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짝사랑이란 의미를 배운 것은 사람보다 강이 먼저였습니다.” 백발성성한 그가 낙동강에 애틋한 눈길을 던진다. 하지만 짝사랑의 진짜 불행은 만나고 싶을 때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의 짝사랑은 복되었다. 언제 찾아가도 낙동강은 옥빛 물결 넘실대며 너른 품으로 맞아주었으니까. 그렇게 낙동강 1300리 물길에 ‘그 집 앞’ 드나들듯 하기를 36년 세월.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1,400회가 넘는 낙동강답사와 800회 가까운 유역주민들과의 사랑방 좌담회를 갖는 등 낙동강 지키기에 앞장섰다. 30년 전엔 낙동강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고 요즘은 강의 신음소리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는 그. 김상화 씨는 현재 낙동강공동체 대표이자 운하백지화국민운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철새, 유역주민, 시인…강에 기댄 삶
“낙동강 하구는 반은 바다고 반은 강물인 기수지역입니다. 곳곳의 물길이 이곳에 모여들어 큰 강을 이루고 이 산 저 계곡에서 흘러 들어찬 모래톱이 크고 작은 모래섬과 삼각주를 만들면서 다양한 생태 터전을 만들지요. 사람들은 눈앞을 가리는 철새의 화려한 군무에 감탄하며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풍류를 즐겼습니다. 문화예술의 보고였죠.
강물은 단순히 흐르는 물길만이 아니에요. 다양한 생명들이 서로 함께 살려고 움직이는 공간이에요. 강에 사는 동물과 식물, 농사짓는 유역주민, 시인, 묵객 모든 이들의 삶이 담긴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짜인 거대한 생명공동체죠. 그것을 잘 보여주는 표본이 바로 여기 낙동강 하구입니다.”
경포대, 해운대와 더불어 부산의 3대로 꼽히는 몰운대 앞 낙동강 하구는 숨겨진 ‘낙원’이다. 바람이 빚어놓은 강물과 바다와 모래의 가지런한 금빛물결 위로 철새들이 신선처럼 노닌다. 안동 낙동강 물이 달려온 길 343km. 함께 가자고 손잡는 96개의 하천 형제, 그리고 96개의 형제들이 거느리고 있는 825개의 손자 손녀 하천이 모여들었다.
이처럼 수많은 식솔을 거느린 낙동강에 4대강 사업으로 인해 8개의 대형 보가 떡하니 들어선다. 그러면 늪이나 습지 또는 강변의 물 낮은 곳을 좋아하는 두루미, 고니 같은 철새들은 갈 곳을 잃게 된다. 도시 재개발로 철거민이 생기듯 낙동강의 뭇 생명체들도 “퇴출위기”에 놓인다.
금빛 모래 함부로 퍼내지 마라
"낙동강은 얕은 강이에요. 수심이 평균 1미터죠. 하천에 물길을 중심으로 넓은 모래톱이 있어 서식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다양한 종이 모여사는 게 가능했어요. 하지만 보가 1미터 2미터도 아니고 11미터 이상 들어서서 수심이 깊어지면 조류의 산란터가 없어져요. 얕은 곳에 적응해 살던 물고기도 사라지고. 물길 칸칸이 보를 세우면 유속이 느려지고 그만큼 햇볕을 많이 받으니까 물의 온도가 올라가며 강이 녹조화 되어 물의 산소가 고갈되죠. 물의 자정력을 상실하는 것이에요.
고인 물은 썩고, 하천 식생들은 본래의 터전을 잃고, 어류에겐 감옥이 되는데, 우리 국토 중추신경계의 마디마디를 해체하면서 그게 어떻게 강 살리기입니까. 또 모래는 낙동강 생명의 축입니다. 옛날부터 강에서 모래와 물은 억겁세월부터 부부관계라고 했습니다. 낙동강에서 모래 4억 3000만톤을 덜어냅니다. 이는 생명을 품는 자궁을 드러내는 거죠. 물과 땅을 잇는 모래톱이 사라지는 것은 강물의 표정이 지워지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여기저기 건드리고 훼손하면서도 4대강 사업으로 생태계가 살아나고 물이 살아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운하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발주자 이명박”의 꿍꿍이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애가 타는 듯 마른 침을 삼키는 김상화 대표. 짝사랑을 얘기하던 홍조 띤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입에서 환경 관련 전문용어와 제도와 통계치가 거침없이 쏟아진다. 어렵고 복잡한 수십 년 강의 역사를 통째로 삼켜버린 걸까. 그는 “머리는 안 좋은데 낙동강에 관한 것이라면 절로 외워진다.”며 머쓱해한다. 일구월심 짝사랑의 힘이다. 사랑으로 말랑말랑해진 신체의 능력은 무한 확장하는 법이니.
국가발전의 멍에를 짊어진 낙동강
첫 인연은 이랬다. 청년시절 원하던 음악공부를 포기한 그는 홀연 낙향했고 열정의 불씨는 야학으로 옮겨 붙었다. 가난 때문에 공부의 꿈을 접은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강으로 놀러가면서 풍광 좋은 낙동강 하구를 자주 찾았다. 1973년 2월 6일, 그는 생일을 맞아 처음으로 낙동강 종주순례에 나섰다. 인생의 발품방향이 바뀌었다. 18년 전부터는 낙동강 전체 유역에 237개 지점을 정해놓고 수시로 불쑥불쑥 찾아갔다. 매달 변화나 되살아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을 기록했다. 이를 지자체나 환경단체, 환경부에 알렸다.
그것을 책으로 엮었다. 낙동강 발원지부터 최종 종료지 부산까지 각 지역의 사회적 현상, 환경적 배경, 생태적 특성들을 집대성한 1270페이지짜리 컬러판 <낙동강 생명찾기 백서>를 사재를 털어 발간했다. 지난 해에 <강은 흘러야한다>를 펴냈다. 얼마전 ‘교보생명환경문화상’를 받는 등 환경관련 다관왕이다. 기타 치는 환경운동가인 그는 민중가요 ‘콩아 콩아 콩점아’로 시작하는 <점치는 아이>를 만든 장본인이다.
“낙동강은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의 구심점이자 젖줄이었죠. 마산 창원 울산 거제 등 대형공단에 산업용수를 공급했어요. 그 와중에 낙동강은 곳곳이 절개되고 물길이 막혀 유역으로부터 각종 오폐수가 쏟아졌죠. 낙동강이 엄마처럼 그걸 다 받아냈다는 걸 알았습니다.”
‘잘 살아보세’의 구호 속에 온통 개발의 대상이 된 낙동강. 1980년 42일간의 도보순례를 마친 그는 낙동강 발원지 태백 황지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사람이 병들면 병원이나 약국을 찾는데 아! 낙동강, 당신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30년의 시차를 느낄 수 없는 이 애끓는 메시지를 포스터로 제작한 그는 낙동강 유역 곳곳에 게시하던 중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
“말 못하는 강의 아픔, 대신 전해야죠.”
급기야 1991년 페놀사태가 터졌다. 김상화 대표는 부랴부랴 낙동강공동체를 조직했다. 강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여러 가지 환경문제의 사회적 대응과 지역 간 갈등을 한 곳에 모아서 함께 토론도 하고 논의하기 위함이다. 4대강 사업 이전부터 꾸준히 사랑방을 열어 주민과 현장문제를 토론하면서 우리강 지키기를 실천해온 것이다.
“4대강 유역주민들이 국토의 지킴이인데 지금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4대강 정비 사업을 ‘전광석화같이 착수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여야 한다’고 했는데 당장 중지해야합니다. 그간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가야할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합니다. 사실 지금 사업하는 분들은 떠나면 그만이지만, 여러가지 환경문제가 생길 경우 그 피해는 누가봅니까? 당연히 주민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흐르고 자정하면서 순환하는 물의 본능은 자연현장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지 탁상이나 어떤 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강은 단순하게 살고 죽고 하는 생물이 아닙니다. 강은 땅과 물과 주변의 모든 생명체가 공동으로 참여해있는 합성어입니다. 억겁을 지켜오고, 억겁세월을 담아갈 생명의 강입니다. 그 강의 뼈 마디마디에 철골재를 끼워 넣어 생식능력을 거세한다고 생각하면…아, 정말 눈물이 납니다.”
23년 만에 명동성당에서 시국미사가 열린 날. 김상화 대표는 오전 11시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4대강 사업 일시 중단·대통령 면담 요청’ 각계 인사 77인의 기자회견에 낙동강공동체 대표로 참가했다. 오후 1시 명동성당을 찾아 기도를 올리고 다시 낙동강의 품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36년간의 낙동강 짝사랑. 행복했는지.
“강이 아프면 나도 아파요. 강과 나란히 실려 온 인생인데. 짝사랑이면서 엄마 같고…악연이죠. 고통스럽잖아. 그렇다고 이제 와서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어요. 강이 말을 못하니까, 강의 언어를 내가 대신 전해줄 수 있으니 보람입니다. 행복하죠. 이제 남아있는 거라도 잘 지켜줘야죠. 마지막 도리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