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개최와 노숙인 추방은 동시에 일어난다. 한강의 기적과 판자촌 철거가 그랬듯이. 잔치가 성대할수록 출혈도 크다. 삶의 자리에서 내몰린 도시빈민들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친다. 이를 군부독재 시절엔 '빈민운동'이라 불렀다. 반정부세력이었다. 21세기에는 '빈곤퇴치운동'이다. 나라에서 권장한다. 기업엔 사회공헌팀이 가동되고 지자체가 앞장선다. 기부와 봉사로 종교인은 건물을 세우고 연예인은 이름을 얻는다. 감동한 시민들도 NGO단체에 가입하고 나눔 행렬에 동참한다. 최대다수의 최대선행. 자본이 몸집을 불리면서 자선의 규모가 늘고, 빈민의 숫자도 증가했다. 거리로 고시촌으로 PC방으로 집 없이 떠도는 극빈자들의 질곡은 더 깊어졌다.
바로 그곳, 볕이 들지 않는 빈곤의 최전선에 이동현 홈리스행동 대표가 있다. 게으름뱅이, 알콜중독자로 낙인찍힌 노숙인을 ‘형’이라고 부르는 젊은 활동가다. 노숙인은 시장의 원리로 굴러가는 정글자본주의의 배설물이라고, 그러므로 베풂과 동정이 대상이 아니라 당사자가 운동의 주체로 서야한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에서 시작하는 운동. 가난에 대처하는 자세가 쿨하고 말쑥한 요즘 방식과는 확실히 다르다. 뭔가 뜨겁고 거칠다. 서울역에서 쪽방으로,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그에게서 잊고 있던 ‘빈민운동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철거민 공부방에서 노숙인 인권운동으로
홈리스행동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근방 벽돌색 건물에 자리했다. 영등포시대를 마감하고 지난 5월 31일 이곳 ‘아랫마을’로 이전했다. 오랜 숙원이었다. ‘빈곤사회연대’ ‘금융피해자연대 해오름’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 등 반빈곤 운동단체들과 위층 아래층에 모여 산다. 홈리스행동은 3층이다. 강당 겸 교실과 컴퓨터교실, 사무실, TV가 놓인 미니 거실 등 아담한 가정집 구조다. 큰 교실에는 책, 유인물, 기타, 공예품 등 배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한 달 전에 이사 와서 어수선하지만 딱히 더 정리할 것도 없다”며 그가 멋쩍게 웃었다.
이동현씨는 대학의 도시빈민선교회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시흥2동, 개봉동, 구로동 등 철거마을을 다니며 아이들 공부방을 꾸리고 학부모들을 조직했다.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 후에도 지속적으로 세미나와 현장 활동을 병행했다. 철거민과 동고동락 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삶은 노숙인과 엮여있었다. 뿌리가 같았다.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노실사)을 꾸려 2004년 서울역 노숙인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무기한 농성, 노숙인 추모제 등 일상적 활동을 폈다. 노실사는 지난해 총회를 거쳐 해산하고 ‘홈리스행동’으로 명칭을 바꿨다.
“노숙은 법적 용어이고 협소한 개념이에요. 정정할 필요가 있지요. 서울시는 노숙인을 500-600명으로 추산합니다. 하지만 시청 종로 강남 등 지하철역과 상담보호센터 외에도 사각지대가 워낙 많으니까 시설이용 인원까지 합하면 적어도 1000명은 넘겠죠.
거리, 쪽방, 고시촌, 무허가기도원, 무허가건물, 비닐하우스 등 크게는 10만 명 정도가 홈리스 개념에 포함됩니다. 대상을 잘게 쪼개는 방식은 피하려고 해요. 집단이 넓어져야 낙인감이 적어져요. 서구에서도 홈리스는 주거불안정 계층을 일컫는 말로 쓰여요.”
단체 명칭에 ‘홈리스’가 쓰이자 어느 한글단체에서는 외래어 사용을 항의했다고 한다. ‘뉴타운’은 말 못하고 왜 힘없고 작은 단체에 딴죽을 거는지 모르겠다고 슬쩍 푸념했다.
노숙인이 기자로 운영위원으로 참여
홈리스행동은 노숙은 물론 극한의 주거 빈곤 상태에 놓인 홈리스 대중의 권리찾기 운동을 지향한다. 활동은 크게 세 가지다. 야학(주말배움터), 미디어 매체사업, 현장 활동.
“2005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노숙인 평균 학력이 중졸 이하에요. 취미나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20%에 불과했지요. 노숙인들이 문화적 궁금증이 크지만 기회가 거의 없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문화도 돈으로 매매하잖아요. 노숙인들의 문화적 배제는 알코올중독과도 관련이 있어요. 마땅히 즐길 거리가 없다보니 자꾸 값싼 소주를 마시고 점점 중독되니까요.”
노숙인의 교육·문화적 권리 충족 차원에서 지난 2007년부터 주말배움터를 열었다. 한글, 몸살림, 통기타 동아리, 영상제작, 홈리스 권리교실 등 프로그램이 다채롭다. 학생모집은 서울역, 급식소 기관들에 유인물 배포해 알린다. 대개 30~40명 신청하면 20명 정도 남는다고 한다. 주말배움터는 오는 8월 14일 부터는 주3회 ‘홈리스야학’으로 확대 개편된다. 교육프로그램은 기초학문, 일상문화, 인권교육이다.
“주말배움터가 노숙인들과 만나는 좋은 기회에요. 배우고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노숙이 나만의 고통이 아님을 알아가요. 자신과 동료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침해받고 있는지 깨닫죠. 가령, 기초생활수급제도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고양이 앞의 쥐가 되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그건 국민의 정당한 권리이라고 말해드려요.”
또 매주 목요일 자원활동가 20명 여명과 함께 거리와 시설을 방문한다. 고충 상담과 정보제공이 이뤄지고 인권침해를 감시한다. 이 때 커피는 필수다. 차 한 잔 나누면서 “노가리를 열심히 풀어야” 속내를 터놓고 가려운 부분 얘기가 술술 나오더라고 귀띔한다.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 정보와 이슈는 <홈리스뉴스>로 발행된다. 2010년 6월 현재 ‘창간준비 8호’가 나왔다.
그는 신문 하단의 ‘숨은그림찾기 코너’를 짚으며 “우리 회원인 전직 만화가의 솜씨”라고 자랑했다. 옆면에는 건강보험료 장기체납자의 사연 투고도 있다. 신문제작은 물론 야학의 교사로, 운영위원으로도 노숙인 당사자가 참여한다. 홈리스행동 회원이 약 150여명인데 이 중 1/3이 노숙인 당사자라고 한다. 이처럼 홈리스행동은 내남이 따로 없다.
“노숙인이 주체로 서야하지만, 적자와 서자로 나뉘어서 노숙인은 앞장서고 활동가는 뒤에서 돕는 그렇게 불행한 운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저희는 뭐든지 같이 해요. 별명을 부르고 같이 밥해먹고 같이 책임지고 같이 조직을 일궈갑니다.”
“진정한 자활은 동반자 찾기다”
노숙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대표적인 제1원인으로 환원할 수 없다. 우리사회 일부 계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자리, 집, 신용, 건강, 가족 등등 누구나 한두 가지씩 걸린 삶의 곤란이 일시에 닥치면 노숙이다. 여기서부터는 걷잡을 수 없다. 노숙인의 60-70%는 금융피해자다. 주민등록증을 분실하거나 급전이 필요해 푼돈을 받고 명의를 빌려주었다가 사기를 당해 부채를 떠안는다. 또 파산신청을 해도 탕감되지 않는 것이 건강보험료, 세금, 학자금이다. 건강보험료 장기체납자는 아파도 병원엘 못 간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자격조건에도 미달한다. 잠자리, 일자리가 없다. 길거리로 내몰리는 것은 순간이다.
“노숙인 문제는 왜 생기느냐.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따른 배설물로 봅니다. 노숙인의 직업력 봤을 때 건설기능직, 단순기계직, 주방장, 미싱공 등이 많아요. 자본주의가 첨단화 되면서 뒤로 밀려난 직업들이에요. 그들이 단지 게으르거나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손 쓸 수 없는 통제 불가능한 구조적인 문제지요. 정부가 일자리 창출하고 인력 육성한다면서 서비스직을 대폭 확대하는 정책을 쓰지만, 망치 잡던 손으로 컴퓨터 자판은 못 두드리잖아요.”
노숙의 시발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법도 달라진다고 그는 말했다. 홈리스행동은 노숙인의 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 임대주택 신청, 명의도용 피해 접수 등 행정절차를 나서서 돕지만 단순히 ‘노숙인의 일자리 창출과 주거안정’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승자독식의 인간탑을 강요하는 질서에 다시 편입하는 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체제를 벗어난 다른 배치, 다른 인연을 도모한다.
“노숙에는 자활, 자립이란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요. 가뭄에 콩 나듯 성공한 노숙인의 사례를 전부인양 떠벌리죠. 그런데 혼자 일어나기란 불가능해요. 박지만이 알콜릭이더라도 아버지, 누나 등 가족이 배경이 되어주니까 살아가죠. 자활은 혼자 서는 게 아니에요. 동반자를 찾는 것이 진정한 자활이에요. 지난번에 회원 형 한분이 취업을 했는데 일자리 두 명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회원을 소개해줬어요. 소소하게 그런 것부터 시작해야죠.”
인간에게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동반자 찾기가 곧 당사자 조직”이라며 “홈리스 대중이 연대해서 의제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일상적 정치활동을 해나가는 것, 그것이 자활”이라고 역설했다.
꽃동네 가면 부랑인, 쉼터 가면 노숙인
정부의 노숙인 정책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홈리스 상태로 내모는 원인에 대한 처방은 없고 단속과 시설 입소와 같은 위기관리에만 급급하다. 윗분들 말씀이 있을 때마다 노숙인 복지는 요동친다. 그나마 올 들어 서울시의 노숙인 예산은 20% 줄었는데 반면에 인문학 예산은 20% 늘었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노숙인인문학은 참가자에게 인센티브가 주어지고, 수업 참여에도 일당이 지급된다.
일부 노숙인은 힘들게 일하느니 차라리 앉아있겠다며 인문학을 신청해 일당만 챙기기도 한다. 실질적 도움보다는 자신들의 업적 쌓기에 치중하는 전시행정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또 서울시의 정보독점 현상도 심각하다. 노숙인 행정을 감시하는 절차도 까다롭고 노숙인 개인정보가 3년이 경과하면 삭제해야 하지만 이를 어겨도 문제제기할 여지조차 없는 상황이다.
“주거정책도 그래요. 그룹홈은 홈리스의 주거정책이 될 수 없어요. 그건 군대 두 번 가란 얘기랑 같아요. 친구들도 같이 살면 싸우잖아요. 방 3개 있는 집에 2-3명씩 같이 살게 하면 관계가 금방 깨져요. 대부분 단신생활자라서 10평 미만의 원룸이 필요하죠. 2005년 7월 무렵 단신생활자를 위한 임대주택 시범사업이 있었지만 흐지부지 끝났어요. 지금은 원룸대기자가 200명이 넘어요.
일전에 정신장애 3급이고 알콜릭인 분을 은평마을이라는 부랑인시설과 다름없는 곳에 모셔다드렸는데 마음이 안 편하더라고요. 부랑인 시설은 복지부 소관으로 사회정화 차원으로 운영해요. 노숙인 쉼터는 지자체에서 운영하고요. 지원주체가 나뉘지만 큰 차이 없어요. 꽃동네 가면 부랑인이고 서대문 쉼터 가면 노숙인이에요.”
죽어서 탈노숙 하는 암담한 현실
그는 물었다. 어떤 사람이 시쳇말로 ‘개털’이 돼서 노숙을 나왔을 때 그가 잃은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면 삶이 정상화 될 것 같으냐고. 답은 NO다. 탈노숙은 쉽지 않다. 노숙생활 중 대부분 알코올중독, 질환 등으로 건강을 잃는다. 스트레스가 크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노숙상태의 스트레스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의 스트레스와 똑같다고 한다.
“저도 노숙체험을 해봤거든요. 지하도 바닥에 머리 대고 누워 있으면 하이힐 또각또각 소리가 대포소리처럼 들려요. 등 돌리고 있어도 시선이 따갑고 고스란히 다 느껴져요. 죽겠더라고요. 난 노숙 체험 중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책을 보고 있었어요.(웃음) 밥 먹을 때도 지하도 급식하면서 벽을 보고 똥 누는 자세로 빨리 먹게 돼요. 노숙인들이 죽어도 무료 급식 줄엔 안 서리라 다짐하지만 허기 앞에 무너지고 말지요. 해마다 300명의 노숙인이 돌아가세요. 전체 노숙인 중에 자활로 떠나는 사람보다 죽어서 떠나는 사람이 더 많아요.”
이동현씨 눈빛에는 결기와 장난기가 공존한다. 웃으면 정겹고 안 웃으면 차갑다. 노숙인들을 형이라고 부를 땐 막둥이 같다가도 정부의 임기응변식 노숙인 정책을 비판할 땐 맏형처럼 듬직하다. 홈리스운동이 힘들지 않느냐고 넌지시 떠보아도 엄살이 없다. “관성대로 살기 때문에 괜찮다”며 시큰둥하게 답한다. 아니다. 이런 경우는 관성이 아니라 일관성이 맞다.
초지일관의 시작은 성장기다.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부모님은 성실히 일 했는데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가난은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문제는 아님”을 일찍이 간파했다. 나의 일을 보편의 문제로 인식했다. 대학에 들어와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빈민의 상징적 존재인 노숙인에 관심이 쏠렸다. 못 먹고 못 배우고 돈줄은 마르고 육신은 병들고 관계는 끊어져 길가로 내몰린 사람들. 그 삶의 총체적 난국. 소위 견적이 안 나와서 포기하는 지점에서 그는 가능성을 읽었다.
“홈리스는 우리사회의 복잡다단한 문제가 얽힌 가장 열악한 조건이에요. 역으로 거기서부터 한 가닥씩 잘 풀어 가면 인권과 복지의 탄탄한 그물망을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의 지독한 배설물을 종합선물세트로 접수한 그.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경험과 생각과 고통이 제각각인 노숙인들. 벼랑 끝에 누운 그들을 추슬러 움직이는 일은, 단 1센티미터도 쉽지 않았다. “여기 저기 부딪히는 문제도 태산이고 가야할 길도 멀다.” 공 들인 것에 비해 성과가 많지 않다. 답답하지만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는다. “관성대로” 일할 뿐이다.
이동현씨는 기혼자다. 아내도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한다. 가난한 활동가 부부다. 아이는 없단다. “낳으면 바로 서울역 보내야 해서”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미래의 아이를 잠재적 노숙상태로 출산한 그에게서 ‘홈리스의 아버지’로 늙어갈 빈민운동가의 초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