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의 어느 작은 마을, 부챗살로 퍼지던 햇살이 몸을 접는 시간이면 기타를 멘 청년들이 하나둘 거리로 흘러나온다. 저마다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딩딩 기타를 매만진다. 가슴에 고이 접어두었던 오선지가 서서히 펴지고 감미로운 선율이 날개 달고 훨훨 허공으로 떼 지어 난다. 부르고 또 부르고, 여기서 한 소절 저기서 한 소절. 섬처럼 떨어져 노래하던 청년들은 어느새 따로 또 같이 화음을 맞춘다. 어스름 밤공기 타고 골목골목 휘돌아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청량한 바람 되어 동네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 소모뚜, 노래하다
“버마 젊은이들은 기본적으로 기타를 다룰 줄 알고 노래도 잘해요. 밤새 기타를 쳐도 아무도 시끄럽다고 얼굴 붉히거나 신고하지 않아요. 거리를 지나는 행상은 노래를 불러줘서 덕분에 쉴 수 있다고 생각하죠. 노래 한 곡씩 듣고 가요. 매일 그 자리에서 노래하던 청년이 안 보이면 동네 사람들은 어디 아픈지 안부를 묻고요.”
날마다 새벽 2시까지 하얗게 밤을 지우던 그. 노래책을 탑처럼 쌓아두고 손끝 부르트고 목청 터지도록 노래하던 청년 소모뚜. 그는 스무 살에 정든 고향을 등졌다. 부모님의 생계와 여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TV가 필요하면 전자제품 가게에 가고 밥을 먹기 위해 식당을 가는 것처럼” 꿈을 찾는 그에게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돈 벌어 효도도 하고, 민주화 투쟁의 선배격인 한국에서 버마를 도울 일을 배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1995년 한국에 온 소모뚜의 첫 일터는 김포의 박스공장. 매일 14-15시간 씩 긴 노동이 반복됐다. 암담했다. “기계 사이에서 내 삶을 희생하는 게 아니라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 싶었으나 현실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상이 사막이었다. 물을 찾듯 기타를 찾았다. 주말이면 공장은 연습실로 변신했다. 버마 친구들과 모여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좋은 친구, 좋은 음악으로 피로를 풀고 다음 한 주 동안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소모뚜의 노래는 공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어느 성탄절 이주노동자들이 교회에서 노래 불러주는 잔치에 참가해 큰 인기를 끌었다. 그도 아이들도 행복했다. 곁에 있던 아시아인권연대 이란주 대표가 제안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노래를 사랑한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결성하면 어떨까?’ 흔쾌히 응했다. 소모뚜는 곧장 네팔, 버마,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 친구들과 유레카라는 밴드를 꾸렸다. 1999년 9월 추석에 첫 단독 공연을 가졌다.
“2003년에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정부의 미등록 이주 노동자 단속이 아주 심해졌죠. 쫓겨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강제추방의 공포를 견디지 못한 친구들이 자살을 했어요. 충격적이었죠. 저희는 IMF 때 월급을 반만 받고 사장님이랑 라면 먹으면서 일했고 월드컵에 같이 빨간 티를 입고 응원했어요. 한국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는데 왜 우리를 쫓아내는 법을 만드는 건가요?”
소모뚜는 답을 찾아 떠났다. 8년 동안 묵묵히 일하던 박스공장 대신 미등록이주노동자 추방에 반대하는 명동성당 농성장으로 출근했다. 투쟁의 현장에서 모두가 재밌게 외칠 수 있도록 구호를 노래로 만들었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우리가 원하는 건’의 가사 ‘스탑크랙다운(Stop Crackdownㆍ강제추방 중단!)’은 팬들의 요청에 의해 아예 밴드이름으로 지정됐다. 뮤지션 소모뚜는 전국 방방곡곡 공연을 다녔고, 자연스레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참한 노동환경과 노동 권리에 대해 눈 떠 갔다.
# 소모뚜, 절망하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 아주 영세한 곳에서 일해요. 그런 사업장의 관리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어요. 저희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가난한 나라 출신이고 피부색이 시커멓다고 인간취급을 못 받아요. 심지어 너희 나라에도 해와 달이 있느냐 묻는 사람도 있어요.”
천태만상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냉대는 노골적이고 극심하다. 업무에 대한 제대로 된 실무교육도 안전교육도 없다. 혹여 이주노동자가 일을 더 잘 할까봐 기계사용설명서를 치워버리는 경우도 있다. 부상위험이 따르는 일을 맡아도 누구 하나 ‘조심하라’ 귀띔해주는 이 없다. 우주베키스탄의 한 노동자는 사료기계에 손이 절단됐다. 그런데도 치료비를 못 받았다. 이에 항의하면 담당자는 당연하단 듯 내뱉는다. “농업은 한국사람도 산재 처리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주노동자는 당연히 안 돼!)”
“농업 인력으로 온 이주노동자가 다른 일을 하면 바로 불법이 돼요. 그런데 농촌은 겨울에 두 세 달이나 일자리 없잖아요. 실업급여를 안 줘요. 그 기간에 다른 일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예요. 어업은 3년 내내 배에서 일해요. 한국어를 배울 조건이 안 되니까 부당한 일을 겪고도 모르죠. 역시 다른 일터로 옮기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월급도 제 때 못 받잖아요. 그런데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체불임금을 상담하러 가면 문제 해결은 안 하고 법무부에 신고부터 해버려요.”
법이 아니라 덫이다. 소모뚜는 절망했다. 이주노동자는 곧 불법체류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20만 명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아무도 알려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은 뿌리 깊다. 정부당국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단속으로만 해결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절차보다 불도저의 효율성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주노동자 문제에서도 예외 없다. 그런 한국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소모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강한 사람이 약자 편에서 생각한 적이 없잖아요. 고용허가제도도 이주민들을 보호하고 배려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짜낼까 이용할 생각만 해요. 국익과 노동자의 권리를 동시에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아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싼 값으로 일하잖아요. 현대판 노예허가제가 된 거죠.”
소모뚜와 함께 MWTV에서 활동하는 아웅틴툰은 “버마는 소도 쉬는 날이 있다.”고 한탄했다. 버마에서는 기후조건상 3모작을 할 수 있는데 1모작만 한다. 그래도 가족이 넉넉히 먹고 사니까 고생을 자처하지 않는다. 소 1마리로 충분한 일도 2마리 시켜서 쉬엄쉬엄 일 한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엔 사람도 소도 같이 쉰다.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처음에 한국인들이 불철주야 일만 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느냐 묻지만, 저는 그렇게 일만하고 어떻게 사느냐 물어보았죠.”
# 소모뚜, 행동하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선 농성은 2003년 11월 15일부터 2004년 11월 26일까지 농성은 385일 간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소모뚜는 이주노동자 ’활동가’로 거듭났다. 일자리를 다시 구해 월~토요일까지 소화기 압력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일요일에는 스탑크랙다운의 기타리스트로 버마행동의 총무로 다문화활동가로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2005년부터는 이주노동자방송 MWTV 제작에도 참여했다. ‘아픈 다리 서로 기댈’ 친구도 여럿 만났다. 이주노동자 밴드 ‘유레카’ 시절부터 함께한 음악적 동지 미누(미노드 목탄)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미누가, 강제추방 당한 이주노동자를 위해 ‘친구여 잘 가시오’란 노래를 무대에서 함께 불렀던 그 미누가, 지난해 18년 간 살아온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누의 구속이 연일 매스컴을 탔고 소모뚜의 이름도 같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이게 화근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장은 소모뚜에게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까 두렵다며 조용히 나가줄 것’을 당부했다. 하루아침에 친구도 잃고 일터도 잃은 소모뚜는 망연자실 허탈감에 빠졌다.
“미누형 사건 때 희망이 없어 보였어요. 기본적인 것이 보장 안 된 사회에서 내 목터져라 노래 불러도 소용이 없는 일인가. 그 전에도 미누형과 밴드 때려 치자는 얘길 했었죠. 우릴 적으로 보는 이 사회에 기여할 게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적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상황이 안 좋다고 도망가거나 회피하면 내 스스로 창피하고 죄를 짓는 거잖아요. 그래도 우리 얘기에 공감하고 듣고자 하는 사람 있으니까 희망을 가져야죠. 제가 아주 초기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왔기에 후배들이 우리처럼 힘들고 헤매지 않게 길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책임감이 있어요.”
소모뚜는 ‘해고’를 계기로 MWTV에 대표를 맡았다. “안 그래도 일할 사람이 없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메라 들고 이주노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한국 사람들조차도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그며 활짝 웃는 ‘다문화가족’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 온정과 연민 혹은 무시와 혐오, 교육과 상담의 대상이 아닌 저임금과 열악한 조건에 신음하는 노동자, 내면적 풍요를 꿈꾸는 존엄한 인간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들려준다.
이밖에도 참다운 소통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쓴다. 취재 차 만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자 매주 월요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다.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OBS 라디오 <다문화 톡톡>의 진행을 맡고, 위클리수유너머에 ‘밍글라바코리아’를 매주 연재한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이주노동자 단체의 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강행군을 소화하는 그에게 ‘버마행동 한국(Burma Action Korea)’ 활동은 각별하다. ‘버마행동’은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 받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조속한 민주화를 위해 노동하며 투쟁하는 버마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 종각역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국제민주연대, 버마민주화를지지하는모임, 인권연대 등의 시민사회단체와 기자회견을 연다.
“지난 4월 말에는 버마군부의 비민주적 선거법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한국이 독재정권에 탄압받았을 때 해외의 많은 단체들이 힘을 쓴 것처럼 버마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하루 속히 정착될 수 있도록 한국도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또 한국의 버마 노동자들에게 조국의 상황을 알리기도 버마행동의 중요한 일입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라서 한국어 교육, 산업안전교육, 인권교육이 있을 때 버마의 내부 상황 사진전을 여는 등 간접적으로 알리죠. 직접 나서지는 못해도 후원금을 내겠다는 분들도 있고 관심을 많이 가져줍니다.”
# 소모뚜, 함께가다
소모뚜는 현재 ‘인도적 지위’ 비자를 갖고 있다. 인도적 지위 인정은 난민과는 다르다. 인도적 지위는 난민 요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인도적 차원에서 일정 기간 체류허가를 내주는 것이다. 법률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법무부 지침으로 시행되는 것이어서 신분이 불안하지만 당장 추방될 염려는 없다.
“처음엔 한국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사회’라 힘들었어요. 힘 있는 사람들이 탄압할 때 NGO나 조직 활동 못하는 사람은 이웃이라도 알아야 도움을 요청할 텐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약한 사람끼리 힘을 합쳐서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그러면 정글에서 호랑이가 작은 동물 다 잡아먹는 것처럼 그런 사회가 되어버릴 테니까요.
버마는 마을이에요. 아들 없는 집에서는 다른 집 남자들이 나서서 도와줘요. 코코넛 나무 높은 곳의 열매를 따주고 물탱크를 청소하죠. 무거운 짐 같이 들고요. 정치는 개판인데 (웃음) 국민들은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아요. 나눔의 기쁨이 행복이라고 남을 돕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았어요.”
버마는 불교국가다. 마을에 학교는 없어도 절은 있다. 불경을 일상에서 새소리처럼 듣고 자란다. 버마 사람들은 관계와 전체 속에서 사고하는 동양적 가치관이 몸에 배었다. 결초보은, 역지사지.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며, 남에게 밥 한 수저만 얻어먹어도 은인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지난 15년간 한국 밥을 먹고 산 소모뚜는 “한국에 갚을 게 많다”고 여긴다. 그가 한국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정 그리고 책임감.
“길거리에 돌이나 유리가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 가지 않도록 치워야 하잖아요. 저희한테 한국을 비판한다고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암 환자에게 증상과 치료법 알려주는 것처럼, 한국사회에 아픈 일들과 치료법 알려주고 같이 고쳐가자는 거죠. 한 사회의 소수자가 본인 얘기 하려고 나왔을 때 부정적으로 보면 안 돼요. 나쁜 얘기 안 하고 덮어두면 더 좋은 건가요? 한국의 한계 드러내주는 것이 더 나아지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 인권교육을 하러 갔을 때다.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이주민이 요구하는 인권이 무엇이냐”고. 때로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되는 법. 소모뚜는 되물었다. “이주민 인권과 한국인 인권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이주민인권이 궁금하면 인권이 뭔지를 배우면 돼요. 내가 맞는 거 싫으면 다른 사람도 싫어하고 월급 받고 싶으면 이주민도 받고 싶은 거죠. 나의 입장에 맞추어 생각하면 그게 인권이에요.”
인권이 무언지 알 필요가 없던 나라에 살다가 한국에 와서 인권교육 한다는 게 무척 힘들다며 소모뚜는 멋쩍게 웃었다.
인생의 절반, 그것도 생의 가장 빛나는 청춘시대를 보낸 “한국을 사랑한다”는 소모뚜.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의 초상은 암울하고 쓸쓸하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행동하라는 황금율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 GDP는 높아도 서로 돕고 배려하는 관계적 부가 사라져 가는 나라. 일터의 빈자리를 채워줄 동료시민을 구해 와야 하는데 노예를 얻으려 하는 나라. 87년 민주항쟁으로 군부독재는 내몰았지만 사는 게 여전히 팍팍한 나라. 이름만 민주주의 하고 딴 짓 하는 나라…….
“언제든 제가 버마에 돌아갈 때 한국의 민주화를 교본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한국에서의 경험한 일들이 버마의 미래에 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하지 말아야할 것. 따라할 것이 보이니까요. 또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 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기도 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함께 사는 세상, 차별 없는 세상이라면 한국도 그것이 싫지 않을 거예요.”
여행자 소모뚜. 그는 여기 아닌 저기의 생을 꿈꾸며 길 떠났다. “열심히 일했고 충분히 인정받았고 더불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행자가 되는 순간 기후에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에 더 영감을 받듯이 그는 이 땅에 자욱한 차별의식과 모순투성이 제도에 반응했다. 높은 벽에 부딪히고 모난 돌에 쓰러진 친구들의 처참한 모습을 기억한다. 그래서 더 멈출 수 없다. 벽에 문을 내고 돌멩이를 입김으로 녹일 때까지, “Stop! Crackdown!” 소모뚜의 노래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