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융희 선생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99년부터 인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공부해왔다. 연구실 주방에 갖가지 맛난 음식을 남몰래 가져다놓아 ‘우렁각시’로 통한다. 조용히 베풀고 사라지는 손. 그 고마운 손으로 6080의 사는 이야기 <여강만필>을 위클리수유너머에 연재 중이다. 4월 14일 볕 좋은 날, 편집팀은 경기도 연천군 신망리 김융희 선생 댁으로 봄 소풍을 떠났다.
# 길
지방 국도변 마을 어귀, 고무신 바람에 서성이는 촌부가 있다면 필시 자식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김융희 선생도 그랬다. 뒷짐 지고서 느린 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리다 우리가 탄 차를 발견하자 입가가 벙글어졌다. 손을 번쩍 들어 차를 인도하고는 편집팀을 푸근한 눈빛으로 등 두드려 자식처럼 맞아주셨다.
“이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그러게 말이다. 참 멀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이대로 가다간 삼팔선 넘겠다 싶을 때 가까스로 목적지에 다다랐다. 행정구역은 경기도지만 심리적 거리는 강원도 바닷가보다 멀었다. 그런데, 이 길을 김융희 선생은 매주 오간다는 얘기다. 연천의 심산유곡에서 책 봇짐 들고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남산자락까지, 왕복 5시간이다. 결코 녹록치 않을 상경기에 대해 그는 여강만필에서 이렇게 소회를 풀었다.
‘기차는 내 생활의 방편이요 안식처… 먼 길을 오가는 나의 서울 나들이에 대한 남들의 동정어린 말도 듣고 측은지심의 눈총을 맛보기도 한다. 나에게는 결코 아니올시다. 기차를 타며 먼 산 확 트인 들판을 바라보면 눈길 좋은 여행이요, 눈을 감고 등을 기대면 거실의 소파처럼 편한 안식처이다. 마주한 사람과 정담이라도 나누면 분위기 있는 까페요, 책을 펼쳐 독서를 하면 우리 집 서재 같은 도서실이다. – 여강만필 ‘열차상경기’ 중
# 집
파란 지붕 인 네모난 단층 건물. 겉은 밋밋하나 안은 옹골차다. 널찍한 거실이 벽면마다 버전이 다르다. 왼편은 문인의 방이다. 책이 책을 베고 천장까지 가지런히 누웠다. 표지마다 빛바랜 질감이 다른 오래된 책방이다. 오른편은 여인의 방이다. 오디오와 거울과 의자, 십자가와 노란 들꽃이 수굿이 놓여 있어 향기롭다. 맞은편은 화가의 방이다. 창문 틈 사이로 햇살이 떨어지는 그 벽 아래, 그림이 비스듬히 기댔다. 빛과 색이 뒤섞이니 막 붓질을 마친 듯 에너지가 생동한다. 거실 중간 대형테이블에는 연두색 패브릭이 깔려 있어 아늑함을 더한다.
작은 집이 숲 같은 미로구조다. 바위 뒤가 동굴로 연결되듯이 벽인가 싶으면 부엌이고 끝났나 싶으면 문간방이 나온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아무 것도 꾸미지 않은 듯 소박하나 곳곳에 운치와 온정이 숨 쉰다. 이 자유분방하고도 사려 깊은 인테리어 감각의 발원지는 바로 김융희 선생이다.
“이 집을 구상해서 목수랑 같이 지었어요. 테이블이랑 의자랑 다 서울에서 누가 버린 거 가져온 거예요. 이것저것 모아 놓은 것이지 꾸민 것도 없어요. 겨울에도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집 안에만 있으면 추운 줄 몰라요. 따습고 살기 좋아요. 사람들이 나보고 그 시골에 살아서 적적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심심할 틈이 없다니까.”
집터가 놀이터요 일감이 운동이다. 곧 대대적인 봄단장이 시작된다. 앞마당 텃밭에 씨앗을 뿌리려고 흙을 일궈놓았다. 옆 공터에는 비닐하우스를 짓기 위해 쇠막대기를 잔뜩 갖다 놓았다. 이곳은 서울보다 봄이 한 달 가량 늦다. 조금 더 땅이 풀리면 앞산으로 뒷산으로 연초록 잎 흐드러지고 꽃내음 진동할 터. “여기 꽃이 다 피면 진짜 좋다”고 연신 자랑하는 김융희 선생. 멋진 풍광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서 땀 흘릴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눈치다.
“연천에 아무 연고가 없어요. 3년 전에 정동갤러리를 정리하면서 시골로 들어가려고 전국공시지가를 알아봤죠. 제일 싼 곳이 경북 봉화에요. 노무현대통령 고향. 거기로 갈까 했는데 서울에서 떨어지면 아쉬워서 여기로 왔죠. 생태적으로 공기 좋고 서울보다 넓고, 와서 보니까 좋더라고. 여기가 6.25 때 피난민들이 내려와서 생긴 마을이라 사람들이 아직도 순박해요.”
뒷산은 소나무가 빼곡하다. 꽤 깊다. 가끔 멧돼지가 새끼들을 몰고 들이닥치기도 한다. 그래서 마당에 잘 생긴 진돗개를 네 마리나 키운다. 녀석들 하루 세번 끼니 챙기는 일도 만만치 않다. 아는 식당에서 남은 반찬을 가져다가 먹인다. 또 며칠 씩 집을 비우는 날에는 이웃에서 돌봐주기도 한다. 그렇게 저렇게 소소히 챙기고 살피고 거두고 나눌 것 천지다. 자연만물에 둘러싸여 온종일 북적북적 하루해가 짧다.
‘바구니와 호미, 나물 캐는 도구들을 챙겨 냉이를 캤습니다…봄나물은 겨울의 잃었던 기를 채워주고, 입맛을 되돌려 준답니다… 짜잔한 싹배추는 나물로, 못난이 배추는 쌈배추, 천기냉이는 된장국으로. 삼박자가 척척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냉이만 보내려니 너무 쪼금, 치사스러워. 못난이 짜잔이를 함께 했습니다. 무농약으로 자랐기에 가끔 벌레가….잘 살펴 드세요. – 여강만필 ‘봄맞이 봄나물’ 중
# 밥
천기 머금은 냉이로 김융희 선생은 점심을 손수 차려주었다. 상추 씻고 양배추 찌고 고기 구울 숯불 펴고. 밥통에는 뽀얀 윤기 도는 쌀밥이 한 가득, 큰 솥에는 갓 캔 냉이와 된장의 향이 한 가득. 쌈채소도 양푼 째, 양배추도 냄비 째, 냉이국도 큰 사발에 넉넉히 두루두루 나눠먹었다. 소꿉놀이 같은 아파트 식탁에서는 구현될 수 없는 푸르고 푸짐한 시골밥상. 새벽부터 잰걸음 옮겨 장만했을 성의에 감사하고 손맛에 감복하며 모두가 음식을 깨끗이 비웠다. 칭찬받았다.
“아침부터 괜히 마음이 바쁘더라고요. 이것들이 남았으면 무안했을 텐데……다들 좀 먹네!”
밥과 입의 물리적 거리는 이렇게 짧다. 하지만 밥과 입의 윤리적 거리는 너무도 멀다. 땅에서 자란 쌀이 입속에 밥으로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돌부리를 지나야 한다. 김융희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에 고향인 전남 장흥을 떠나 서울로 왔다. 밥 세끼 먹고 살기 위한 시난고난의 나날이 조금 일찍 시작됐다. 신문배달부터 안 해본 일, 안 해본 장사가 없었다. 책도 팔고 밥도 팔고 약도 팔았다. 하지만 사업은 그에게 썩 맞지 않은 옷이었다. 매번 얼마 못가 벗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그림 장사다.” 끝까지 해보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워낙 타고난 배포와 요령이 없어 이 조차도 쉽지 않았다. 특히 착한 가격으로 고객에게 먼저 다가가는 판매 전략은 미술판에선 역효과를 일으켰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달리 살줄 몰랐으니 묵묵히 가야했다. 그러자 정직하고 성실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점괘에 나오는 말처럼 ‘귀인이 나타났다.’ 모 시중은행 전국 지점의 그림관리를 맡는 등 일이 순조롭게 풀려갔다. 은행 측의 배려로 본사 강당에서 그동안 수집한 그림을 다 내놓고 판매하는 대형전시회 자리까지 마련됐다. 드디어 그간 쌓인 빚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좋은 기회가 온 것.
“그런데 바로 그날 IMF가 터졌다는 뉴스가 나오더라고.”
# 책
소설을 사랑해서 소설처럼 살게 된 것일까. 이제 됐다, 이쯤이면 고통이 끝나는구나 싶을 때 삶은 어김없이 한 번 더 추락시켜 주곤 한다. 삶의 엄정함을 가르쳐주는 책. 그러나 어느 순간 책의 엄정함을 삶에서 깨우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책을 사랑한 자에게 가해지는 아름다운 형벌일지도 모른다. 무미건조한 글자들이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감각을 일깨우는 존재-사건은 몰락, 그 뒤에야 일어나므로.
책은 평생 그의 좋은 친구였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소년 융희는 5일장이 서면 하루 종일 장터에 주저앉아서 책을 봤다. 학원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학원’을 열독했다. 한번은 육군사관학교 특집이 실렸다. 육사생도의 각 잡힌 어깨와 절도 있는 포스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나머지 육사의 꿈을 키웠다.
“육사를 가고 싶어서 발버둥 쳤는데 떨어졌어요. 대학에 어렵사리 가서도 등록금이 없어서 제대로 다니질 못했고… 그래도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서 강의실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들었어요. .일 하면서도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양강좌는 빠지지 않고 전부 다녔지요. 거기서 고미숙 선생님을 본거에요. 아주 독특한 얘기를 하더라고! (웃음) 대학로에 있는 연구실을 찾아갔지요.”
11년 전 일이다. 김융희 선생은 수유너머가 대학로에서 남산에 오기까지의 발자취를 기차역처럼 외는 몇 명 안 되는 소중한 인연이다. 현재 6080고전학교를 수강 중이다. 장르불문 다양한 책들이 구비된 그의 서재에는 수유너머 연구원이 쓴 책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책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봐요. 한 우물을 팠으면 뭐가 됐을까 싶기도 한데… 공부를 해서 학문적인 효용은 못 얻었지만, 난 만족해요. 여기 갖다 놓고 못 본 책이 많으니까 밖에 나가서도 ‘빨리 책 읽어야하는데’ 마음이 바쁘고 또 앉아서 읽으면 재밌고. 얼마나 좋아요. 요즘은 뭐든지 돈과 연결하지 못해 안달이고 책까지도 그러는데. 늙은이 사고 굳어져가는 것도 막아주고 사는 게 지루하지 않고. 그거면 돼요. 뭘 더 바라면 그건 욕심이지요.”
내 삶에 있어 수유너머의 존재, 내 아들은 그것을 “나의 생에 있어 한 사건”이라 했다. 나도 그의 표현을 결코 부정하고 싶지 않다…나는 어쩐지 수유너머의 분위기가 좋다. 연구실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젊은 내 동료들을 보면 마음에 뿌듯한 기운이 인다. 이 은근함의 행복감, 그것 뿐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다. 격의 없이 대해주는 연구실의 많은 젊은 내 동료 벗들, 그들과 더불어 누리는 호사가 늘 자랑스럽다. – 여강만필 ‘젊음이 부럽다’
# 벗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다 같이 마당으로 나갔다. 봄볕을 쐬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약숫물처럼 콕 쏘는 공기를 온몸에 축적도 하고, 아궁이에 들어가서 코를 킁킁 불 냄새를 맡기도 했다. 김융희 선생이 흐뭇한 미소로 운을 뗀다. “여기 와서 땅값 안 물어보는 사람이 없는데 수유사람들은 안 물어보네? 우리 집에 오면 무조건 첫마디가 그거야. 땅이 한 평에 얼마냐고.” 두 번째 칭찬이다. 밥 잘 먹는다고 한 번. 땅 값 안 물어본다고 또 한 번.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첫째는 돈을 안 쓰는 법, 둘째는 잘 버는 법. 나는 적게 쓰고 살아요. 서울 갈 때 차비도 기차요금 오백원씩 왕복 천원 밖에 안 들어요. 지하철은 무료고. 웬만한 거리는 걷고. 친구들이랑 밥 먹을 때도 싸고 맛있는 집으로 가면 되고. 입때껏 청약통장 한번 가진 적 없거든. 그래도 여기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 넓은 집이 있고.
그런 말이 있잖아요. 거지 부자가 길 가다가 집이 불타는 거 보고 우리는 집이 탈 염려 없어서 다행이라고 했다고. 사람들은 돈이 안 생기면 안 즐겁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살아보면 ‘없는 재미’도 쏠쏠해요. (웃음)”
청약통장 없이 살기. 부드러운 탈주다. 김융희 선생은 일상의 평균치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면서 살아가길 마다했다. 더 많은 ‘돈’을 혹은 더 넓은 ‘집’을 욕망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었다. 나를 부유하게 만드는 집이 아니라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좋은 집’을 택했다. 더 없이 간소한 것, 더 없이 조용한 것, 더 없이 가벼운 것을 추구했다. 텅빈 충만 속에서 하루하루를 성찰하고 만끽했다. 그리고 그렇게 채워진 삶의 풍요는 해처럼 주위로 넘쳐흘렀다.
“경동교회를 50년 간 다녔어요. 강원용 목사에게 사회운동가의 실천을 배웠지요. 그래서 저도 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고향사람들과 만나면 도토리 키재기처럼 만날 돈 자랑만 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가 나섰다. 좋은 강사를 초빙해 얘기 나누는 모임 ‘천관포럼’을 만들었다. 고향에 마을도서관 짓는 일에도 앞장선다. 고향에 보낼 책을 추려 상자에 담아놓았다. 매년 땅에서 거둔 것들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냉이며 배추며 채소들은 몇 집이 먹을 만큼 넉넉히 심어 도회의 지인들에게 소포장 택배로 부치곤 한다.
다 같이 적극적인 자세로 열린 만남의 공동체적 삶을 이루면서 상대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사는 삶의 지혜가 절실하다. – 여강만필 ‘변화의 세상에 가로지르는 머무름으로’
# 삶
오랜 시간 짬짬이 퍼준 사랑은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부터인가 벗들이 너도나도 선물을 보내왔다. 직접 담근 막걸리를 대주는 양조장 친구, 고가의 양장본 책을 척척 선물해주는 큰 손 친구, 좋은 글과 더운 술로 적적함을 달래주는 문인 친구가 하나둘 생겨났다. 자연과 사람에 대한 신실한 관계맺음이 또 다른 사랑, 더 환한 웃음을 생산했다. 이것이지 싶다. 소년 같은 웃음을 간직한 김융희 선생. 니체의 말대로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했으니 아마도 그의 젊음의 비결은 나눔이 아닐까.
좋은 사람, 좋은 얘기, 좋은 경치. 삼락을 누리다 보니 어느 새 해질녘이다. 편집팀은 서울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김융희 선생은 대야에 담가 놓은 냉이를 건져 까만 봉지에 담아 손에 꼭 쥐어준다. 시간이 있었으면 한 봉지씩 캐서 다 가져가면 좋을 텐데 차가 막힐까봐 잡지도 못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퍼주길 좋아하는 사람은 뭐라도 챙겨 주지 않으면 왠지 허전하다. 관계는 노릇이 아니라 버릇이니까.
“나중에 애들 데리고 또 올 게요.” 가는 이도 버릇처럼 서툰 이별의 말을 남긴다. “애들이 오면 무척 좋아해. 자주 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멀어서 자식들도 오기가 쉽지 않으니까…” 여기가 ‘유배지’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 김융희 선생. 시장터의 소란을 피해 산골마을로 자발적 유배를 택한 그이지만 어쩐지 뒷등을 보이기에 죄스러운 마음이 인다. 오후 5시면 사모님이 오신다니 그나마 발걸음이 덜 무겁다.
“당신을 위해서 립스틱 하나 안 바르고 천 원 한 장 안 쓰면서 평생 애들 키우고 살림을 도맡았다”는 이 시대의 어머니. “집사람의 고마움을 지금 알게 됐으니 이제 깨우치는 건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다”는 우리들의 아버지. 돈 버는 일보다 책과 사람에 마음을 두고 살아온 남편과 그런 반려자를 큰 사랑의 지구력으로 품어준 아내. 억새풀처럼 늙어간 노부부의 오붓한 저녁밥상에는 무엇이 오를까… 차창 밖으로 가물거리며 빛나는 풍경들. 꽃버선 신은 그의 발걸음은 부드러운 갈색의 흙길 위에서 희미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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