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을 타고 온 책 선물 <아큐를 위한 변명>. 기다리던 책이라 얼른 잘 읽고 정성스럽게 리뷰 해드리고 싶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되었어요. 빠른 것인지, 늦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중요한 건, 글자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상수작가님이 왜 이 책을 썼는지, 책을 통해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아듣고 싶었어요. 들을 수 있는 귀가 될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그리고 찬찬히 곱씹어 읽다가 이런 구절을 봤네요.
“질문이 없이는 이해를 구성할 수 없다. 낯선 시선이 없는 이는 아무런 질문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질문은 늘 낯선 사태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갈망하는 우리는 모든 질문에 대하여 관대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한평생 하다가는 일이란 결국 묻고 답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86)
지난번에 쓰신 책 <한비자, 권력의 기술>. 언뜻 한 번 보았을 때 모범생의 글처럼 너무 똑똑하지만 저자의 세계관을 읽을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굳이 상수작가님이 쓰지 않아도 될 책을 쓰신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아니, 상수작가님이 쓰신다면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썼어야 한다고 여겨서 아쉬웠어요. 그런데 <아큐..>를 읽고 나니까 풀려요. <한비자..>와 <아큐..>를 연작시리즈처럼 놓고 보니 상수작가님의 뒤척임과 땀방울과 눈물이 보여요.
끌림의 이유를 알겠어요. (로쟈가 왜 상수작가님의 팬인지도 알겠고^^;) 제가 붙잡고 고민하는 문제가 거기에 있었어요. 음. 동양철학을 바탕에 깔고 펼치는 사유의 힘이 도도하고, 허위나 군더더기가 없고, 구석구석 은근히 전복적인 데가 있네요. 이 ‘고귀한’ 전복의 사유를 느끼느라 그리 오래 걸렸나 봐요.
상수작가님이 모든 ‘중심주의’에 반대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니체가 국가, 이념, 민족, 돈, 종교, 우상 등 모든 ‘진리에의 의지’를 비판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더군요. 매직아이처럼 ‘초점’을 맞추니까 선명하게 보입니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갈망하는 자, 실은 요즘 세상이 낯설게 보여 깊은 고민에 휩싸였더랬습니다. 제 질문의 키워드는 이거였어요. 좋은 벗, 보편적 사고, 닫힌 세계의 폐단, 대중의 각성(혁명). 그런데, 중국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고찰서 <아큐..>에서 먼저 고민한 흔적을 만났습니다. 한 단계 매듭이 풀립니다. 한평생 하다가는 묻고 답하는 일의 중간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권도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벗인가
‘같이 배운 사람이라고 해서 같은 길에 이르는 것은 아니고, 같은 길에 이르렀다고 해서 같은 길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며, 같은 길을 실천한다고 해서 똑같이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님 말씀이다. 같은 스승 아래서 함께 배우는 것도 소중한 인연이지만, 배움을 이룬 뒤에 세계관이 일치하지 않으면 같은 길을 가는 벗이 되기는 어렵다. 세계관이 일치하더라도 서로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있는 벗이 되기는 어렵다. 공자의 시각을 따를 때, 벗 가운데 가장 깊은 사귐이 가능한 벗은 ‘권도’를 함께할 수 있는 벗이다.
그렇다면 권도란 무엇인가. ‘준거할 수 있는 원칙이나 법령이 없을 때, 임기응변으로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어 실천하는 일’을 뜻한다. 중국인들에게는 권도를 함께할 수 있는 벗이 가장 높은 경지의 벗이다라는 관념이 있다. 벗을 위해 어떤 위험이나 세간의 비난도 무릅쓸 수 있는 정신은 이런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역사에 등장했던 동림당 등 도당들의 역사가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도당을 만드는 방식이란, 시쳇말로 의기투합이 되는 이들을 끌어 모아 결사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동지 규합방식의 결함은 ‘의기투합’의 주관성에 있다. 인간은 모두 주관적인 존재. 어떤 사람이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의기투합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를 때, 주관의 작용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이것이 도당형성의 근본적인 한계다.
더 넓고 더 공변된 대의를 위한 대동과 대공의 장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런 방식이 걸림돌이 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열린사회’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도당형성 방식의 동지 규합이 지니는 한계는 더욱 뚜렷하다. 중국의 지식인 사회는 이런 도당이나 방을 넘어서서 대동과 대공의 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논리도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 중심주의를 넘어 열린사회로
자기의 개념을 닫아건 사람은 자기가 아는 세계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닫힌 개념으로 무장한 세계관을 우리는 ‘중심주의(centricism)’라고 부른다. 닫힌 자아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것이고, 남성 중심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이들은 남근중심주의에 빠진 것이다. 오로지 유럽만이 보편적이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이들은 유럽중심주의에 빠진 것이며, 중국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들은 중화중심주의에 빠진 것이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자아, 인간, 보편, 문화 등의 개념은 모두 닫힌 개념이다. 열린 개념은 열린 사회를 만들고, 닫힌 개념은 닫힌 사회를 만든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의 뿌리 깊은 허위의식은 ‘천하’라는 관념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중국 고대철학에서 천하 관념의 등장은 중국 철학이 ‘보편적인 것’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때문에 중국 철학의 보편적 성격과 천하 관념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세계와 우주 대한 관심이 없이 보편에 대해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낯선 시선을 지녔다. 이방인은 주인과 다르게 질문하는 방법을 안다. 알고자 해서 아는 게 아니라 그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이라기보다, 그의 눈에는 그렇게 낯설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낯설게 묻는 것이다. 그는 그 세계 안에서 익숙하게 살아온 그 땅의 주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투철한 시선을 지녔다. 오로지 이방인의 시선만이 가장 투철하다. 그 낯선 시선으로 인해 그는 그 땅을 투철하게 이해하는 문을 비로소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때로 그 문은 주인조차 열고 들어가 보지 못한 문이기도 하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걷지 않는 것은 이방인의 정상적인 발걸음이다. 그 이탈과 호기심이 늘 우리의 탐구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그 궤도를 벗어난 탐구가 서로에 대한 인해를 깊게 만들고 세계를 더욱 열린 것으로 만든다.
# 혁명의 본질은 대중의 각성이다
아큐가 영문도 모르고 혁명에 연루되어 처형당할 때, 주변 군중들은 누가 어떤 이유로 왜 그렇게 참혹한 처형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저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다. ‘구경’은 아큐적 인간상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몽매에서 우러나오는 졸렬한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소일거리기 때문이다. 구경꾼이 되어 수수방관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호기 있게 욕설 섞어 고함도 지르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훈수와 참견을 하는 것은 아큐적 인간상의 본질에 가까운 태도다.
아큐기질은 대륙기질의 그림자다. 대륙기질의 인간상이 전제통치의 절대적 폭압에 짓눌렸을 때, 이들의 심성은 아큐기질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전제통치 아래서는 천자 외에 그 누구도 승리자일 수 없다. 이들은 전제 기계 아래 깔려 죽지 않으려면 호연지기와 같은 논리는 잠시 접어 두고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배워야 했다.
아큐라는 인간상은 전제통치가 남긴 그늘이자 상흔이다. 중국 고유의 민족성이 아니다. 어떤 겨레에 고유한 ‘성격’이 있다는 생각은 관념적인 것이다. 만약 어떤 인간집단에 공통의 성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사회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아큐는 사회구조의 희생자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아큐라는 인간상을 양산해내는 억압적인 사회구조다. 우리는 아큐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 배후에 놓인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분노해야 한다.
사람을 각성시킬 수 없는 모든 혁명은 가짜이다. 혁명의 본질이 공포정치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각성에 있다. 역사의 경험이 말해주듯, 많은 혁명은 너무도 빨리 혁명을 배신했다. 진정한 혁명의 목적은 어떤 전제정권의 타도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의 각성에 있다.
# 숨통이 트여있지 않은 용광로는 위험하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중원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현대의 맥락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인 지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다. 오늘 날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한 뒤에도, 우리는 중국인의 마음에 여전히 대륙 기질과 아큐 기질의 주름이 남아 있음을 보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장악한 중국공산당에게도 중원의 분열과 원심력은 변함없이 공포로 작용한다. 중국공산당은 지금까지 원심력을 통제하고 짓누르기 위해 강력한 통치수단과 잘 단련된 조직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안정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라는 구호에는 중국공산당의 공포와 권력의지가 함께 담겨 있다.
우리는 이제 중원이 현대의 열린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비전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중원의 개방성과 제국의 폐쇄성이 번갈아 역사의 무대를 차지하는 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가. 미국 오바마대통령 당선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열린 사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뜻이다.. 어떤 사회의 포용력과 적응력과 개방성이 증가하는 것은 그 사회의 생명력을 더 강화해주는 일이다.
숨통이 트여 있지 않은 용광로는 위험하다는 사실. 미국사회와 중국사회는 둘 다 다민족 사회로서 용광로와 같은 격변을 겪어왔으며, 지금도 겪고 있다. 두 나라의 차이는 숨구멍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최소한 미국이라는 용광로는 모순과 충돌, 이견과 항의가 터져나올 수 있는 숨구멍을 여기저기 터놓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미국사회에 스스로 편향을 수정하고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균형감각과 자정능력과 생명력이 잠재해 있음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외정책에서 거의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해온 미국이 아직도 세계를 리드하는 나라로 건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균형감각과 자정능력과 생명력 덕택일 것이다. 한 사회의 균형감각과 자정능력과 생명력은 그 사회의 개방성으로부터 나온다. 닫힌 사회는 균형감각을 가질 수 없고, 부패와 타락을 스스로 씻어낼 수 없으며, 따라서 생명력을 상실하고 자멸해 역사의 무대위로 사라져갔다. 닫힌 사회는 열린사회를 이길 수 없다. 열린 사회의 공기는 쉽게 탁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