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강(73)은 대금 명인이다. 소싯적 아버지 무릎에서부터 부단히 연마한 천의무봉의 가락으로 가요, 재즈, 팝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른다. 품 넓고 속 깊은 그의 연주는 말해준다. 음악인생 65년, 그가 살아온 시간은 무엇을 하든 대금의 본령에 이르기 위한 길이었음을.
이생강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퓨전국악에서 병아리단소까지’
때마침 봄비가 내린다. 촉촉이 젖은 세상에 구슬픈 대금소리가 번진다. 굽이쳐 흐르는 ‘목포의 눈물’ 엄마 등이 그리워지는 ‘섬 집 아기’ 발잔등이 아려오는 ‘아리랑’... 겨우내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연둣빛 싹처럼 가슴 속에서 움트는 것이 있으니 영혼의 인기척이라고 해도 좋을까. 나란히 놓인 대금, 소금, 퉁소, 단소 등 일곱 가지 우리 목관악기가 그의 입김을 통과하면 이렇듯 심금을 건드린다. 이 시대 최고 대금명인 이생강의 소리다.
“우리가 국악에 대한 관심이 미약하죠.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이 요인이에요. 우리 것을 없애려고 외국음악을 퍼뜨렸어요. 대금은 정악만을 연주하는 정악대금(正樂大笒)과 민속악인 산조만을 연주하는 산조대금(散調大笒)의 두 종류가 있어요. 정악대금은 국가의 제도적 지원을 받고 내려왔고, 민속악인 산조대금은 일대일로 전수됐지요. 판소리, 춤, 사물놀이, 민요 등 전통음악에서 기악은 어디라도 약방의 감초처럼 넘나들어요. 관악기가 음악을 리드해 나가는데 그중에도 대금이 으뜸이죠.”
팔도가락 익혀 세계무대에 서다
이생강은 반주악기로만 여겨왔던 대금을 독주악기의 반열로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와 대금의 인연은 아버지의 무릎에서 시작됐다. 아버지는 관악기라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주하던 재주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족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운전을 하던 아버지는 고된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피리를 불며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달랬다.
아버지의 품에서 놀던 어린 생강은 호기심에 아버지의 피리를 불었다. 소리가 남달랐다. 단소는 5살, 대금은 8살 때부터 늘 입에 대고 다녔다.해방을 맞아 9살에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곧 6·25가 터졌다. 마침 전국 각지의 악기명인이 피란 차 부산에 모여들자 이생강은 뜻밖에 행운을 누렸다. 하루 종일 6명의 스승을 찾아 뛰어다니며 전국 팔도의 가락을 배우게 된 것. 스승이 23명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전수받은 덕에 단소, 소금, 대금, 퉁소, 태평소, 쌍피리, 서양피리 못 부는 악기가 없었다.
“유년기엔 뭣 모르고 했고 소년이 되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밥 먹고 운동 잠깐 하는 것 외에는 그냥 연습만 했어요. 하루 종일 악기가 입을 막고 있어서 말을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걸 좋아해. 그 때 못한 말 하려고!”
구수한 너털웃음이 터진다. 그랬다. 다 바쳤다. 입때껏 하루 4시간 씩 자면서 미친 듯이 불었다. 그러나 갈수록 천대받고 소외됐다. 서양음악만 알아주는 풍토에 크게 회의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스물 네 살 젊은 국악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60년 5월 17일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하는 단원들과 함께 반주단의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에 가게 된. 마침 한 무용 출연자가 급작스런 맹장수술로 무대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15분 정도 그가 대신 무대에서 대금 산조를 연주했다.
“반응이 굉장했어요. 마치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꽃을 나르기 위해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다, 신의 소리다, 영혼의 소리다 극찬을 받았죠. 그 뒤로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등 세계적 음악도시에서도 열렬한 평가를 받았고요. 힘이 났어요. 세계에 통하는구나! 그 때 파리에 가지 않았으면 대금을 그만뒀을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국악엔터테인먼트 그룹회장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한국에 돌아와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가수 바비킴, 기타 연주자 김광석, 유진박, 길옥윤 등 다양한 분야의 음악인과 작업을 통해 국악 퓨전화를 꾀했다. “하다 보니 대금은 너무 담을 것이 많은 그릇”이었다.
대금의 원형은 살리고 감각은 더했다. 보수적인 국악계에서 국악을 망친다는 욕을 들어가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점차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국악을 살리기 위한 그 나름의 묘책이었다. 아울러 오랫동안 선대로부터 배운 지식을 후학들이 쉽게 배우고 따라할 수 있도록 교본도 만들고 음반도 제작하는 등 민속악 정립에 분투했다. 노란색 PVC로 유아용 병아리 단소를 만들고 죽향단소, 쉬운 단소 등을 널리 보급했다.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공장장, 오디오 제작하니까 레코드 사장, 책 교본 만드니까 출판사 사장, 영상 만들다 보니 영화사 사장, 여기에 공연까지 기획하잖아요. 제가 완전히 엔터테인먼트 그룹 회장이 됐어요. 하하하.”
하얀 셔츠에 분홍 타이를 맨 그에게서 두 팔 걷어 부친 청년사업가의 열정이 묻어난다.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서양악에 비해 항상 뒷전 신세였던 국악계의 위치 향상을 위해 숨이 붙어 있는 한까지 애쓰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요즘도 전국 초등학교에 무료 강연을 나가는 등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뿐 아니다. 음악의 깊이에서도 그 한계를 넓혀가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세계 최초 120분 대금산조 음반 ‘笛流(적류)’를 내는 기염을 토했다.
강하게 살라, 이생강(生剛) 대금
사람도 숨을 잘 쉬어야 하듯이 대금을 불 때는 호흡법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 보통 헛바람, 입김, 입바람으로 불게 되는데 이 가운데 헛바람은 외부호흡으로 소리가 거칠고 탁하게 나며, 호흡이 짧아 자주 호흡을 해야 하므로 오래 연주하기가 부담스럽다. 하지만 입김 즉 복식호흡으로 대금을 불게 되면 맑고 부드러운 음이 나오면서 호흡도 여유 있게 조절할 수 있어서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속도의 시대에요. 기계문명화 되어가는 세상에 정서적 혼란도 큽니다. 대금은 마구 달려가는 감정을 제어해주어요. 대나무에서 퍼지는 소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심금을 울리는 게 목관악기입니다. 단소는 불기도 쉽고 조용하게 마음 고르기로 최고죠. 심폐기능도 강화되고. 치매도 막고 감성이 풍부해져 창의력에도 좋습니다. 저는 60이 넘어서 더 좋은 발상이 많이 떠올랐어요. 우리 자랑스러운 민속악이 감동을 주는 음악이 되도록, 더 대중에게 들어가서 보여주고 들려주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이생강. 험난한 세상에 태어났으니 ‘강하게 살라’하여 ‘生剛’이었다. 이름에 담긴 사명대로 그의 대금가락은 민들레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널리 울려 퍼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