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뜻이 통하여 서로 오해가 없음 사전적 정의는 간명하다. 그런데 현실에서 ‘소통’은 복잡다단하다. 생각이 서로 다르더라도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에서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에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일단, 소통은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가슴에 참을 인자를 많이 비축해두어야 한다. 괴리, 상호몰이해, 의사소통 단절의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고된 시간과 체력의 싸움이다. 그러니 직업적인 소통전문가가 아닌 바에야 소통다운 소통이 힘들다. 먹고 사는 일 제쳐두고 ‘소통’의 지난한 정신노동에 정기를 다 빼앗기며 살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다.
'모든 소통은 단절이다'라는 말이 있다. 백분토론을 봐도 그렇고 주변 공동체에서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그렇고, 소통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은 자기 인식의 지평을 넘지 못한다. 삶의 조건과 경험과 신체가 바뀌기 전에 생각이 달라지는 법은 없다. 그러니 아무리 얘기를 해도 결국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각자 길을 가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완의 소통으로 인해 서로의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이전보다 더 멀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소통 좌절의 경험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소통이 지겨워졌다. 소통을 포기했다는 편이 맞겠다. 그 시간과 그 에너지를 다른 생산적인 일에 투여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실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소통'을 버렸다 소통에 대한 오랜 미련을 놓았다. 근데 왜 이 책에 손이 갔을까. 머리로는 버렸지만 몸이 소통을 원했던 걸까. ‘소통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던 맘은 어디가고 <대한민국 소통법>을 단숨에 읽었다. 운동장 열 바퀴 돌고 생수통을 들이키듯이 벌컥벌컥.
이 책을 보면서 소통 무기력증으로 지쳐 있던 몸이 조금씩 살아났다. 희미하던 맥박이 빨라짐을 느꼈다. 강준만은 “우리는 지금보다는 소통을 더 잘할 수 있지 않느냐는 욕심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강준만은 주로 한국 정치판에 빗대어 설명했지만 나는 최근 '소통포기선언'을 내려야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며 쏙쏙 이해했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나 정치판이다.) 왜 소통이 어려웠는지 알았으나, 솔직히 그것이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강준만의 소통클리닉^^에서 배운, 소통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 중 세 가지를 추려보았다. 강준만의 글과 그가 인용한 사람들의 글을 재구성했다.
1. 맥시멀리즘 먼저 한국사회의 갈등을 필요이상으로 악화시키는 최대 요인 가운데 하나로 ‘맥시멀리즘’을 꼽는다. 맥시멀리즘(maximalism 최대주의)은 큰 것이 아름답다는 심미적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는 예술적 사상적 경향을 말한다. 이는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 간의 이론적 결속력을 공고히 해주는 반면, 이성적 비판에 열려 있지 않은 폐쇄적 사고 체계를 낳는다. 예컨대 레닌이 이야기한 100가지 중에서 95가지만 수용하고 5가지를 비판한다면, 그는 이미 레닌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 ‘최대주의’의 지적풍토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같은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조차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서로 상대방에 대해 ‘수정주의’니 ‘교조주의’니 하는 손쉬운 딱지를 붙이고 매도해버리는 정파적 논쟁만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유리된 ‘이념주의’ 경향은 ‘최대주의’를 더 재촉한다. 누가 더 현실을 적절히 분석하는가에서 누가 더 논리적 일관성이 있는가로 이론의 가치가 전도된다.
2. 의식의 경로의존 공동체화된 집단에서 자유로운 의견 제시가 매우 어렵다. 내로라하는 헌신파이면서도 조금 새로운 생각을 이야기할 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자면’ 이라고 단서를 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집단적 분위기가 경직돼 있다. 인터넷은 그런 내부 검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조금만 주류의견과 달라도 “악플이 많이 붙겠지만”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건 그들이 그만큼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형성된 ‘노선의 경로’라는 게 있는데, 공동체화된 동아리에서 그걸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3. 집단사고 집단사고는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이다. 쉽게 말하면, 낙관론에 집단적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현상이다.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방향으로만 생각을 모아가는 것이다. 이 때 구성원들이 품고 있을 수 있는 의심이나 회의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통념에 도전하는 정보는 배제되거나 오류로 합리화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토론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옳다는 신념을 공고히 하게 된다. 집단사고가 행해지는 곳에서 토의는 사람들의 생각을 여는 효과를 낳는 게 아니라 닫아버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 인터넷은 정보를 임의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견해를 가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정보를 공유하면 할수록, 그들의 견해는 더욱 더 극단화된다. 인터넷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 집단 간의 차이를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
상처, 성찰, 그리고 소통 우리는 아주 편리한 이중기준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남에게 상처를 줄 때는 둔감해지고, 자신이 상처를 받을 때는 민감해지는 이중기준이다. 상처의 사회학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상처를 준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언행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각자 감수성도 다르거니와 상처받기 쉬운 부위도 다르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땐 자신이 알게 모르게 남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기하는 게 좋다. “분노, 상처, 고통에 빠져들지 말라. 그것들은 당신의 에너지를 훔쳐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
소통을 위해선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자기정당성을 신앙처럼 확신하면서 남을 향해서만 소통을 외쳐서는 소통의 출구가 열리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한발짝 떨어져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향한 공격의 언어가 자신에 대한 성찰을 수반하지 못할 때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진실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해버린다.”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과 남에 대한 관대함을 키울 때 성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찰성을 갖추었을 때 옳고 그름, 절대선 절대악 등 이분법적 규정이 훨씬 덜해지고 피해의식과 방어의식,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대안을 찾을 수 있는 힘은 성찰성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