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도시가 ‘불행’과 ‘결함’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보들레르가 노래한 ‘파리의 우울’은 ‘서울의 우울’과도 들어맞는다. “1848년 이후의 유럽은 모든 인간적 관계의 외화(外化) 및 물화(物化), 분업, 분해, 엄격한 전문화, 사회적인 연결의 불투명화, 개인의 증대되는 소외와 반항 등의 모순들과 더불어 완전히 발전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 세계로 진입하였다.” 6.25 이후 한국사회도 다르지 않았다. 근대화 바람과 개발지상주의 속에서 노동착취와 인간소외의 시동이 걸리던 시기에 기형도는 태어났다. 경제성장의 거센 회오리에 휘말려 함께 성장했고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 삶을 목도하며 어른이 되었다.
기형도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풍으로 누워계셨고 어머니는 열무 팔러 다녔다. 누이가 공장에 다녔고 일찍 죽었다. 기형도는 백혈병 초기였다. 한 쪽 귀는 거의 청력을 잃을 지경이었고, 고혈압에 시달렸다. 세상이 온통 ‘검은 페이지’라고 기형도는 말했다. 그런 그이기에 자본에 취해가는 도시의 암울한 상황을 멋진 언어로 정련해낸 보들레르를 시적 스승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기형도는 기자였다. “그의 온몸은 시대의 우울을 감지하는 촉수였고, 레이더였고, 그런 우울은 그의 정신과 육신을 상하게 했다.”(이문재) 기형도의 청춘의 우울은 시대의 우울로 확장됐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
보들레르의 시가 다소 가학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면, 기형도의 시는 자학적인 이미지들이 강조된다. 저 쪽에서 걸어오는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인다.”고 묘사하고 행인들을 보고는
“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 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묻는다.
‘어느 푸른 저녁’에는 “검고 마른 나무”들이 서있고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배회한다.
어느 저녁의 정거장에선 “검은 구름”을 본다.(정거장에서의 충고)
기형도의 도시는 한 없이 우울하다.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듯이 어떤 생각도 그렇고 스스로도 그렇다. 하지만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오후 4시의 희망)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한다. 거리에 죽어 쓰러진 한 사내를 보며 “어느 한 때 분명 쓸모가 있었을 저 어깨의 근육”(죽은 구름)을 애도하고, “휴일의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흔해빠진 독서)며 애타한다. 그에게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이런 거다.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한 건물” 유리창 너머 한 사내를 본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19세기 파리에서 보들레르가 그랬듯이, 21세기 서울의 기형도 역시 거리의 고통에 자주 목이 메었다.
# 기형도와 멜랑콜리
빌어먹을 도시! 도시는 왜 이리 우울한가. “내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는 기형도의 고백처럼, 도시의 삶은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도시의 삶은 끊임없는 자극으로 우리에게 배고픔, 욕망만을 독촉한다. 빼곡한 건물, 발에 치이는 사람, 현란한 상품, 그 풍요 속에서 더욱 허기가 지고 목이 마르고 고독에 휩싸인다.
벤야민은 현대 도시 경험의 핵심을 군중과의 조우라고 말했다. “흩날리며 잡히지 않는 도시의 군중은 ‘현대성’의 명확한 모티프이다. 군중 속에서 현대의 개인은 자신을 상실할 수 있고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군중은 멜랑콜리의 소굴이 된다. 군중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며 “현대도시 특유한 고독”의 경험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보들레르가 “구름 속을 외롭게 방랑한다.”고 썼을 때 그것은 벤야민에게 “군중 속을 외롭게 방랑한다”를 의미했다.
벤야민은 군중 속에서 작동하는 단일성, 익명성, 수동성, 순응주의 같은 비인간적 경향들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도시 대중은 개인으로서 타인들의 곤경에 무관심하고, 소비자로서 상품 습득에 의존하는 부르주아적 주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중은 생산양식 속의 자신의 위치가 아니라 소비 참여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책자가 눈으로 즐겼던 군중이라는 주물틀은 70년 후에 민족공동체로 이동했다.” 현대도시인의 진실은 마침내 나치운동의 지지자이자 협력자라는 비인간적인 체현으로 폭로되었다. 벤야민은 아케이드 프로젝트 초기에 보여주었던 도시인의 급진적 가능성에 대한 다소 단순한 확신을 10년 뒤 그들의 일차원성에 대한 비난으로 바꾸었다. ‘도시’라는 삶의 터전이 타인에의 무관심과 자아상실을 가져다주었고, 그렇게 파편화된 개인은 ‘종속에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파시즘의 대중심리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다.
도시는 영혼을 확실히 잠식했다. 도시가 개인들의 ‘내적생활’에 미친 영향을 집중 탐구한 짐멜의 시선에서 보자. <짐멜의 모더니티>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짐멜은 “도시거주자는 단지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라며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현상은 둔감함과 속내 감추기”라고 언급한다.
“무감각한 태도만큼 무조건적으로 도시에 의해 규정된 심리현상은 없다. 무감각한 태도는 사물 사이 ‘구별’에 대한 무관심이다. 무감각한 태도는 정신적 둔함 때문에 사물 사이의 구별이 지각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구별의 가치와 의미가 없는 것으로 경험된다는 의미다.”
둔감함은 사물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사물 자체를 공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속내감추기 역시 무수한 관계에 대한 내적반응을 피하기 위한 독특한 정서적 양식이다. 반면 대도시는 화폐 교역의 중심이며 자유의 상징이다. 결국 이를 바탕으로 대도시인은 질적 특수화를 추진한다. 개인주의에 대한 선망이 자리 잡는다.
그런데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무관심해진다는 것은 무기력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도시에서 마주치는 것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개인은 어떠한 관심과 이해 표시를 억제해야 한다. 대도시에서는 응시와 되돌아오는 시선을 회피하는 것이 최고다. 삶이 ‘방어적인 전략’이 됨에 따라 대도시의 경험은 ‘쓸모없는 충돌의 회피’에 기반 하게 된다. 외부의 자극에 대해 스위치를 끄고 자아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고독한 섬이 된다. 그 어떤 것에도 진정한 삶의 활력을 느끼지 못하는 '타성의 원천'으로서의 멜랑콜리. 이것이야 말로 무사태평한 웃음 속에서 메아리치는 현대인의 질병이 된다.
#멜랑콜리와 그녀
21세기 대한민국은 반도의 땅 전역이 ‘도시화’ 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전국에 도로와 이마트만 남을 것이란 우려의 소리도 들린다. 지방의 특색도 거리의 특징도 사라져 간다. 서울 신촌이나 광주 전대 앞이나 번화함의 차이만 있을 뿐 대동소이하다. 나이키가 있고 더페이스샵이 있고 던킨도너츠가 있고 GS25가 있고 비슷비슷한 옷과 악세서리를 파는 매장이 있다. 구멍가게가 사라졌다. 동네 가족사를 꿰고 있는 아저씨에게 이제는 물건을 사지 못한다. 일찌감치 아웃사이더가 된 무표정한 청춘들이 바코드를 찍는 차가운 거래만 오간다.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가슴을 열고 대화를 하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어도 자신의 무릎 위에 냉큼 올려놓아주는 이가 없다. 저마다 게임으로 독서로 TV시청으로 회화공부로 손안의 작은 세상에 자신을 빠뜨린다. 지하철 플랫폼 의자에 앉아 있으려면 좋으나 싫으나 커다란 광고화면을 ‘반복적으로’ 보게끔 설계돼 있다. 시외버스만이 아니라 시내버스 안에도 네모난 액정화면이 눈길을 몰수해 간다. 예전처럼 옆 자리에 앉은 사람과 말벗을 하다가 로맨스가 싹트는 소설 같은 설정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도시의 빌딩이 높아져갈수록 각종 시설이 첨단화될수록 도시인의 활기는 사라져간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은 여기저기서 메아리치지만 감응이 없는 기계음일 뿐이다. 도시 전체가 우울의 늪지로 변해간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 죽는 사람도 많지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많다. 자못 처연하고 쓸쓸한 얼굴들이다. 서로가 못 본 척 외면한다. 바로 앞에 임산부가 서 있어도 도통 일어나지 않는 지치고 피곤한 십대들.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 400일 넘는 투쟁현장을 지나치면서 대자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여의도 증권맨들.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공개되는 실적경쟁에 하루하루 쫓기며 사는 샐러리맨들, 입시지옥, 취업전쟁에 시달리는 고달픈 인생들. 도시의 보행자들은 술집으로 백화점으로 흩어져 ‘불안’과 ‘우울’을 ‘고단함’을 잠시 잊는다.
인정머리 없는 삶이 무한 증식하는 도시. 영혼 없는 인간들이 활개 치는 도시. 채우지 못하는 욕망에 쩌는 가슴만 늘어 가는 도시. 자꾸 가난한 사람을 쫓아내는 도시. 그래서 가난해지는 도시. 그녀는 질 나쁜 작가의 일일연속극 보듯, 지긋지긋한 도시를 매일 지켜보며 때로 가슴치고 때로 웃고 있다. 다만 넌더리나는 서울을 버리는 것, 그러니까 서울‘로부터의 탈출’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사랑하는 서울에 뒷등을 보이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리는 그녀는 조금 다른 욕망이 있을 뿐이다. 좋은 도시를 향한 희미한 애착. 도시가 낳은 인생의 패배자들, 그들의 지친 가슴을 보듬어 주었으면. 손잡고 일으켰으면. 보들레르가 도시의 고통에 몸을 떨고 기형도가 도시인의 외로움에 신음했던 것처럼, 모두가 시인-되기를 할 수는 없을까. 서로의 삶에 좀 더 따뜻한 눈길이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왜 다들 허겁지겁 살아가게 됐을까. 왜 모두 부자가 돼야 하는가.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에 나오는 내레이션처럼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될 수는 진정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