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열었다. 유신시대 복장규제라도 내려졌는지 온통 검은 계통 옷 뿐이다. 편하게 폴로셔츠를 입으려다가 바로 옆에 있는 노란카디건을 꺼냈다. 비오는 날 기분전환을 위해 노란색 우산을 쓰는 것처럼 슬픔이 내리는 몸에 환한 노란우산을 씌웠다. 차를 몰고 성산동으로 갔다. "지영, 묵은 김치 한통 줄까?" 며칠 전 언니한테 문자가 왔고 그걸 받으러 가는 길이다. 하늘은 촉촉한 잿빛이다. 며칠 잠을 설쳤더니 어질어질한데 비까지 부슬부슬 내린다. 누가 등을 치면 몸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시야가 흐려지고 길이 미끄러웠다. 백미러도 잘 안 보였다. 사고가 나면 안 되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나를 다독여가며 가까스로 차를 몰았다. 언니네 집 앞에 장이 섰길래 수박을 살까 참외를 살까 고민하다가 노란참외가 눈에 들어와 참외를 골랐다.
작년 여름즈음, 신촌 2층 카페에서였다. 언니가 예의 그 나즈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영, 형부가 스위스 특파원으로 가게 됐어. 내년 7월에...” “진짜?” 이별통보였다. "언제 와?" "3년" "3년......" 그러니까 애인을 군에 보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실감나지 않았다. 아직 멀었는데도 입영전야의 이별처럼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대낮에 카페에서. “벌써 왜 울어. 내년 여름에 간다니까...3년 금방 간다.." 난 이런 말이 가장 싫다. 산 사람은 산다. 시간이 약이다... 같은. 오롯한 감정에 시간의 강물을 타버리는 쓸쓸한 말들. 어김없이 구현되는 서늘한 삶의 법칙들. 이 또한 지나갈 것임을, 다 안다. 그래도 벌써부터 언니 없이 어찌 살지 막막하다. 그래도 살겠지. 엄마가 없어도 살았던 것처럼.
언니가 그런다. “김치가 제일 걱정이다.......” 그러게 말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언니네 김치는 돌아가신 우리 엄마 김치와 맛이 가장 유사했다. 특히 총각김치가 환상이었다. 언니한테 김치를 얻어오면 하얀 밥 고슬고슬 지어서 끼니마다 1식1찬으로 밥 한 그릇씩 뚝딱 비웠고, 그렇게 맛있게 먹고 나면 온몸에 침샘이 한바퀴 돌았다. 입맛이 살아나 일주일이 지나면 몸무게가 1킬로그람씩 늘곤 했다.
언니는 민언련 선배다. 그전에는 이름과 글만 알고 지내다가, 엄마 돌아가시고 얼굴을 보고 인연이 이어져 지금까지 딱 3년, 질퍽한 우정을 나누었다. 내가 가장 흔들리던 시기에 어느 날 나타난 언니는 가까이서 나를 꼭 붙잡아주었다. 아니 돌봐주었다. 물심양면으로. 부부가 공히 마음 대해. 그리고 나의 상처가 아물고 눈물 흘리는 일이 줄어든 뒤로, 언니는 임무를 마친 사람처럼 내 곁을 잠시 떠나려 한다.
언니는 항상 나를 친구라고 소개했고 친정엄마처럼 대해주었다. 민언련 활동이 끝나면 술도 자주 마시고, 오며가며 김장김치도 퍼주었다. 우리남편이 언니아들과 내아들을 데리고 수학 과외도 했다. 언니는 아들 편에 대보름에 오곡밥과 나물도 보내주고, 같이 왔다가 목욕탕에서 등도 밀어주었다. 밤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과 구질구질한 사연을 5분 대기조가 되어 전화로 혹은 만나서 다 받아주었다. 덕윤이 중학교 들어갈 때는 가방 사주라며 하얀봉투를 주머니에 찔러주었고, 서형이 초등학교 입학 때는 예쁜 옷을 선물해 주고 고기도 사주었다. 신문기자인 형부는 나의 데스크였다. 일을 시작한 초기에 몇 번 원고를 봐주었다. 놀랍게도 단어 몇 개와 조사 몇 개를 고쳤을 뿐이거늘, 원고가 환골탈태 돼서 돌아왔다. 형부가 교정한 원고를 보면서 기사 쓰는 감각을 키웠다. 언젠가 형부가 말했다. “지영 씨는 좋은 글을 쓸 거야.” 그 말을 부적처럼 가슴에 지니고 글이 안 풀릴 때마다 기운을 냈다.
지난 봄에는 언니가 해주는 갈비찜과 냉이된장찌개에 밥을 한 그릇 비우고 집으로 가는 길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나 불쌍해서 언니를 보내주었나......”
지난 3년 동안은 그랬던 거 같다. 내 생애 전체가 트라우마로 느껴졌다. 세상 전체를 등짐지고 살아가는 거 같았다. 혼자되신 아빠, 몸이 아픈 오빠, 같이 살고 싶지 않았던 남편, 안 챙겨주면 금세 시드는 아들과 딸은 기본이고, 다음날 보내야할 원고 두 편과 읽어야할 책과 산더미 같은 빨래와 설거지감은 필수였다. 그러면서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려니 날마다 우주 이 끌에서 저끝 까지 왕복달리기를 하는 거 같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내 짐을 나눌 만한 사람은 없었고, 내가 하루라도 부재하면 삶이 와르르 와해되는 구조였다. 그런 내게 언니는 몰래 도시락 까먹는 '쉬는시간'이었다. 숨통을 틔워주었다. 즐겁고 든든했다.
언니가 김치를 큰 통 한가득 담는다. 고만 넣으라고 하자 줄 때 먹으라고 한다. “이제 가면 3년 동안 못 먹잖아. 많이 먹어.” 이통에서 저통으로 한 포기 한 포기 꾹꾹 놀러 담는 언니의 붉게 물든 위생장갑을 나의 눈동자는 카메라처럼 느릿느릿 찬찬히 훑고 있었다.
“이건 시어머니가 담아주신 건데 우리 시어머니 김치는 좀 불순물이 많아. 미원, 뉴수가. 아냐, 요새는 뉴슈가는 안 넣는다. 하하. 암튼 이런 몸에 안 좋은 화학조미료 말야. 괜찮지? 그냥 먹어둬.”
조미료 들어간 김치. 얼마 전 형부랑 술 마실 때 형부가 그런 얘길 했다. “평소에는 장모님 김치가 훨씬 맛있는데 몸이 아플 때는 이상하게 우리엄마 조미료 많이 들어간 김치가 먹고 싶거든....”
아. 맞다. 울 엄마의 김치도 그랬다. 내가 조미료는 안 된다고 그러면 엄마가 아주 조금은 넣어도 된다고 우겼다. 아마 딸 눈치를 보면서 몰래 넣었을 것이다. 엄마는 웰빙 열풍 전까지는 MSG 걱정 없이 미원을 썼던 세대니까. 조금이라도 더 맛있다면 뭐라도 넣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니까.
언니는 김치를 다 담더니 다른 것들도 꺼내 바리바리 챙겼다. "고추장도 먹어봐... 마늘장아찌 이거 1년 된 건데 참 맛있어... 안 익은 김치는 이거 대로 또 맛있잖아... 한 포기만 맛 봐... 총각김치 좀 신데 괜찮지? 아무도 주지 말고 지영만 먹어..." 작은 통 대여섯개가 큰 김치통 위로 옆으로 창간기념선물, 별책부록처럼 매달렸다. 혹여라도 국물 흐르지 말라고 비닐백에 넣고 지퍼백에 넣어서 이중삼중 완벽히 포장을 마치는 동안, 나도 있는 힘을 다해 몸 밖에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밀봉했다. 언니가 올해 대학원에 들어가고는 바빠서 자주 못 만났기 때문에 오랜만에 눈물 보이려니 남사스러웠다. 그런데 결정타를 날린다.
"우리 엄마가 건강하셔야할 텐데. 그래야 3년 뒤에도 김치를 담가주시고 지영을 또 줄 텐데...저번에 엄마김치를 받아오는데 울컥 하더라. 어른들은 나이들면 하루가 다르니까......."
애들 점심해주러 가야한다면서 서둘러 언니 집을 나왔다. 계속 비가 내렸다. 아주 구슬프게. 대낮부터 흐린 가을 하늘같은 아래서, 하늘도 울고 나도 울었다. 언니가 보고싶을까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엄마의 조미료 들어간 김치가 너무나게 그리워서. 딸내미를 두고 눈을 감거나 감게 될 이 세상 모든 친정엄마의 아픔이 떠올라서....... 눈물 젖은 김치를 먹어보지 않은 자, 친정엄마의 사랑을 논하지 말라는 말은 추가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