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 정의 노짱 돌아가시고 한겨레에서 추모기획으로 노짱 주변사람들의 회고담이 연재됐다. 변호사 동기에 따르면 노짱이 그랬단다. '이라크파병 반대해줘서 고맙다'고. 그 기사가 한없이 슬펐다. 힘없는 약소국 대통령의 자리에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아픔이 느껴졌다. 노짱이 이라크 파병했다고 여전히 뭐라하는 친구들의 면상도 떠올랐다. 좀 이해해주지싶다가도, 그 때는 그도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파병문제가 노짱 한 개인의 삶과 도덕을 거스르는 윤리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안타깝고 서운했던 기억이 났다.
<로쟈의 인문학산책>이 그 때 나왔더라면, 그래서 파스칼-데리다-로쟈를 거쳐 내게 온 이 글을 미리 봤더라면, 좀 근사하게 얘기했을지도 모르겠다. "벗아, 정의 그 자체로는 힘이 되지 못해. 유명학 철학자 오빠가 명언을 하셨다. 정의와 힘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정의)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강한 것(힘)을 정당한 것(정의)로 간주했다고. 곧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의해서 힘이 정의가 돼버렸다고. 이라크 파병도 그래. 국회의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이 '정의 없는 힘'이라면 '파병반대'는 '힘 없는 정의'라고 할 수 있지. 우리에겐 힘 있는 정의가 필요해."
MB정권 들어서고 홧병이 날 것같은 날들이 계속되면서, '힘'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한다. 힘은 총인가, 돈인가. 둘다다. 돈과 총의 시너지는 사악하고 무식한 '힘'을 정의로 만든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경호원이랑 둘이 산책나갔다가 죽었어도, 이렇게 증거미흡에 진술번복에 엉망진창 수사종결로 끝났을까. 조중동은 특보판을 내면서라도 파헤치지 않았을까. MB가 죽었으면 미국은 자기의 하수인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기위해 미국과학수사대라도 특파해주지 않았을까. 힘 없는 대통령이 죽으니 동네이장 취급도 못받고, 억울하다고 의문사 의혹을 제기하면 거의 안재환 모친 취급이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목숨이 없다면 절실하지 않은 죽음도 없는 것이거늘.
# 혁명 데리다는 힘을 총이라고 했더라. '불량배' 미국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엔이 발언이나 결의에 수행력을 덧붙여주는 것은 힘, 즉 유럽연합의 통합된 군사력이라고 보았다. 로쟈는 이에 적극 동의하면서, "물적 토대에 의해서 뒷받침되지 않는 정의는 곧 반격받으며,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아무리 시청광장에 10만이 모이고 100만이 모여서 '민주주의 살려내라, MB OUT' 구호를 외쳐봐도 힘없는 정의에 불과하다. 저들은 꿈쩍않고 딴나라당은 '좌파 찌질이들 모였다'고 조롱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딱 그꼴이다.
요즘같이 화염병도 없고 죽창 든 선봉대조차도 조직되지 않은 비폭력 촛불집회는 더 그렇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국민엠티나 살풀이 이벤트 밖에 안 된다. 촛불이 사그라든 것도 이 무력감의 확산 아니던가. 마침 지난번 영결식날 나의 참회도 그것이었다. '촛불처럼 짧게 타오르고 말았던 지난날 내 마음에 대한 성찰' 다 던질 각오 없이 광장을 배회하면서 스스로의 알량한 정의감을 충족시킨 것은 아닐까 반성했던 그 일화를 떠올리던 즈음, 로쟈가 또 정확히 꼬집는다. "무기력하게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이 정의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라고.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어떤 발언이나 결의에 수행력을 덧붙여주는' 물적토대'의 구축이 중요하다. 이부분이 굉장히 막막했는데 조중동 광고주불매운동에서 약간의 희망을 본다. 악덕언론의 광고주에게 지갑을 열지 않겠다는 언론소비자의 자본-파워가 발휘됐다. 물론 검찰과 언론이 탄압하겠지만. 그래도 광동제약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티끌모아서 우리의 힘을 태산같은 파워로 키워야 한다. 생활 속의 진보. 일상 속의 영수증 혁명을 통해 지속가능한 투쟁을 해야한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힘 없는 정의'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정의와 힘의 변증관계에서 '정의'가 '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의'를 품어야 한다. 닭 알 품듯이 정의를 힘으로 부화시켜야 한다. 정의에 연연해야 한다. 로쟈가 데리다의 멋진 구절을 읽어준다. "정의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러한 정의의 요구에 붙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사건을 만들고 역사를 책임져 나갈 수 있다."
폭력투쟁과 비폭력투쟁에 대해서 고민이 끝이 안났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묻는 질문처럼 해답없는 이분법의 구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당연히 엄마가 좋지만, 아빠가 없으면 엄마는 돈 벌러 나가야하기에 자식은 자애로운 모성애를 누리지 못한다. (일하는 엄마는 집에서 너그러이 아이를 품어주기 어렵다.) 무조건 폭력이어야 된다고 우기는 자들처럼 비폭력주의도 갑갑하긴 매한가지다. 민감한 문제다. 들뢰즈가 그런 지적을 했단다. "우리는 그릇된 '폭력적 분출'과 진정한 '혁명적 돌파'라는 기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미리 가질 수는 없다고. 지젝은 '폭력 기적은 오직 이전의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고 그렇기에 폭력이 혁명적인 정치행동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혁명적인 상황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게 아니라, 혁명의 상황을 만들어야 혁명은 온다는 얘기다. 지젝은 아무리 봐도 동사형인간이고, 그런 점에서는 내 타입이다.
# 눈물 그러면 뭐하는가. 슬프다. 철학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주는가. 잘난척만 한다. 철학의 무능력함이 지겨울 때가 있다. 책을 덮고 광장에 나가야 하는가, 광장에서 들어와 다시 책을 펴야 하는가. 그것이 종종 헷갈려 슬플 때가 있다.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게치고 마는 것이다."(시오랑)
로쟈는 이렇게 말한다.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는 철학의 무능력 자체는 바로 우리의 무능력을 닮은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무엇을? 내 던져지고 내평개쳐진 각자의 운명 속에서 각자의 눈물 속에서 의미 있는 일반이론, 즉 연대를 끌어내는 일 말이다. 개인의 울음을 집단의 통곡으로 바꿔놓는 일 말이다. 언젠가는"(409) 로쟈가 예언자처럼 됐다. 노무현대통령 서거로 반도의 땅은 이미 '개인의 울음'이 집단의 통곡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국민들이 깨어나고 사분오열 됐던 좌파가 연대의 조짐이 일고 있다. 언젠가는이 빨리 왔다.
난 로쟈가 책만 읽는 천재인 줄 알았다. 알라딘에서 인문학 책을 서핑하다보면 어김없이 그가 쪽지를 남겨두었다. 그걸 읽으면서 입을 딱 벌리곤 했다. '이걸 다 읽었나. 설마' 하면서. 근데 지젝, 라캉, 데리다, 레닌, 벤야민, 시오랑 등등에 대한 글을 책으로 읽으니까 막상 그가 '완전 천재' 같아 보이진 않는다. 사이버공간에서 현실감 없이 나타나는 존재에서 종이에서 만나니 편안하다.'사람냄새'가 더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로쟈에 대한 의외의 발견은 '릴케'다. 그가 이렇게 시를 사랑하는 줄을 몰랐다. 릴케를 사랑하는 줄 몰랐다. 호감지수 급상승이다. 난 시 사랑하는 사람과는 일방적으로 정신적인 인연을 맺어버린다.
<두이노의 비가><지젝이 만난 레닌>은 내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있는 '미결도서'다. 틈날 때마다 한편 씩 읽는데, 읽을수록 알듯말듯 어렵고 잡히지 않아서 '숙독불가' 판정을 내린 책이다. 대충 읽고 싶지 않은 욕심나는 책들이란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로쟈의 인문학산책>을 읽으면서 조금 맥락이 잡혔다. '로쟈가 만난 릴케'는 참 매력적인 시인이더라. 이 책에서 건진 최고의 문장, 눈물나게 아름다운 시 한편을 옮겨적는다. (그의 책도 이 시로 끝난다..)
이별의 꽃
- 릴케
이 세상 어디선가 이별의 꽃은 피어나
우리를 향해 끝없이 꽃가루를 뿌리고
우리는 그 꽃가루를 마시며 산다.
가장 가까이 부는 바람결에서도
이별을 호흡하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