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클론의 원래원래 강원래입니다” 요즘 그의 인사법이다. 강원래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야동순재’ ‘버럭범수’처럼 ‘원래원래’가 된 것.
“사람들은 저를 보고 이렇게 말해요. 강원래라서 장애를 이겨내기 더 쉬웠을 거라고. 팬들도 있고, 아내도 있고, 구준엽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예전에도 있었죠. 2000년 사고를 당하고 2005년도에 클론의 새 앨범을 내기까지 시간은 오로지 자기와의 싸움이었어요. 부정-분노-좌절-수용-복귀의 5단계를 지나 다시 강원래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춤, 춤은 자신감, 자신감은 연습
이름의 힘일까. 고통의 긴 ‘강’을 지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강원래. 세계 최초 휠체어 댄스를 선보이며 멋진 복귀에 성공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KBS3라디오 ‘한낮의 노래선물’과 KBS1TV '사랑의 가족' 진행자, 클론댄스 학원장, 꿍따리 유랑단장, 한중대학교의 춤과 대중예술학과 전임교수 등 일인다역을 충실히 해낸다. 뿐만 아니다. 최근 소녀시대와 함께하는 '삼성 하하하 2009 캠페인'의 안무를 맡기도 했다. “내가 한 걸 티내려고” 즐겁다는 뜻의 수화를 넣는 등 참신한 시도를 곁들였다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춤만 생각하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는 강원래. 그는 데뷔 이전부터 알아주는 춤꾼이었다. 89년도 유명한 클럽의 춤대회마다 1등을 휩쓸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양현석과 이주노가 그의 뒤를 이었다는데. “그래서 요즘도 방송국 로비에서 현석이를 만나면 농담 삼아 “야 2등!” 이렇게 부른다.”며 악동처럼 웃는다. 클럽을 평정했던 ‘스트리트 댄스의 귀재’는 화려한 그 시절을 회상하며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타고난 끼와 주체 못할 열정을 발산하며 방송국에 진출한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낸다.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 신승훈의 ‘로미오’, 박진영의 ‘날 떠나지마’ 등 90년대 히트곡 안무는 거의 그의 몸에서 나왔다. 이후 고교동창 댄서 구준엽과 ‘클론’을 결성하고 ‘꿍따리샤바라’ 대박 히트곡을 내며 인기절정의 상승 가도를 달렸다.
“운이 좋았죠. 제 욕심도 컸고요. 그 분야에서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어요. 제대로 한번 해보자 싶었죠. 춤은 '자신감'이거든요. 무대에 올라갈 때까지 무대 밑에서 천 번, 만 번, 수억 번을 연습하고, 무대에서 딱 한 번밖에 안 하는 것. 그 한 번을 위해 수많은 연습을 하는 것. 저에게 춤은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원점에서 출발하려면 먼저 인간이 돼야죠.”
타고난 소질, 다부진 열정, 야심찬 도전으로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강원래는 춤의 날개 달고 힘차게 비상하던 중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산이 높았던 만큼 골도 깊었다. 두 다리를 잃었다. 최고의 춤꾼에게 다리를 빼앗은 운명은 가혹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지?’ ‘평생 어떻게 장애인으로 살아가지?’ 하지만 죽을 용기도, 그렇다고 살 자신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예민하고 까칠해졌다. 하루하루가 온통 검은 페이지였다. 하지만 자학은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한번은 휠체어에 앉은 그에게 고등학생들이 사인을 받으러 왔다. “사인? 내 사인이 니네가 왜 필요해?” 그의 싸늘한 눈초리에 학생들은 슬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등 뒤로 이런 소리가 들렸다. “야, 저 사람 자격지심 있나봐...”
“정신이 번쩍 났죠.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모든 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긍정’이 필요했다. 긍정이란 본디 고통에 대한 긍정인 법. ‘평생 하바신 마비 1급 지체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강원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황폐해진 마음 밭을 갈고 사람 됨됨이부터 가꾸었다.
“기본부터 시작했죠. 약속을 잘 지키고 인사를 잘 하려고 노력했어요. 장애인이 되고부터는 남보다 먼저 출발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꼭 일찍 나섰죠. 장애인이라고 기대고 이해를 바라고 자꾸 의존적이 되면 안 되니까요.”
아무리 힘들어도 활짝 웃었다. 내가 웃자 세상도 함께 웃었다. 주변이 밝아졌다. 죽었던 세포도 꿈틀꿈틀 다시 살아났다. 여기저기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는 빈도가 잦아졌다. 휠체어도 능숙해지고 운전도 가능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그림자처럼 따르는 동정어린 시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매사에 감사하는 소중한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멋진 남자 ‘클론’ 강원래의 당당한 눈빛과 넘치는 활력을 되찾아 갔다. 그러자 슬슬 춤 생각이 났고 클론의 컴백으로 이어진 것이다.
꿍따리유랑단, 휠체어 타고 세계를 무대로
인생 2막을 시작한 강원래의 화두는 ‘춤과 나눔’이 됐다. 춤 전도사 외에도 희망나누기에 주력한다. 2008년도에 재미난 일을 꾸몄다. 음악을 듣지 못해 진동으로 춤을 추는 청각장애인 댄서, 안면장애인 가수, 시각장애인 공연기획자 등이 참여하는 장애인 전문 공연단체인 ‘꿍따리유랑단’을 창단한 것. 각계각층의 ‘끼’있는 장애인으로 구성된 이 유랑단은 전국의 소년원과 보호 관찰소를 돌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요즘 청소년 90%가 연예인이 꿈이잖아요. 그런데 장애청소년은 80%가 사회복지사가 꿈이에요. 왜? 주변에 그거 하는 사람밖에 못 봤으니까요. 연예인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요. 장애청소년이 끼를 발휘하고 열정을 펼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궁극적으로 꿍따리유랑단의 휠체어는 한반도를 넘어설 계획이다. 눈물과 감동과 재미와 박수를 안겨주는 ‘맘마미아’처럼 크고 멋진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세계적인 극단으로 키우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래서 요즘은 틈나는 대로 뮤지컬을 보러 다니고 클럽도 부지런히 출입한다. 현장에서 공연 트렌드도 배우고 춤의 감각을 익히기 위한 노력이다.
또한 라디오와 TV방송활동도 열심이다. 강원래에게 방송국은 이제 더 이상 적자생존의 치열하고 매정한 ‘정글’이 아니다. 소외되고 아픈 이들에게, 자신처럼 중도에 장애인이 된 사람에게 ‘나도 강원래처럼 멋지게 살면 되겠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본부다.
“요즘 자살이 많은데, 사람이 목표가 분명히 있을 때는 자살은 하지 않아요. 내가 뭘 할지, 한 달 후에 뭘 할지 다 계획이 있고 할 일이 있는데 왜 죽어요. 시련이 닥쳤을 때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출발하기 위해선 ‘기본’에 충실해야죠.
내가 진정 무엇을 바랬는가? 돈인가, 춤인가? 가슴 설렜던 초심을 잃지 않고 일에 대한 욕심을 갖고 실력을 쌓고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갖는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어요.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