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고로 나는 골프를 사랑한다.' 한국시각장애인 최고의 여자골퍼 박영해 선수의 고백이다. 바른 자세와 집중력으로 공을 치는 성취감, 초록빛 융단을 맘 편히 거니는 해방감도 좋지만 중간 중간 ‘난관’을 극복하는 재미가 크다고 한다. 평소 도전을 즐기고 잘 웃는 자신에게 골프가 “아주 딱!”이라는 그녀의 골프 사랑이야기.
“영해는 골프랑 참 잘 어울려” 사람과 운동도 궁합이 있는 것일까. 골프를 시작한 뒤로 주위에서 그런 얘기를 자주 듣는다는 그녀를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원래는 운동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2년 전 지인의 소개로 골프를 시작했다. 골프는 고정된 공을 쳐서 진행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스윙궤도만 몸에 익힌다면 공을 치는데 문제가 없다. 시작장애인에게 더없이 좋다는 말에 조심스레 참여한 것.
헌데 첫 관문부터 녹록치가 않았다. 자원봉사로 나선 강사에게 매주 두 차례 골프강습을 받았으나 골프는 ‘신사의 스포츠’라며 처음 한 달 간 빈손으로 예절과 에티켓 교육만 가르쳤다. “하루 종일 3시간 동안 서있으려니 다리랑 허리도 아프고 어서 공은 치고 싶고 조바심은 나는데 가르쳐주지는 않고 아주 혼났죠.”
오죽하면 그 때 5명이 골프를 시작했으나 한 달이 지나자 혼자만 남았다. 호된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드디어 골프채를 잡았다. 왠지 그냥 막 쳐도 공을 잘 칠 것 같았던 기분도 잠시. 공을 제대로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도리 없다. 발과 발 사이에 공을 놓고 치는 일명 ‘똑딱볼’부터 시작해서 골프채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치고 또 쳤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면서 점차 골프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세상에 이런 게 다 있구나!” 감탄했다. 더군다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우울함에 젖어들 즈음 골프를 만난 건 더없는 행운이었다. 골프가 너무 재밌고 골프 치는 사람들과도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골프 치느라 잠을 못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오히려 온몸에서 엔돌핀이 솟았다.
“골프를 시작하고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죠. 시작할 땐 반신반의했는데, 골프는 눈으로 보고 공을 맞추는 게 아니라 정신력과 자세로 친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서포터의 정보를 듣고 몸에 익은 대로 스윙을 해 호쾌한 샷이 나올 땐 쾌감을 느끼죠.”
시각장애인 골프는 두 명이 한 조를 이룬다. 골퍼들은 수백 번 수천 번 스윙을 하고 그 감각을 유지하는데 애쓰고, 서포터들은 시각장애인 선수가 올바른 자세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공의 위치와 필드의 상태를 말해준다. 그밖에 경기방식이나 로컬룰은 비장애인 경기와 똑같다. 단, 비장애인경기와 달리 벙커나 해저드에서는 클럽을 지면에 대고 쳐도 된다. 골프는 스포츠 중 유일하게 장애인이라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실력을 겨룰 수 있는 종목이다.
골프는 인생. 공 빠지면 쳐내면 되고
골프 시작 후 석 달 만에 드디어 필드로 나갔다. 한일친선대회에 참가했는데 “아무 것도 모르고 18홀을 돌았다”고 회상했다. 그 때 신선한 녹색 공기를 머금고 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골프를 치는 즐거움에 더욱 매료되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실력을 쌓아간 그녀는 제1회 베어크리크배 시각장애인골프대회 여자부분 1위에 입상했다. 2회에도 1위를 차지하는 등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나, 지난 5월 개최된 제3회 대회에서는 2위에 그쳤다. 아들 승민군의 초등학교 입학으로 학부형 노릇에 바빠 한동안 연습을 소홀했던 결과다.
“1홀부터 9홀까지 도는데 공이 벙커에 한 번도 안 빠진 적이 없어요.(웃음) 예전만큼 스윙거리도 안 나오고요. 그래서 ‘역시 난 노가다 체질이야’ 하면서 열심히 쳤죠. 저는 순탄하게 가는 거보다 난관을 극복하는 데서 성취감을 느껴요. 제일 자신 있는 것도 벙커샷이거든요.”
공이 벙커에 빠졌을 때 마다 백발백중 한 번에 ‘on green' 한다는 ‘벙커샷의 여왕’ 박영해 씨. 골프는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살이와 매우 비슷해 골프를 통해 인내력과 정신력을 기른다고 강조한다. 라운딩이 잘 될 때도 있지만 공을 빗맞혀 벙커나 물에 빠질 때도 있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난관에 처했을 경우 그녀는 “잘 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정신을 집중하여 탈출했을 때의 성취감은 골프의 가장 큰 매력이다. 또한 장애물에 대한 염려 없이 마음 놓고 무한히 펼쳐진 초록융단을 밟는 기쁨 또한 골퍼만의 혜택이다.
100타의 꿈을 향해 '오늘도 쿨샷'
시각장애인 골퍼로 살아가는 어려움도 있다. 약시인 그녀는 혼자서 연습이 가능하지만 전맹일 경우 연습 때 서포터의 도움이 필요하다. 서포터가 늘 오 분 대기조처럼 기다리는 게 아니므로 연습시간 조정이 쉽지 않다. 또한 정규라운딩 18홀을 폼 나게 돌고 싶은데 돈도 많이 들고 하루를 비워야하므로 시간적 경제적 부담이 크다. 그래서 “대회를 치러야만 18홀을 돈다”는 푸념을 선수들끼리 늘어놓기도 한다고. 하지만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고, 단점은 장점과 통하는 법. 이렇게 ‘벽’에 부딪힐 때마다 단단한 벽에 ‘문’을 만들어주고 손 내밀어 이끌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골프를 치면서 아직은 좋은 세상이란 걸 많이 느꼈어요. 베어크리크 골프장에서는 월요일 오후에 무료로 필드를 공개하고요. 남을 도우려는 서포터들도 참 많아요. 중고장비를 후원해주는 분들도 계시고요. 받은 사람만이 베푼다고 하잖아요. 내가 받으니까 다른 무언가로 되갚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점이 좋더라고요.”
박영해 씨는 요즘도 주 2-3회는 골프연습장을 찾는다. 청치마와 분홍 셔츠를 입고 앳된 보조개 웃음을 지으면서도 바위처럼 단단한 자세로 통쾌한 샷을 날리는 그녀. 라이벌이 있는지 묻자 “남자선수 모두”라며 “남자선수를 앞서 갈 때 기분이 좋다”고 귀띔한다. 현재 기록은 120타. 어서 100타 이내에 들어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도 아무런 불편 없이 라운딩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힌다. “어려울수록 힘이 솟고 잘 안 될수록 웃게 된다”는 씩씩한 영해씨의 꿈은 머지않아 이루어지리라.
>> 후기 박영해 씨가 처음 골프를 배울 때 5명이 시작했으나 '한달간 계속되는 단순 반복훈련'에 지쳐서 다 그만두고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 4명 다 남자 아닌가요?" "맞아요!" ㅎㅎ 그래도 남자골퍼들이 아주 잘 해서 부럽다며 영해씨가 그런다. "남자들은 얼마나 좋아요. 밥 먹고 골프만 치면 되잖아요. 저는 일도 하고 아이도 보고 살림도 하고 골프도 쳐야하니까......" "맞아요!" ㅠㅠ 이번엔 내가 맞장구쳤다. 영해씨는 그럴수록 열심히 해서 남자선수를 이기고 싶다고 한다. 우리는 어딜가나 남자-여자의 삶은 비슷하다는데 공감하고 슬프고도 유쾌한 수다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