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다보면 칸트의 벽에 부딪친다. 칸트를 공부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읽었다. 글맛이 살아 있는 훌륭한 철학요리사 진은영에게 고맙다. 니체, 들뢰즈, 칸트의 서당 주변을 삼년 정도 어슬렁거리며 들었던 것들이 조금 도움이 됐다. 용감하고 매력적인 칸트씨. 일단 정리를 하다보니, 나와 세계의 존재근원을 파헤치는 철학공부를 위해서 칸트는 반드시 통과해야할 관문이었다. 니체가 망치로 부수어버리려고 했던 주체성, 동일성의 철학은, 니체보다 한 세기전 먼저 신의 죽음을 알렸던 칸트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 칸트 고유의 문제의식 칸트는 이렇게 물었다. ‘인간 스스로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참된 인식의 방법과 절차는 무엇이냐’ 이는 중세인은 결코 물을 필요가 없었던 질문이었다. 칸트는 초월철학 (율법에는 어떤 질문도 비판도 예외도 허용되지 않음)을 일소하고 비판철학(선험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 순수이성비판이란? 선험철학은 어떤 외적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는다. 내재적으로 고유한 법칙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성 자신이 이성능력을 비판하고 판정하는 법관으로 나서서 이성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의 범위와 한계를 정하자.’ 그러니까, 경험이나 신과 같은 외적인 것들에 근거해 인간 이성의 인식능력을 결정하지 말고 이성 자신의 순수한 법칙을 통해 이성의 능력을 결정하자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대상에 대해 입법성을 지닌 자, 명령하는 자라는 자신의 독창적인 통찰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유’에 비교했다. 칸트는 선험적 통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의 ‘주체성’ 개념을 확고히 확립했다.
* 칸트의 선험적 변증론에는 두 가지 주장이 동시에 들어 있다. 1.중세의 허구적 초월성을 거부하는 웅변적 혁명성 2.경찰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지침을 널리 계도하는 반동성. 이와 같은 두 개의 유럽, 두 개의 근대성이 칸트철학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212)
* 니체 vs 칸트
=>니체는 전 저작에 걸쳐 칸트를 언급하며 이 철학적 거장과의 대결의식을 드러낸다. 칼 야스퍼스는 니체철학의 근본토대가 칸트적 비판철학의 변형에서 얻어졌다고 했다. 니체는 선험적 변증론에 나타난 칸트의 기본전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제1원인과 인과성의 숨겨진 결탁을 비판함으로써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같이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개념을 창조했다. 니체가 칸트를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논점은 인과개념이 일종의 ‘실체성’을 전제한다는 것.
->칸트. 제1원인은 실체성을 가정했다. 도덕의 영역에서는 일종의 선험적 자유로서 자유롭게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도덕적인 독립주체다. 하지만 이 주체는 활동과 분리된 채 따로 존재할 수 없다.(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와 다름) 독립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체는 맞다.
=>근대철학은 신의 죽음을 진리로 수용했다. 이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인간의 길, 과학의 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근대인은 ‘신’이라는 불변하는 제1의 원인을 제거하고 ‘과학적 인과법칙’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의 철학적 정당화가 칸트의 이율배반 논의다. 칸트가 제시하는 방식은 식민지적 분할통치와 같다. 전통적인 종교의 논리, 철학적 제1원인의 법칙으로 ‘도덕과 실천의 영역’을 통치하고, 인과의 법칙으로 ‘과학과 근대학문’의 영역을 통치하자는 협상이다.
->니체는 세계의 사건들은 전부 보편적인 인과율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음을 가정했다. ‘중세인들이 세계의 영원한 창조주로서 신을 숭배하며 자연에서 신의 지문을 발견했다면, 근대인들은 세계의 영원한 작동원리인 인과법칙을 숭배하며 과학적 인과성의 도장을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것이다. 근대인들은 중세인들과 다를 바 없이 동일성의 철학을 신봉하느라 자연의 활발한 생성과 운동 포착 못한다’고 비판했다.
=>칸트는 이성이 자아, 세계, 신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과학적 경험세계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경험적 현상세계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니체는, 경험세계는 우리가 생리적, 본능적, 사회 역사적 차원에서 구성해낸 일종의 퍼스펙티브(관점, 전망)다. 또 우리에겐 하나의 보편적 환상이 아니라 우리의 활동에 의해 무한히 증식하는 환상들, 니체 용어로 수많은 퍼스펙티브의 생산이 가능하다. 생의 고양을 위해 이런 생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즉 니체는 칸트의 환상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적 환상의 빈곤함에 반대한 것이다.
=>칸트는 회의주의에 대한 공포에 떨며 인식의 확실하고 견고한 지반을 찾는데 관심 가졌다. 칸트에게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사유형식, 개별적 경험의 변덕이나 변화 속에 독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 안전한 사유형식, 사람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단 하나의 환상이 필요했다.
-> 니체는 칸트가 ‘불임의 철학’이라고 비판했다. 니체는 환상이 아니라 환상들, 무한히 다양한 방향으로 열린 수많은 창들을 원했다.
* 칸트의 영화적 기억이론에 대한 베르그손의 비판
=> 칸트의 시간관. 시간은 하나의 점을 연결한 직선으로 간주. 이에 기초해 기억은 그 점들에 보관된 이미지들의 전체로 간주되는 것. 이는 공간화 된 시간이해다. 시간의 질을 무시하고 시간을 양화. 시간을 공간표상으로 뒤바꾼 것이다.
-> 베르그손은 칸트의 시간관이 인간의 풍부한 시간경험을 경직되고 빈곤하게 했다고 비판했다. 우리의 기억이 분리된 의식필름들의 집합이라는 견해에 반대했다. 우리의 의식이나 기억은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다. 마들렌 과자를 통한 콩브레 체험은 칸트철학의 반대사례다. 베르그손은 과거가 필름처럼 고정된 형태로 보존되어 점점 쌓여가는 게 아니라 눈길에서 굴려지는 눈사람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지는 것. 과거의 순간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단단히 뭉쳐서 더 이상 분리할 수 없게 된 하나의 전체이다. 고로 완전한 기억, 완벽한 회상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뭉친 과거를 다시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매번 새로운 과거를 체험한다는 점이다. 우리를 회한에 떨게 하는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고정된 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노래 한 소절, 마들렌 한 조각, 시내번스 번호 등 사소한 계기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반복한다. 새로운 차이를 내며 반복되는 시간 (= 니체 영원회귀의 시간)
* 네그리-하트의 비판
“모든 계몽주의의 구름이나 선험철학이라는 칸트적 몽상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이들 반-칸트주의는 의회나 유엔과 같은 보편적 대표체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경제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인본주의나 선험철학이 제안하는 ‘약화된 초월성’에 만족하지 말라.
*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의 비판
칸트류의 계몽적 사유가 어떤 특징과 심각한 폐해를 지니는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세계인식의 감성적 틀이 수량적 모델로 제한되어 이해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물들은 이 제한에 따를 밖에 없다. 계산가능성과 유용성의 척도에 들어맞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아가 결국에는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은 가상으로 여겨진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해 달성되는 선험철학은 인간이 감성과 오성을 통해 대상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졌다는 철학적 정당화다.
칸트철학이 인간정신의 왜소화라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신과 세계를 형편없이 축소했다. 정신은 수학적 장치로 환원, 세계는 이 장치가 찍어내는 생산물로 축소됐다는 것. “모든 학문적 판단은 언제나 이성이 대상 속에 주입해 놓은 것만을 단순히 반복하기 때문이다.”
* 푸코와 들뢰즈의 칸트의 혁명적 이해
칸트는 선험적 자유가 현상세계의 인과법칙에 일방적 규정이 아니라, 새로운 인과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자발적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칸트의 혁명적 이해가능성은 푸코, 들뢰즈를 통해 밝혀졌다.
푸코와 들뢰즈는 칸트를 비판철학자로서 높이 평가했다. “칸트는 최초의 총체적 비판을 기획한 철학자다.” 우리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태도(에토스)의 끊임없는 활성화, 즉 비판정신이 진정한 계몽의 철학적 에토스다. 들뢰즈는 진정한 자유는 문제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들뢰즈는 자신의 고유한 능력 너머에 있는 대상을 만났을 때 능력 속에서 진정으로 발생하는 것은 본성의 변화라는 점에 주목한다. 능력의 초험적 사용에서 구상력은 원래 자기에게 한정된 총괄능력 이상으로 여분의 양적인 확장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했던 능력과는 다른 능력으로 변모한다. 즉, 감성계에서 사용되는 총괄의 능력과 질적으로 완전히 상이한 능력인 무한을 표상하는 능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같은 능력의 초험적 사용, 칸트적 주제를 통해 들뢰즈는 능력의 본성이든 대상의 본성이든 외부를 사유하는 철학은 고정된 여하한 본성이나 경계도 거부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들뢰즈에 따르면 칸트가 정언명법을 통해 말하는 것은 단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도 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여 행위해야 한다는 사실, 즉 자기입법의 사실이 의무로 정해져 있다는 것뿐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의무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매순간 자유로울 것만을 의무로 규정하는 윤리학으로 변모한다.
칸트에 따르면 대상과 무관한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한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을 느낄 때이다. 미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대상에 대해 입법하는 게 아니라 능력들 자신에 대해 입법한다.(장미와 로댕조각상을 보고 느끼는 미의 인식은 저마다 다르다.) 기쁨은 대상에서 오는 게 아니라 능력들의 자유로운 활동(자기입법성)에서 온다. 그리고 입법은 늘 위법을 동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