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본의아니게 반대의견에 부딪힌다. 일상적 사건이든 학문적 이론이든 그들을 설득해서 자기의 편으로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소통무용론은 아니다. 소모적인 일이란 얘기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묵묵히 그 길을 가는 것이 최고의 설득방법이다. 나중에는 여러 의견중에 더 큰 진실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절로 자리를 찾는 것 같다. 프로이트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 이전에는 세상에 없던 이론이다. 새로운 이론이 정식 학문으로 정착하기까지 비판과 저주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프로이트는 굴하지 않는다. 심지어 새로운 학문에 대한 이러한 일체의 거부 반응을 정신분석학의 ‘저항’ 이론으로 설명한다. 저항은 상담과정에서 환자가 기억의 회상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매우 다양하고도 세련된 형태로 드러난다. 저항은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만큼 정신분석에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이트가 반대파들의 행동을 ‘저항’으로 규정한 것은 정신분석 반대에 정신분석으로 맞선 것으로, 최초의 정신분석을 시도한 행위이다.
“스스로 논쟁을 멀리하고, 나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점차 내게로 모여들었을 때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도록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분석 작업에 가해졌던 저주는 그 후로 제거되었다.”
정신분석에서 여러 갈래의 분파가 생겨났다. 어떤 사람은 성의 문제에 반대하고, 어떤 사람은 무의식에 반대했다. 이들에 대해 프로이트는 ‘절반 혹은 4분의 1짜리 추종자들’이라 부른다. 정신분석의 전체구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오늘날 이미 하나의 단일 체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누구나 자기 임의대로 어느 한 요소를 끄집어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 대표적 이탈운동이다. 이것은 정신분석과 거의 관계가 없다. 프로이트가 성적본능을 강조했다면 아들러는 권력본능을 내세웠다. 개인심리학은 인정욕구, 열등감 과잉보상, 여성의 남성적 성향 지향 등의 모티프를 지적한다. 서점가의 출간 봇물을 이루는 ‘서른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심리학초콜릿’ ‘심리학이 연애를 말하다’ 류의 책들은 거의가 대인관계 처세론을 다룬 개인심리학에 근거한 것이다.
개인심리학으로는 동성애자, 시간자, 히스테리 환자, 폐쇄 강박환자 등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한다. 정신분석에서는 마조히즘, 무의식적인 처벌욕구, 신경증적인 자기 손상 경향성 등을 ‘2차적 질병이익’이라고 본다. 즉, 현실 세계가 자신들의 욕망 충족을 어떤 방식으로든 허용하지 않을 때, 즉 <좌절> 때문에 질병에 걸렸다. 증상들은 결국 인생에서 상실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기보존본능과 반대의 본능충동이다. 그런데 개인심리학은 그 같은 ‘복잡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모든 사람을 짓누르는 성문제조차 단칼에 제거해 버린다. 오직 사람들이 그것으로 삶을 편안하게 만들기 원하는 어떤 술책을 발견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이론들이다.
또 다른 분파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융에 대한 비판. 융은 개인의 과거적 영향을 하찮게 생각하고 신경증 유발 원인을 오로지 현재적 동기나 미래를 향한 기대에서 찾는다. “그것은 지혜의 학교에는 어울릴지 모르지만 더 이상 분석이라 할 수 없다.” 랑크의 경우는 출생 시 불안 체험이 이후 모든 신경증적 장애의 맹아라는 인식에 준한다. 분석 작업을 하나의 경험적 영향에만 제한하는 오류를 범한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각자가 정신분석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모티프들 중 단 한 조각, 권력 본능, 윤리적 갈등, 어머니, 성기에 대한 관심 집중 등 제 나름대로 집어 들고 이를 근거로 학파를 형성해 독립해 나가는 것이 정신분석 분파운동의 일반적인 양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