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휠체어 여행생활자’를 만났다. 서른 즈음에 급작스런 유전질환의 발병으로 근육에 힘이 없어져 걷지 못하게 된 중도 장애여성이었다. 수동휠체어를 돌릴 힘이 없어 전동휠체어를 탄다. 그런데 그 휠체어를 몰고 정선5일장부터 제주도, 인도, 미국, 일본, 호주까지 가고 싶은 곳을 다 가면서 사는 여행생활자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재밌는 사실을 알았다. 원래 여행을 좋아해서 대학 때도 배낭여행을 많이 다니다가 회사에 들어가니 여행을 할 수 없더란다. 직장인들의 그 고정 레퍼토리 ‘회사 때려치우고 여행이나 하면서 살아갈까’를 그 역시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불편해져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면서 비로소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휠체어가 날개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는 여행을 하지 못하다가, 막상 휠체어를 타면서 여행의 자유가 생겼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했다. 원래 삶은 아이러니지만 새삼 신비로웠다.
지난 일요일 고양시민 노무현 추모공연 ‘천개의 바람이 되어’에 나온 희아를 보면서도 그런 ‘삶의 신비’를 느꼈다. 열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어려운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네 개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려한 연주를 들려주는 ‘기적’ 을 목도했다. 새삼 어머니가 존경스러웠다. ‘손가락이 네 개 인데 왜 하필, 어떻게 감히 피아노를 택하셨을까. 바이올린이면 좀 더 쉬웠을 텐데. 고생이 덜했을 텐데.’
희아어머니는 그러셨다. 태어났을 때부터 한 손에 두 개씩 달린 손가락이 튜울립처럼 예뻤다고. 그리고 손가락에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 피아노를 시켰다고. 피아노가 모든 음악의 기본이라고. 나중에 엄마가 없어도 희아의 삶을 지켜줄 무언가가 필요했다고. 여섯 살 때 피아노 선생님을 구하는 데만 6개월이 걸리고 희아의 엉덩이가 빨갛게 짓무르도록 모녀가 싸워가면서 연습했고, 한 곡당 최소 1년, 즉흥환상곡을 마스터하는 데는 4년이 걸렸다고 했다.
삶은 그렇게 매정하다. 삶은 추락체험이다. 삶은 재활훈련이다. 휠체어에 앉아서야 비로소 자유를 주고, 손가락이 네 개이기 때문에 피아노를 쳐야하는 게 우리의 삶이다. 결핍이 삶을 지탱한다는 것.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는 것. 두려움의 근원을 통과해야 길이 열린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내 삶의 아이러니 나의 책상이야기 일곱살 때부터 책상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빠가 길에서 사온 찻상 크기의 독서대가 펴지는 좌식책상이 있었고 4학년 때 삼익가구에서 원목으로 된 고급책상이 생겼다. 그 책상에서 학창시절 쓴 일기며 편지며 수첩을 담아서 신혼집까지 갖고 왔다. 35평으로 집을 넓혀가면서 나만의 방이 생기고 책꽂이가 달린 예쁜 새 책상을 구입했었다. 그리고 3년 후 20평으로 이사하면서 책상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얼마 전 까지. 책상이 없었던 내 지난 4년간 내 평생 가장 많은 글을 썼다는 걸 알았다. 거실이 내 방이고 식탁이 책상이었다. 식탁 한쪽에 노트북을 놓고 글을 썼다. 글 한바닥 쓰다가 5시 반이 되면 자동으로 일어나 쌀을 씻고, 찌개가 넘치면 불을 끄고 와서 또 한 줄 쓰고, 부침개가 타면 반대쪽으로 뒤집고 와서 제목을 정하곤 했다. 식탁에서 책을 읽다가 아이가 우유를 쏟으면 걸레로 닦고 와서 또 책을 보면 앞의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책과 필통 수첩을 늘어놓고 식사 시간이 되면 한쪽으로 밀어놓은 다음 밥을 먹고 김칫국물을 닦아낸 다음 다시 노트북을 켰다. 정리정돈을 지상과제로 삼는 남편이 식탁 위에 책 좀 늘어놓지 말라고 잔소리할 때는 기가 막혀 쓴 한숨을 삼켜야 했다.
야구중계를 보는 남편, 피아노 치는 아들, 소꿉놀이 하는 딸아이에 둘러 싸여 글을 쓰노라면 시장 바닥에 앉아 목탁 두드리며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 소음이 내 정신을 깨어있게 했고, 내 글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어차피 알았어도 투정할 대상이 없었지만, 나는 책상의 부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끼니의 영원회귀 속에서 원고마감 일정 속에서 숨 가쁜 날들을 보내느라 그랬다. 사실 딱히 큰 불만도 없었다. 한글 파일의 하얀 ‘빈문서’ 안에서, 깨알 같은 책에 고개 파묻으면서 충분히 자유했고, 그것은 어떤 고급의자와 사장님 책상에도 없는 충만한 행복이었다.
지난 6월27일 책상이 생겼다. 집은 그대로인데 남편이 배치를 바꾸어 공간을 마련해 놓고 책상을 사자고 했다. ‘당신이 하도 책을 늘어놓아서 보다 못해’ 라고 구박을 했는데 알고 보니 결혼기념 선물이었다.
책상 사는 날, 남편과 나와 딸과 친구와 친구의 딸, 다섯 명이 고르러 갔다. 가구 파는 분이 말끝마다 “학생이 쓰기 좋다.”고 권유하자 친구가 나를 가리키며 학생이 아니라 이 어른이 쓸 거라고 말했다. “어머, 글 쓰시는구나..작가에요?” 가구 파는 분의 말에 나는 멋쩍어서 안절부절 하는데 남편이 그런다. “네. 작가에요. 무명작가.”
피식 웃음이 났다. 무명작가라는 말이 맘에 들었다. 무명옷처럼 정갈하고 통풍 잘되고 청빈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이름 없는 작가. 눈과 귀에 때가 묻지 않은 작가. 그래 나는 그렇게 살고자 했었다. ‘천개의 눈 천개의 길’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글을 쓰던 초심을 떠올렸다. 언제나 나를 흔들어 놓는 좋은 스승 고병권의 글.
‘길들여진 눈이나 길들여진 귀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놓친다. 눈이 시대의 ‘광학 훈련’에 익숙해져 상식에 벗어난 어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귀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만을 들으려 한다”면 신체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길들여진 눈, 길들여진 귀, 무엇보다 길들여진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관습과 법이다. 그것들이 감각하고 그것들이 명령한다.’
새 책상에서 내 신체의 리셋버튼을 지그시 누른다. 길들여진 시선과 갑갑한 이름의 틀을 버리고 다시 은-유하기로 결심한다. 나에게 삶은 은유다. 하얀 목련이고, 시궁창에 버림 받은 하늘이고, 바퀴벌레이다가 가나초콜릿이 되고, 바늘 같은 장대비이고, 새파란 불꽃이고, 55이다가 66이고, 죽었는가 싶으면 아직도 쌩쌩하게 살아 있는 아이비가 삶이다. 그런 삶을 긍정한다는 것. 몰락하고 다시 창조하는 변신이 없으면 삶은 살아지지 않는다. 휠체어에 숨어 있는 자유를 발견하고, 네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달리듯이, 금단의 땅에서 삶의 양식을 구해야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