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설을 읽기 전에, 문학은 왜 필요하고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 한번쯤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왜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감동을 통한 인식의 물꼬 틔우기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시 한 편이나 소설들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좋은 작품이란 나라는 존재에 ‘막힌 의식’, 일상의 틀에 ‘갇힌 의식’을 틔워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진부하고 틀에 박힌 관점을 벗어나 독창적 시선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작품, 그러니까 늘 생각하던 사고의 패턴을 바꿔주지 않는다면 좋은 작품이 아닌 것이다.
또한 당대의 첨예한 사회모순을 다뤘다하여 문학의 복무에 충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읽고 나면 마음만 천근만근 무겁고 심난해지는 작품도 있다. 이주노동자가 최저 임금에 착취되고 그나마도 체불임금을 떼이는 비참한 삶을 산다는 것쯤은 떠도는 뉴스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더 상세히 알게 됐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길가다 이주노동자가 지나가면 더 측은하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미안한 건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동정하면 불쾌할 것 같다. 그래서 한두 편 만 어설프게 읽는 것은 좋지 않다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편의 소설이 동정심에서 멈추고 고정불변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주노동자)이해의 한 통과지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말을 빌어보자. “좋은 작품은 억압하지 않는다. 대신 억압을 생각하게 해준다.” 문학의 진품명품을 가늠하는 척도로 손색이 없다는 판단이다. 어떤 작품을 읽은 후 나의 눈에 걸리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것, 거기다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깊어질 수 있다면, 즉 그들이 처한 물적 토대의 깊은 곳, 그들을 삶을 한계지대로 몰고 간 더 근원적인 힘과 구조를 탐색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 노동문학과 이주노동자를 다룬 문학은 같을까 다를까
김재영 <코끼리> <아홉개의 푸른 쏘냐> 손홍규의 <이무기사냥꾼> 등 3편의 작품을 읽었다. 소싯적 읽었던 ‘노동문학’ 작품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박노해, 안재성, 방현석, 조세희, 공선옥 등을 통해 접한 노동현장의 이야기는 퍽이나 징하고도 치열했다. 한 장 한 장이 무겁게 넘어가던 책들. 덕분에 이주노동자의 삶을 다룬 작품이 낯설지가 않다. 불이 나서 목숨을 잃고, 어렵사리 모은 막내아들의 수술비용을 파키스탄 청년이 훔쳐 마을을 떠나고, 베트남 아저씨의 손가락이 무참히 잘리고 ‘손가락 무덤’에는 다른 손가락들이 부패돼 뼈만 남아 있고. 또 힘든 와중에 지푸라기처럼 잡은 남자의 배신 등등 하층민들의 고단한 사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이는 ‘완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게 아니라 ‘방글라데시에서 안산’으로 지명과 피부색만 바뀌었을 뿐 매우 비슷한 내러티브다. 가장 열악한 일터에 우리나라 노동자 대신 이주노동자가 자리한 셈이다.
또 ‘노동시장’에서 튕겨져 나간 여성이 ‘매매춘’이라는 자본주의의 늪으로 유입되는 상황도 흡사하다. <아홉개의 푸른 쏘냐>의 아름다운 러시아 아가씨 쏘냐는 ‘러시아 전통 무용단’에서 일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가 ‘자본주의 찌꺼기가 쌓이고 쌓여 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사창가’로 내몰린다. 이러한 내용들은 노동자의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노동현실이나 노동문제를 묘사하고 미약하나마 극복을 전망한다는 점에서 노동문학으로 읽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를 다룬 작품에서는 이 같은 억압적 상황의 근원이 (악랄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라는 ‘계급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를 억압하는 실체는 ‘사장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자문학과 갈린다. 이주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도 반목하고 배척한다. 연대를 모색하지 않는다. <이무기사냥꾼>에 묘사된 상황대로 “고향 떠나 밥 빌어먹고 사는 건 똑같은데도”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또 그들을 괄시한다. “너희가 하루치만 줘도 밤샘작업을 하니까 우리 일자리 빼앗겼다”고 미워한다. 차별하고 폄하한다. ‘시커먼 노동자들’ ‘깜둥이들’이라며 비하한다.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네팔인 아버지와 조선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출생신고도 못해 문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주노동자 2세’는 배움의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등 또 다른 소외의 고리로 연결된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이주노동자는 이 복잡다단한 억압의 연쇄에 압도당해 질식당할 위기에 놓인다. 노동자문학이 자본가에 맞서는 노동자의 각성과 연대투쟁을 통한 억압의 사슬 돌파라는 해법을 갖고 있었다면, 이주노동자를 다룬 작품은 상대적으로 무기력하다. 답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최소한의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인정을 바라느니 도둑질을 배우고 (코끼리), 죽은 시늉을 도모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이무기사냥꾼). 그들은 나약함의 방식으로 생존하는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