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점수 파동
아들이 중학교 입학하고 첫 시험. 그러니까 중간고사를 봤을 때다. 수학을 49점 받았다. 내 눈을 의심했다. 94점이 아니라 분명히 그것은 49재 할 때 그 숫자. 사구팔구할 때 그 숫자. 49점이었다. 어이상실. 초등학교 6년 동안 거의 백점이었는데 아무리 중학교가 어려워도 그렇지, 어떻게 몇 개월 사이에 수준이 이렇게까지 추락하나. 납득이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아들이 아니라 남편한테. 입술을 앙 깨물고 문자를 넣었다. ‘오늘 부로 당신은 해고야!’
아들은 남편한테 주2회 과외를 받았다. 남편은 자기가 수학경시대회에서 전교1등이었고 대학 때도 수학성적이 제일 좋았다고 자랑했다. 결혼 후에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연습장 펴놓고 샤프 들고 ‘수학의 정석’을 풀길래 믿었다. 학원비도 아낄 겸 남편한테 맡겼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나오자 몹시 황당했다. ‘똑똑한 내 아들을 망쳐 놓다니. 뭐 개념 확립 위주의 열린교육? 말이 좋다! 어흑.....’
남편한테 AS 확실히 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부자지간에 학원을 알아본다며 집을 나섰다. 닮은꼴의 뒤통수가 나란히 걸어가는 게 좀 불쌍해보였다. 학원에 가면 상담하고 레벨테스트를 봐서 반편성을 하는데, 아들은 ‘기본이 안 돼 있다’는 매서운 판정을 받고 최하위 반을 들어갔다. 그렇게 한 달 반을 수업을 받고 기말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놀라웠다. 수학이 백점이었다. 이번에도 어이상실. 아니, 배춧값 파동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냐. 물론 49점보다야 100점이 낫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 49점도 100점도 둘 다 내 아들의 점수가 아닌 거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초등학교는 점수만 나오지만 중학교는 과목별 전교 석차가 나온다. 아들 다니는 중학교는 특목고 진학률 전국1위다. 아이들 학습량이 장난이 아니다. 상위층이 두텁다. 수준이 비슷비슷한 애들 700명을 줄 세우려니 문제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 그러므로 학원에서 문제 유형별 노하우를 배우지 못한 어리버리한 애들은 헤매는 거고, ‘전문가’에게 문제풀이 스킬을 습득하면 성적관리가 확실히 되는 거다. 수학점수파동을 겪으면서 알았다. ‘엄마들이 이래서 학원을 보내는 구나.......’
# 학원천국 독학지옥
1학기가 지나고, 2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아니라, 학원천국 독학지옥이었다. 학원을 다니는 영어, 수학이랑 원래 좋아하는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안습 그 자체였다. 늘 시간이 부족해 허둥댔다. 시간 들여 공부를 좀 하면 결과가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했다. 자기주도학습을 하기엔 교과목도 너무 많고 잠도 너무 많았다. 적어도 향후 6년 동안은 둘 중 하나가 적어야한다. 잠과 학습이 같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시간 넘도록 방에서 안 나오고 조용해서 방문을 스윽 열어보면 안경이 이마 위로 올라가있고 입을 헤 벌리고 늘어지게 자고 있다. 그걸 보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하도 잘 자고 잘 먹어서 칠월 해바라기처럼 쑥쑥 자라고 얼굴이 희다 못해 밀가루 뒤집어 쓴 거 마냥 뿌옇게 피어나는 아들을 보노라면,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났다. 그런다 한들 어쩌겠는가. ‘그래, 청소년기에는 건강이 최우선이지’ 라며 마음을 달랠 밖에.
유치원 다니는 동생이랑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신나게 베개싸움 하는 걸 볼 때마다, 명색이 중딩이란 놈이 성탄절 이브에 “산타할아버지가 양천구청장이냐”고 호기심에 가득 차 물어보더니 “그럼 창문으로 오는지 현관문으로 오는지만 그것만 가르쳐달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천성이 밝아서, 그래도 얼굴에 그늘이 없어서 다행이다’라며 위안해야 했다.
아들이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10시를 전후로 잠이 드니까 좋은 점도 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혼자 토스트도 해먹고 ‘엄마 피곤할까봐 안 깨웠다’며 학교를 가는 아들 녀석이 기특하기도 하다. 기분이 좋은 날엔 높이 띄운다. “아들아, 너는 잘생기고 요리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니까 정말 일등 신랑감이다. 공부는 대충하고 치과의사 마누라 만나서 팔자 편하게 사는 법을 모색해보자꾸나.^^” 가끔은 내가 바빠서 이것저것 신경 못써주는 미안함을 무마하고자 큰소리도 쳤다. “아들아, 엄마 잘 만난 줄 알아라. 나처럼 잔소리 안 하는 엄마가 있는 줄 아니?”
이렇게 저렇게 레퍼토리를 바꿔가며 불쑥 불쑥 고개를 내미는 ‘불안과 초조’를 달랬다. 그러면서도 시험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아니 성적표를 받아볼 때마다 엄마로서 아주 현실적인 타협점이 찾아졌다. 아들이 중학교 생활이 자리잡아갈수록 대한민국 전도가 가슴에 절로 새겨졌다. 명문대에서 인서울대로, 경기권을 넘어 지방대로. 수용가능대학의 범위가, 경부선 타고 중앙선 넘고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아주 그냥 쭉쭉 뻗어갔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는 녹색평론 김종철 대표님의 말씀을 되새겨보기도 했다. ‘자식 대학 안보내기 운동을 해야합니다.' 그렇지. 앎과 삶의 일치가 중요하지. 암 중요하고 말고 ㅠㅠ
# 전쟁이거나 시트콤이거나
(사진은 아들 초등4학년 때.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시절)
난 정말 좋은 엄마 되려고 눈물겨운 노력 중인데, 어제는 기말시험 종료 하루 앞두고 아들이랑 싸웠다. 9시 반 즈음. 글을 쓰다가 문득 이상해서 ‘엄마의 직감’으로 방문을 열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쿨쿨 자고 있었다. 시험 첫날부터 당일치기 하느라고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설치더니 마지막 날 되니까 배터리가 다 닳은 거다. ‘피곤도 하겠지....아무리 그래도 저 잠탱이가 정말!!! 으이구!’ 불쌍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마음 같아선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조용히 흔들어 깨우고는 아들이 의자에 앉는 걸 보고 나왔다. 5분이나 지났을까. 아들이 거실로 나오더니 “엄마, 저 미술 다했어요.” 그런다.
“방금까지 자놓고 뭘 다해.” “누가 자요?” “너 잤잖아.” “안 잤는데요!” “뭐? 엄마가 방금 너 깨우고 나왔거든. 5분 전에.” “진짜 안 잤어요. 지금까지 미술 했다고요.” “세수하고 와라. 니가 잠이 덜 깬 모양이다.” 아들이 장승처럼 그대로 서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너무 억울하단다. 자긴 정말로 안 잤다고 우긴다.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 진짜 안 잤어?” “네에!!!” “진짜?” “네!” “알았다. 그럼 엄마가 귀신을 봤구나!”
이것이 시방, 전쟁이냐 시트콤이냐! 아들이 풀어놓은 파이널 총정리 채점을 하고 있어도 부족할 판에 '잠꼬대' 하는 아들이랑 싸움이나 하다니. 이런 시추에이션이 너무 한심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느라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나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아들을 뒤따라 들어가 퍼부어댔다.
“너 공부한다고 유세야? 엄마가 그동안 인권보호 차원에서 봐줬는데 도저히 못 참겠다. 학생이 시험 때 공부하는 게 당연하지! 너만 힘드니?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힘들어. 덩치가 커지면 참을성도 커져야지. 힘든 것도 견디고 졸려도 참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야. 알량한 지식 몇 개 더 배우는 게 시험이 아니야. 인내심. 집중력. 힘들어도 참는 법, 친구들과 성적도 겨루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고. 이런 걸 다 배워나가야지 멀쩡한 어른이 될 거 아니야!”
#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알아듣는지 못하는지, 일단 해대고 나왔다. 문득 쓸쓸했다. 겁에 질렸는지 기가 찬 것인지 말대꾸도 안 하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들. 나보다 키가 더 큰 아들과 대적하려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 허리에 두 팔 짚고 고개 쳐들고 째려보면서 따지는 나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내가 고생이 많다... 불과 10분 사이 한바탕 악몽을 꾼 것처럼 강렬한 사건이 지나갔다. 잠도 덜 깬 철부지 아들이랑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그래도 얄미웠다. 궁시렁궁시렁 속으로 마저 퍼부었다. ‘저게 내 뱃속에서 나온 주제에 컸다고 잘난 척이야! 흥이다 이놈아! 나한텐 딸도 있다! 왜 이러셔!’
장마철 눅눅한 장판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리다가, 덧셈 배우는 딸내미처럼 손가락 열 개를 접었다 폈다하며 세어 봤다. 2학기 중간-기말 두 번, 중3부터 고3까지 일 년에 4번씩 열여섯 번. 합이 열여덟 번만 참으면 된다. ‘4년 반, 그까이꺼! 나는 할 수 있다. 근데, 근데.. 참 길긴 길다. -_-;;’
마음 다독였다. 앞으로 잘 보내야지. 아들이랑 싸우지 말아야지. 엄마 품에 오라고 하면 얼른 와서 가로로 길게 안기는 아들. 언제까지 안길지 모르겠으나 안길 때 많이 안아주고 쑥쑥 크라고 엉덩이 두드려줘야지. 잘생겼다고 뽀뽀해줘야지. 신체 건강하게 키우면 설마 밥 굶기야하겠어. 기대하지 말아야지. 교우관계 원만하잖아. 동생도 잘 보고. 계란밥이랑 토스트도 잘 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그래. 뭘 더 바래. 국산사자음미도기가. 어떻게 다 잘해. 그래. 외우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오늘이 행복하지 않으면 무효다. 늦게 피는 꽃도 있다. 그러다가 안 필 수도 있다. 그래도 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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