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세 군데를 기웃거린다. 인문, 시, 예술 코너다. 누군가 오래 관찰하고 사색한 결과물을 아름다운 언어으로 엮은 것, 거기서 우러나는 향기는 항상 날 취하게 한다. 예술 중에서도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디자인에 관한 책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림도 멋있고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기까지 생장스토리도 '인간시대' 못잖게 뭉클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유하고 싶어지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꽃 꺾듯이 몇 권의 책을 주섬주섬 사모으기도 했다.
김민수 교수는 서점에서 내가 향내에 취해 코를 킁킁거리다가 찾아낸 분은 아니다. 4년 전 즈음 밥벌이용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초기에 선배가 도움을 줬는데, 선배가 자기의 글쟁이 친구들에게 내글을 보내서는 '지도편달'을 부탁했다. 그 중 한 선배가 이것저것 충고해주면서 '글쓰기의 좋은예시'로 보내준 게 김민수 교수의 글이었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도 역사와 삶 속에서의 의미연관도 짚어주고 시적으로 아름다운, 깊은 성찰이 담긴 글이었다. 전문분야의 글이었지만 어렵지도 않고 잘 읽혔다. 그 때 '좋은 글'에 대한 감을 잡았다. 물론 감 잡은 것과 그렇게 쓰는 것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지만;;
삶과 철학으로 시대를 디자인하는 필로디자이너 김민수 교수님의 글을 통해 얻은 귀중한 깨달음은 이것이다. 제 홀로 외따로 떨어져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것.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정치 경제 사회의 법적 제도적 장치나 언론같은 무형의 공기만큼이나 '건물'도 정치적이고 의식을 지배한다는 걸 알았다. 도시경관, 건축, 공공디자인의 삶의 장악력에 대해 알고는 놀랐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모르는 동경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한 시야를 틔우는데 도움을 받았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아름다움에 대한 잣대가 달라졌다. 이것이 미학의 힘이리라.
나의 어두운 영혼에 불을 밝혀준 고마운 김민수 교수의 새 책 <한국도시디자인탐사>라는 책이 얼마 전 나왔다.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울산 인천 광역시의 정체성을 찾아서' 걸음걸음 행군하신 기록이다. (서울은 분량이 방대해 나중에 별도로 낸다고 한다.) 개발과 소음의 분진에 가려진 면면을 특유의 식견과 혜안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은 "도시내에 자리한 기존의 장소를 부수고 새로 짓는 손쉬운 개발이 아니라 버려진 것들의 가치를 발견해 재창조한 지혜가 낳은 결과"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선 무분별한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사럽, 전시행정 차원의 각종 이벤트성 볼거리 개발 등으로 도시의 다양한 문맥과 기존의 삹터들이 붕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묻는다. "주민들이 재정착할 수 없는 뉴타운 계획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계획인가?" 용산참사를 예언이라도 하신 듯하다.
두터운 시간의 결을 살린 역사 문화적 문맥을 고려한 도시개발. 공동체의 삶을 원활하고 활기차게 약속하는 도시정체성이 드러나야 함을 550쪽이 넘는 책의 글과 사진을 보다보면 스르르 깨우치게 된다. 책을 보면서 가장 크게 웃음을 터뜨린 대목이 있다. 동시에 거대한 기념비적 발상, 신개발주의 강박이 무엇인가를 깨우칠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의 무등정신과 오월의기억은...5.18을 기념해 18층 높이로 지었다는 광주시 신청사, 5.18 정신을 기린다고 15.18미터로 세운 제2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상징조형물 등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18층의 시청사를 우러러 보면 5.18민중항쟁이 5월 31일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무등정신은 물론 5.18 정신과도 무관한 빗나간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광주가 현실에서 벗어나 상투적 위안거리와 덧없는 욕망만을 찾아 나설 때 도시 정체성은 오히려 지워질 것이다."(367쪽)
곳곳이 질문의 땅이다
이 책이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아름다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아름다움과 좋음, 행복의 기준이 적어도 지금처럼 천박한 돈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름다움에 문리가 트이면 '추한 것'에도 민감해진다. 추한 것을 더럽다 말할 수 있는 이가 많아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소신대로 세상의 불의와 악덕을 물리치기 위해 싸운 사람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민수 교수는 1994년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던 중 서울대 미대 초창기 원로교수들의 친일행적을 거론하고 선배 교수의 작품과 교과 과정을 학문적 입장에서 비평했다는 이유로 1998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후 6년 반동안 복직투쟁과 소숭을 벌여 2005년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원직복직해 현재 재직중이다.
저자의 땀과 사유, 세월의 켜가 잘 익은 장맛처럼 '진국'으로 우러난 내용에 비해 책의 디자인은 예쁘지 않아 아쉽다. 자료사진이 우리 도시 디자인의 천박함을 보여주니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조잡함을 보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디자인에 관한 책의 디자인이 안 예쁘면 두 배로 서운하다.
이책에서 '도시의 영혼'이란 말을 새로 배웠다. 도시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밀어버리지는 못할 터인데. 아닌가? 하긴 그들이 없애버리지 못할 것은 없어보인다. 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이 들고 있던 피켓문구가 생각났다. "사람도 철거하냐?" 이제부터 거리를 쏘닐 때 물을 일이다. '삶을 약속하는 디자인인가?' 곳곳이 질문의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