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여행하면서 살고 싶다”고. 그 꿈이 이뤄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이 되고서다. 이십대 후반 유전질환으로 휠체어를 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길을 떠났다. 덕수궁부터 인도까지 휠체어로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문턱은 깎고 벽엔 문을 냈다. 민원을 넣어 곳곳에 ‘길’을 냈다. 이제는 동료들의 손 맞잡고 떠나는, 휠체어 여행생활자 전윤선씨 이야기다.
여기는 서울대공원 장미원. 한 폭 상상화 같은 풍경이다. 하늘은 무구하게 파랗고 나무는 촉촉한 초록이다. 형형색색 장미꽃이 무리지어 만개했다. 꽃의 크기가 한뼘도 넘는 백장미 아이스버그, 분홍색 계통의 핑크피스, 붉은색 장미의 오클라호마, 보라색 계통의 블루문, 황색계통의 헨리폰다 등등 이름만큼이나 향기도 매혹적이다. 꽃대를 살포시 끌어다가 코에 대고 향기를 맡아 보는 전윤선 씨. “역시 장미꽃은 향기가 좋다”며 꽃처럼 웃는다.
“휠체어 타고 여행하면 이런 게 좋아요. 꽃이며 벌레까지 찬찬히 볼 수 있으니까요. 서서 다닐 때는 앞만 보고 걸으면서 휙휙 지나갔거든요. 또 조금만 걸어도 다리가 아프니까 포기하고 주저앉았는데 휠체어로는 아무리 멀리 가도 힘들지가 않다니까요.”
그에게 전동휠체어는 각별하다.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튼튼한 다리이자, 지친 몸 쉴 수 있는 작은 집이자, 멀리까지도 데려다주는 고성능 세단이자, 언제나 곁을 지키는 훌륭한 충견이기 때문이다.
휠체어로 2주간 인도 사막 횡단
그는 원래부터 여행 마니아였다. 고건축물에 관심이 많아 전국 방방곡곡 누비며 문화유적답사를 다니고 등산과 배낭여행을 즐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직장을 다니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던 중 이십대 후반에 유전질환이 발병해 걸을 수 없게 됐다. 그 때 찾아온 가장 큰 절망감은 “이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온 몸에 힘이 빠져 걷다가 휙 넘어지고 골절되면 장애가 급속도로 진행됐으니, 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혹여 여행을 하더라도 남편의 차를 타고 휙 갔다가 휙 돌아오는 ‘바람 쐬기’ 수준이었다. 본디 바람처럼 떠돌고 싶었던 그에게 그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가족에 짐만 되고 여행도 못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고통과 혼란을 헤매던 어느 날. 동료의 휠체어를 타보았다. 편했다. 앉아서 보는 눈높이가 새로웠다. 신비로웠다. 팔에 힘이 없어 수동휠체어를 밀지 못하니 전동휠체어를 탔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 기반시설이 취약해 마음껏 다닐 수는 없었으나 지하철 타기부터 한 가지씩 도전해보았다. 그즈음 동료상담 등 장애인 인권활동을 시작하면서 ‘장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2005년도에 환경운동가 친구를 따라 인도를 갔어요. 도착했을 때 느낌은 폐허, 그 자체였죠. 거리에 사람과 소와 오물이 뒤엉켜 있고 장애인 통로는커녕 ‘휠체어’라는 걸 처음 본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정도였어요. 그 열악한 환경에서 2주간 사막횡단을 하고 두 달을 보냈어요. 인도를 다녀왔더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우리나라도 여행할 수 있겠구나!”
여행지마다 민원 넣어 장애인 시설개선
일단 떠났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지고 상황을 탓하면 영원히 나에게 길은 영원히 생기지 않는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 길을 냈다. 정동진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경사로도 앉을 자리도 없었다. 역무원에게 부탁해서 등에 업혀 기차에 탔다. 유명 관광지의 식당, 숙소에도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적었다. 그럴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철도청 인권위원회, 지자체 등 관계기관에 시설개선을 요청하는 민원을 넣었다.
태국, 호주, 일본, 영국 등 국경도 넘나들었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인이란 자각이 안 들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선진국의 여행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장애인 시설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개선의 지향점을 잡아나갔다. 수년 간 노력 끝에 그가 다녀오는 곳마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났다. 문턱은 깎이고 벽에는 문이 생긴 것이다.
전윤선 씨는 이 같은 소중한 여행의 기록을 에이블뉴스, KBS3라디오 등 장애인매체에 알렸다. 여기저기서 “나도 여행 갈 수 있느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08년 여름 휠체어배낭여행 카페(http://cafe.daum.net/travelwheelch)를 개설해 현재 400여 명 회원이 함께 한다. 주 1회 번개와 월 1회 정모를 갖고 자연과 낭만의 세계로 떠난다. 하지만 여행은커녕 외출에 대한 두려움에 쌓인 장애인에게 첫 발 떼기가 쉽지만은 않다. 하여, 어느 경우는 아침 일찍 그 친구의 집 앞까지 찾아가서 문밖부터 동행하는 헌신도 마다 않는다.
40년 만에 수학여행 떠나는 친구 손 맞잡고
“성년이 넘도록 태어나서 지하철을 한 번도 안 타본 친구도 많아요. 개나리꽃을 책이나 TV에서만 봤지 실제로 처음 본다는 사람도 있고요. 선천성 장애인의 경우 학창시절에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가보니까 40년 만에 수학여행을 간다고 감격하죠. 그렇게 두 번 정도 가보면 자신감이 생기니까 그들이 또 다른 친구를 데리고 떠나더라고요.”
마음의 벽만 무너뜨리면 휠체어 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거듭 얘기한다. 그 역시 이젠 타인의 동정어린 시선도 즐길 정도가 됐다. 얼마 전엔 정선 5일장을 갔는데 할머니들이 다가와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고 두 손 꼭 잡고 위로해주더란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다 들어드렸어요. 저를 생각해서 해주는 거니까 고맙다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말씀드리죠.”
여행은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 같던 그에게 여유를 선물했다. 천근만근 무겁던 몸이 새처럼 가벼워지고 화살 같던 사람들의 시선도 햇살처럼 보드라워졌으니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장애인을 위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멋진 책을 쓰고, 휠체어로 유럽을 돌고 장애인용 휠체어 유럽여행 가이드북을 내고 싶다.” 먼저 다녀온 '낭만의 길'이 벗과 함께 하는 '희망의 길'이 되고, 삶의 여유를 주는 '자유의 길'이 되어, 마침내 누구나 지날 수 있는 '사람의 길'이 되기를, 그는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