이지 ‘아이라이크서울’에는 보석 같은 의견이 쏟아졌다. 트위터와 미투데이를 포함해 360여 건의 의견이 접수됐다. 해치맨은 지하철역사, 가판대 등 대형 서울시 홍보물이 부착된 곳 400여 군데를 출몰하며 스티커를 부착했다. 천편일률적인 서울시의 홍보물에 생생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것이다.
예상대로다. 서울시 디자인본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해치맨을 추적했다. 면담을 하자며 ‘배후’를 캐물었다. 민성훈 씨에게는 소환장이 날아왔다. 2시간이 넘는 조사에서 경찰은 공공 홍보물 훼손은 징역 7년, 벌금 2천만 원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라고 을렀다. “의도적으로 경찰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 외국계 사이트(구글)에 홈페이지를 만들었냐”며 관련 내용을 추궁했다. 그는 홈페이지에 소환장을 든 해치맨 사진을 올렸다. 트위터를 타고 비난의 목소리가 퍼져갔다.
‘RT @ecri11: RT 남아도는 건 행정력, 부족한 건 마음씀씀이, 아예 없는 건 두뇌 @Chungwoo_LEE: 서울시디자인총괄본부는 참으로 속이 좁구나. 젊은이들 신상 정보 파악해서 경찰에 신고나 하고. 서울시의 디자인 사업, 이런 식으로 어디 잘 되나 한번 봅시다.
다행히 경찰조사를 받은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고소는 하루 만에 취하됐다. 그런데 해치맨프로젝트의 취지가 잘못 부각된 측면이 있다고 민성훈 씨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시 ‘비판’보다 시민 ‘참여’에 의미가 있어요. 2010년 서울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마당을 마련했고. 그것이 비판이든 칭찬이든, 시민들은 내가 제안한 것이 반영됐다는 기쁨을 느꼈죠.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로 의견을 내도록해서 접근성이 좋았고 또 시당국의 검열의 한계가 없으니까 내용면에서도 신선했죠.”
소셜미디어 구축 과정에서 ff팀 펭도 씨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한다. 그렇게 기술과 열정이 더해진 해치맨프로젝트는 디자인 담론을 촉발시켰다. 디자인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느냐’고.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신바람이 절로 났다. 작업에 탄력을 받은 해치맨은 머리를 맞댔다. ‘스티커 붙이기 다음 단계로 어떤 작업을 하면 좋을꼬.’
청소 그래피티 ‘서울시 약 올리기 대작전’
시즌2는 청소그래피티! 서울 서소문 서울시청 별관 앞 인도에 낙서를 했다. ‘겉모습이 가장 중요한 도시 서울에 잘 오셨습니다’. 대학로 KFC앞 노면에는 ‘서울의 진보 인간성의 퇴보’라는 문구를 새겼다. 청테이프로 글자를 만들어 인도에 눌어붙은 먼지를 청소용 솔로 닦아 글씨 모양을 만든 것이다. 장우석 씨는 만면에 악동 같은 웃음을 띠고 ‘작업 의의’를 설명했다.
“저희 그래피티는 법적으로 제재할 수가 없어요. 칠하는 게 아니라 청소하는 거니까요. 청소나 스프레이나 미학적 관점에서 새겨지는 행위는 같거든요. 그게 이 작업이 주는 재미에요. 유도한 대로 서울시에서 글자를 지우기 위해 청소해서 깨끗해져도 재밌고 그냥 놔두면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지저분해도 재밌고요.”
민성훈 씨도 “서울시를 약 올린 것”이라며 맞장구를 친다. “서울시에서 저희 연락처를 갖고 있잖아요. 뻔히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서울시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했죠. 사실 6시간 동안 닦다보면 화가 나요. 베이비파우더 뿌려 넣으면 한 시간이면 작업하고 사진 찍을 수 있는데…….그래도 이 작업이 효과가 크니까 했죠. ‘청소했는데도 막는 당국이다’란 걸 홍보할 수 있으니까.”
청소그래피티는 서울대입구역, 시청 청사, 강남역, 대학로 등에서 진행됐다. 작업 소요시간은 6시간. 소요물품은 청테이프 6개와 솔, 그리고 물이 전부다. 작업은 자정 이후 행인이 없을 때 이뤄졌다. 한번은 만취객이 “기특하다”며 먹을 것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 취객이 말을 걸면 “저희는 학생이고 배고프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그 후론 ‘사랑의 간식’은 제공되지 않았다고.
“열심히 하라고만 하시고 전부 그냥 가더라고요.(웃음) 청소그래피티가 새기고 나면 되게 뿌듯해요. 작업 중엔 캄캄해서 잘 안 보이거든요. 해가 뜰 무렵 물이 마르고 글씨가 드러나면, 와! 거리에 남긴 훈장 같아요.”
둔감함을 민감함으로 이행하는 서울디자인
독일의 사회학자 짐멜Georg Simmel은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현상은 “둔감함과 속내 감추기”라고 말했다. 둔감함은 타인의 곤경이나 사물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공허하게 받아들이는 정서적 양식이다. 서울디자인을 명목으로 노점상 청소가 일어나도 ‘그러려니’ 하는 반응에서 보듯 무관심이 길어지면 무기력이 된다. 도시거주자의 무감각함은 어떻게 감각함으로 이행할 수 있을까. 최보연 씨는 ‘그래피티’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시민들이 서울시 정책의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무뎌졌죠. 모든 걸 보지만 보고 있지 않던 시점에서 자극을 준 거 같아요. ‘정말로 봐주세요.’ 라는 메시지가 전달된 셈이죠. 저희 캠페인의 의의는 문제제기가 아니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터닝포인트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해요. 논의들이 활발하게 오가고 메타담론들이 일어났으니까요.”
개발과 소음의 분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해치맨은 ‘청소 그래피티’로 선명히 드러냈다. 그러자 그들의 바람대로, 시민들은 보기 시작했다. 디자인 전공할까 고민하던 참에 캠페인을 보고 디자인 공부를 결심했다는 여고생의 팬레터가 답지하고 다른 대학 디자인과 친구들이 사회적 고민을 공유하자며 손을 내민다. 소통의 물꼬를 튼 셈이다. 하지만 “같이 고민을 듣고 얘기를 나눌 뿐 해치맨이 앞장서서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해치맨의 서울 사랑은 수박이다. 겉은 푸르지만 안은 새빨갛다. 도시는 살기도 힘들지만 떠나기도 힘든 곳이라는 브레히트의 말대로 까만 씨 같은 애증이 점점이 박혀있다. 서울토박이 민성훈 씨는 “서울이 불편하지만 바꿔나갈 여지가 많다.”며 “캠페인이 좌절했으면 이런 변화도 수용 못하는 도시라는 점에서 실망스러웠을 텐데 가능성이 큰 도시”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장우석씨와 최보연씨는 대학에 들어오면서 서울에 살았다. ‘묵은 정’은 없지만 ‘깊은 정’이 있음을 고백한다.
“외국에서 친구가 왔을 때 서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삼성동에 갔어요. 국제회의가 열리는 고층빌딩과 천년사찰 봉은사가 공존하는 다이내믹함이 서울의 매력이죠.”(최보연)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 어디라도 자는 곳이 내 집인데, 향수병을 앓아요. 서울이 좋은 이유는 내 삶의 관계망이 형성됐기 때문이겠죠. 제게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것이에요. 서울로요.”(장우석)
이것도 좋은 도시디자인이다
서울 자랑에 떠들썩하다. 여세를 몰아 ‘좋은 도시디자인’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준비된 멘트’가 없었다. 온당한 침묵이다. 이미 정답을 갖고 그것을 구현하는 게 아니라 활발한 소통을 통해 답안을 찾아가려는 새내기 예술가들에게 그것은 퍽이나 부당한 질문이었다. (왼쪽부터 장우석, 민성훈, 최보연)
잠시 후 민성훈 씨가 말문을 열었다. 아파트에 살 때, 귀가 길에 서로 얼굴을 몰라 옆집 사는 여성에게 ‘계속 따라오는’ 치한으로 몰렸던 사건과 일본에서 한 달 머무는 동안 마당을 쓸다가 앞집 사람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이 있다. 상반된 두 가지 기억을 떠올린 그는 단순히 멋진 경관을 꾸미기에서 나아가 ‘이웃과 함께하는 삶’이 가능한 도시디자인이 좋겠다고 말한다. 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가 재개발로 사라지면 추억이 없어지니까 무조건 부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더한다.
이웃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하고, 삶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아야 하고, 살던 사람이 쫓겨나지 않아야 한다. 한 장 두 장, 저마다 내 머릿속 스케치북이 술술 넘어갔다. 360명 시민의 목소리로 서울을 멋지게 디자인한 해치맨은 도시디자인을 술어의 자리에 놓고 사유했다. ‘도시디자인은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도 도시디자인이다’란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상상력의 무한증식이 가능한 이야기 틀이다. 해치맨의 시즌3을 기대해도 좋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