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란 무엇인가. 아니, 어떤 관계가 친구인가. 어느 한 시절을 인연으로 친구가 되긴 쉬워도 오랜 세월 ‘좋은 친구’로 지내기는 어려운 거 같다. 삶의 조건, 가치관 등 사람은 계속 변하니까.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같은 신체 상태와 감정의 파장으로 합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친구는 이심전심 잘 통해야하지만 너무 똑같고 마냥 편하기만 해도 재미없다. 나를 보는 거니까. 거울을 쳐다보고 독백하는 '거울놀이'는 얼마 못가서 싫증나게 마련이다. 무릇, 벗이란 다양한 스펙트럼의 세계를 열어주어 서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 존경할 만한 면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존재를 열어 밝히고 삶을 고양시켜주는 고마운 존재가 벗이다.
니체는 이를 창조하는 벗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벗을 중시했다. 인류의 역사와 대결하면서 도덕과 이념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철학을 개진했던 니체가 ‘벗’에 대해 치열한 사유를 전개한 것은 의외였다. 미래의 인류 사이를 서성이며 고독을 자처하고 현세 사람들을 비난하던 천하의 니체 아니던가. 자신이 쓴 책은 300년 후에나 이해될 것이라며 책이 팔리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던 도도한 니체이기에 ‘벗’은 필요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는데 아니었다. 니체에게는 “벗에 대한 우리의 동경,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누설자”이며, 벗은 또한 위버멘쉬를 낳는 최고의, 유일한 수단이다.
위버멘쉬는 속세와 떨어져 저 멀리 존재하는 우월한 한 개인의 표상이 아니다. 각자의 내면에 잠들어 있기에 누구나 자기를 극복하여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옆에서 '나를 초극하도록' 독려하는 벗의 잔소리와 구박과 자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심지어 너희는 벗의 ‘넘쳐 오르는 심장’을 만들라고, 벗에게 위버멘쉬를 향한 동경의 화살이 되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벗은 항상 나와 자아 사이의 제3자인데 살아가기 위해 나로 하여금 나를 극복하게 하고 극복되게 하는 자”로서 나 자신이 너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사고의 균형을 잃고 너무 심한 삽질로 땅 파고 드러누워 흙 덮어 인식의 무덤 만들기 직전에 구해주는 게 벗이다. 정리하자면, 좋은 벗이란 창조하는 벗. 서로의 미래를 임신 시키는 섹시한 벗이다.
좋은 벗은 단순히 물리적인 시공간을 공유하는 차원을 넘어 꾸준한 배움과 실천의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그 수월한 방법론의 하나가 꼬뮨이다. 서로에게 선물 같은 벗이 되고 좋은 알과 삶을 이루기 위한 인문학적 실험이 행해지는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있고, 장미와 주판(장주)이 있다. 장주는 철학자 김영민이 꾸리는 인문학 공동체다. 김영민이 이 실천을 토대로 책을 썼다. ‘인문연대의 미래형식 - 동무론’이다.
김영민의 좋은 세상에 대한 윤리적 실천적 대안은 ‘동무-되기’다. 서문에서 ‘동무’라는 새로운 관계를 생활양식의 슬기와 근기, 그리고 온기로써 살아내지 못하면 이론도 제도도 상상도 공허하다는 실감이 그 바탕이 됐다고 고백한다. 우리 인류에서 사회주의같이 세상이 일시에 변하는 전체적인 기획은 실패했다. 인문적 급진성만으로는 ‘지는 싸움’만 하게 된다. 대중의 각성. 즉, 존재자들의 삶의 가치 전도가 요구되고, 이것은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며, 좋은 벗이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니체부터 김영민까지 말하고 있다.
관계를 일컫는 다양한 말이 있다. 친구, 동무, 연인 등등. 김영민은 이를 정밀하게 가른다. <친구> 무엇보다도 ‘듣지’ 않는 관계를 가리킨다. 그들은 끊임없이 잡담과 수다와 고백을 일삼으며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회집하고 추억을 채색하지만, 응당 괄목상대해야할 그 친구들의 외부성과 타자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동아리의 낡은 어휘와 판박이처럼 굳은 표정과 체계화된 공통의 희망만을 고집할 뿐, 변화한 시숙의 무늬와 그 가파름에 별 관심이 없다.
<동무>는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통해 ‘위험한 삶’을 일상화하고, 그 위험이 유혹하는 전염의 자장 속, 그 열린 동무의 지평 앞으로 나를 호출해서 내 삶의 양식을 그 근간에서 뒤흔들어보는 재조합, 재구성의 실험이며, 해체와 갱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동무로서의 나는 끝없이 ‘넘어가는 존재’ ‘전염시키는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표준화한 위성들을, 그들의 백귀야행 하는 인정투쟁과 냉소와 가족주의를 섭동시키는 존재로 부름받는다.
<연인>은 어떤가. 그들은 습관처럼 마음속의 가상적 지점을 지적하면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려 하고, 또 습관처럼 마음속의 열정과 그 밀도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종종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이 불어난 잉여의 감정을 소비하지 못한 혼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자신의 심리로 만든 거울방 속에 좋기만 한 타자로서의 연인을 제 마음대로 포획한 사건이 사랑이라는 헛된 이름이다. 그 연인은 이미 연인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방으로부터 영원히 외출하지 못하는 자기-영상에 불과한 것이다.
김영민의 동무는 니체의 벗에 가깝다. 니체의 벗과 김영민의 동무가 겹치는 지점은 바로 ‘위험함’이다. 김영민도 ‘동무는 위험하고 서늘한 관계’로 규정한다. 전쟁을 포기했을 때 위대한 생도 포기한 것이듯 고분고분한 타자, 부드러운 수용성으로서의 타자는 동무가 될 수 없다. 심지어 니체는 벗에게 딱딱하고 불편한 야전침대가 되어주라고 말했다. 벗이 힘들 때 마냥 주저 앉게 하지 말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 떠날 수 있도록 하라는 의미다.
동무관계의 진정성은 한 단계의 ‘지양’을 겪으면서 새로운 승화를 준비한다. 이것이 니체로 치자면 우정의 생성을 위한 몰락이다. 김영민은 한 번도 제대로 ‘남’이 되어보지 못한 관계의 기억은 완악하고 집하고 추잡스럽다고 말한다. 온갖 연줄로 얽혀든 사회 속의 우리는 ‘남’이 되지 못했으므로 ‘나’가 되지 못한 채, 공동의 침체를 도덕이라고 부르고, 공동의 나태를 평화라고 부르며, 공동의 타락을 질서라고 부른다. 이 부분은 개개인이 서로를 모방하며 무리짐승으로 하향평준화 하는 현대인을 심하게 비판하던 니체스러운 발언이다.
연암 역시 니체와 김영민과 비슷했다. 연암의 교우관도 친밀감이 아닌 서늘함에 기반한다. 벗을 사귐에 있어 '틈'을 가장 중시했다. "이미 친하면서도 더욱 거리가 먼 듯 대하면, 더할 수 없이 친해지게 된다"고 연암은 말했다.
김영민은 ‘동무’의 서늘한 관계로의 진화를 위해서 ‘술’에 대한 이야기도 철학적으로 풀어간다. 낭만적 자유주의를 넘어서라는 것인데, 그가 오후 6시 이후 선진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선 최재천 교수의 ‘남자들의 밤무대 활동을 줄여야 국가경쟁력이 강화된다’던 의견과도 맞물린다.
<동무론>은 고상하면서도 엉뚱하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고유의 언어가 생동한다는 점에서 시집같이 아름다운 철학서다. 구성도 문체도 언어도 특이하다. 또 한 페이지에 철학자 대여섯 명의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인용된다. 관념어로 전개되어 딱딱하고 난해하고 읽기가 녹록치 않으나 곱씹어 읽으면 단물 나오며, 책 후반부로 갈수록 그만의 필치에 빠져든다.
동무. 서늘하고 위험한 관계를 맺으라는 말은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얼핏 내 친구와 연인 등 인간관계가 전부 동무관계로 된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싶기도 하다. 그치만 서늘함 위의 뜨거움이란 게 있다. 그것을 일러 연암은 "더할 수 없이 친해지게 된다"고 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관계가 한번 동무이면 영원한 동무가 되는 건 아니다. 친구였다가 어느 순간에 동무가 되고, 동무이다가 어느 순간 연인이 되고, 어제의 연인이 오늘의 동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타자를 향한 감수성 훈련을 게을리 말고, 극진함으로 밀고 나가라고 우리의 지향은 동무가 되어야 한다고, 이 멋쟁이 철학자는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