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중층결정, 죽음충동, 그리고 혁명. 내겐 삶을 구성하는 원리로 읽힌다. 니체의 계보학에서 사건의 반복에 민감해야한다는 걸 배웠다. 그 말이 뇌리에 박힌 건 나의 삶에 반복되는 실존의 고민과 고통들 때문이었다. 개인사이건 사회적문제건 ‘반복’을 겪을 때면, 아니 당할 때면 내가 꼭 바보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복을 줄 세워 놓고 돌파지점을 애써 고민하곤 했다. 그런데 계보학에서 반복 분석은 사건들의 점진적 진보곡선을 추적하는 게 아니다. 어떤 역사적 배치 속에서 탄생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의 반복. 박정수가 강의안 1면 톱으로 다룬 반복. ‘왜 반복이 중요한가?’라는 헤드라인이 가슴을 때린다. 우리는 보통 반복을 과거의 어떤 것이 차이를 낳는 시간의 부침을 견디고 동일하게 되돌아오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의 회귀를 욕망과 억압의 차원에서 정의했다. 억압된 것은 관념이나 기억 같은 표상이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의 구조적 억압은 ‘증상’이다. 프로이트는 욕망의 억압으로서 증상의 반복, 그 원인을 ‘어떤 목적을 행해서’라는 목적론으로 사고하지 않았다. 반복을 생명의 무한한 지속양태로 보았다. 죽음충동을 단순히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나 생명의 본성의 측면을 넘어선, 쾌락원칙이 현실원칙(억압)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무한 재회전시키는 힘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반복이랑 프로이트의 반복이랑 개념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모르겠다. (‘타자’라는 개념도 철학자마다 정의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 생각나면서 문득 혼란스럽다.) 니체-푸코는 배치라는 조건을 변화시키면 반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어떤 ‘실천적 지침’을 제공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비슷하다가 달라진다. 정신분석에서 증상은 원인들의 구조화된 계열을 변화시키면 치료된다. 이것이 배치를 바꾸는 실천의 한 방편일 것이다. 그런데 죽음충동이 문제다. 억압된 욕망을 증상적 억압으로 반복시키는 것, 즉 ‘증상의 반복’은 죽음충동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생명의 무한지속양태라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충동이 항시적인 실존의 동력이란 말이 된다. 내가 어떤 증상으로서의 반복의 원인계열을 낱낱이 분석하고 습속을 타파하고 배치를 바꾸어서 치료해도 또 다른 증상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건가? 반복은 생명에 내재하는 욕망이니까? ‘증상’ 없는 삶이 있을 수 없다는 걸까.
라캉은 증상을 해석했음에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향락이란 답을 제시한다. 향락은 죽음충동의 원리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반복하는 쾌락, 즉 증상을 즐기는 것이다. 증상은 암호회된 메시지일뿐 아니라 동시에 주체가 자신의 향락을 조직하는 한 가지 방편이다. 지젝은 향락을 지속시키는 것은 환상이라고 본다. 이것을 증환이라고 했다. 대타자에 근거한 증상이 아니라 환상에 근거한 증상. 의미를 전달하는 증상이 아니라 즐기는 증상. 사회적 증환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는 향락의 형태를 취한다. 이데올로기는 표상의 형식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향락의 형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이념의 형식이 아니다. 욕망과 향락의 형식이다."
지젝을 이해하는데 ‘상징적 주체화’가 핵심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상징적 주체화는 ‘오인’과 ‘반복’으로 이뤄지고. 지젝의 사유에서는 오인이 생산적인 심급으로 작용한다. 오인은 진리의 최종적인 도래의 내재적인 조건이 된다. 산은 물이었다가 산은 산이되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반복. ‘오인의 긍정성’이 새롭다.
지젝의 반복. 지젝에게 혁명은 ‘역사의 객관적 필연’을 주체화하는 행위다. 그 행위는 반복의 형식을 통해서만 필연화 된다. 처음의 혁명은 실수처럼 나타나고 두 번째는 필연으로 나타난다. 지젝은 혁명의 조건은 객관적인 게 아니라 주체적이라고 강조한다.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혁명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최초의 권력 장악은 필연적으로 시기상조의 것이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는다는 얘기다.
지젝에게 혁명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국가권력은 나머지 경제적, 사회적, 가족적, 성적권력을 중층결정 하는 은유권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알튀세르는 혁명의 조건은 지배적인 모순 외부의 객관적 상황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복합적 전체를 이루는 모순들이 중층결정 되는 방식 자체의 우연성에 있다. 선험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 실천의 제 계기들 속에서 우연적으로 결정된다. 정치적 실천 속에서 포착하고 활용해야 하는 결정적 고리는 바로 응축이다.
중층결정을 과잉결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떤 표상이 다른 표상들의 강도를 획득하는 방식이라 그렇다. 지젝은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으로 국가권력의 잉여성, 국가권력 장악의 우연성을 보았고, 알튀세르는 혁명의 조건에 내재한 우연성을 사유하면서도 그 우연성의 출현을 위한 강도형성(실천)을 사유했다.
은유는 나의 이름이다.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 중층결정적 요소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왜 삶은 첫눈이고, 시궁창이고, 혁명이고, 칼날이고, 리듬일까. 은유란 말이 가진 잉여, 무정형, 열림을 사랑했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텅 빈 기표'로서의 주체인가? 4년 전, 은유 초기에 ‘누구라도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천착했다면 지금은 ‘누구라도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암튼 ‘은유’를 혁명이론으로 적용시킨 지젝에게 급친밀감을 느끼면서도 알튀세르의 혁명이론에 더 끌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