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더라. 중요한 것은 언어로 전달되지 않더라. 말의 소용이 닿지 않는 부분만이 내 것이더라. 살면서 말로 누군가를 설득해본 적도, 끌림을 당해본 적도 없다. 말은 장황해질수록 비루해진다. 설명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든다. 기표는 기의를 배반한다. 말하지 말지어다. 진실은, 진리는, 사랑은, 모든 위대한 것은 자체 발광한다. 죽비같은 깨우침을 선사한다. 터질듯한 설렘을 유발한다. 눈빛의 깊이, 침묵의 파장, 손의 떨림, 서로를 데우는 온기. 그런 비언어적 요소들이 온전한 소통을 이룬다. 그러니 영화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공효진)의 컴퓨터에 붙어 있던 탐나는 글귀를 빌어 주장하고 싶다. '소통에 목을 매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
헌데, 김연수는 소통에 목을 매고싶은지 모르겠다. 소통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묻는 양자택일적 접근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내면의 우주를 소통의 탐구대상으로 삼았다. 비언어적소통의 세계. 에너지의 파장을 심층 탐구한다. 인간의 언어를 배제하고 들어가서 그런지, 그의 작품은 말을 배우기 전의 아이처럼 착하고 유순한 구석이 있다. 소설가 김연수를 이름부터 알았고, 한겨레에 쓴 에세이를 읽었고, 작가지망생의 수첩에 끼워진 사진을 보았고, <모두에게 복된 새해>라는 단편을 처음으로 접했고, 두번 째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는 젖어들었다. 결국 김연수의 소설을 단편으로 두 편 읽었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소설에 짙게 깔린 '순정어림'의 정조 때문이다.
꽃은 꽃이로되 종이카네이션 같이 착하고 밋밋한 이야기라서 바라보게만 됐던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 비하면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는 비로소 독한 사랑의 향기를 내뿜고 눈물의 짠내음이 코를 찔렀다. 오십대 후반의 소설가가 작가대회 일정차 13년 전 옛사랑을 찾아 한국을 방문한다. 그녀는 39세 때 열일곱 연하의 한국유학생과 사랑했다. 몹시도. 사랑했지만 이름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다. 그것을 그가 죽고 나서 알았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만 왜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형성하는 세포들은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케이케이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이라는 걸, 양쪽에 하나씩 두개의 얼굴이라는 것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런 그녀는 케이케이와의 사랑을 설명할 길이 도무지 없다. 케이케이의 유년시절 추억이 담긴 곳 밤메. 통역을 맡은 해피(혜미)는 밤메를 알지 못한다. 지도에도 지식인에도 없기 때문이다. '밤메'가 '밤뫼'로 '밤뫼'에서 '방미'로 해석된다. 그녀를 엉뚱한 산업단지에 데려간다. '시체의 수영'도 모른다. 송장헤엄도 배영도 아닌 '시체의 수영'인데. 영어로는 맞지만 뜻은 그게 아니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를 어떤 통역사가 '나는 알아요'로 해석하듯 그렇게 문자 그대로 풀어내니 맞지만 그게 아니다. 틀리다. 답답하다.
'왜 시체의 수영이라고 말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어. 당신은 내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몰라.'
분통을 터뜨리는 자신의 모습이 '과거에만 매달리는 미친 할머니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안다. 그래서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 도시'를 떠나고 싶어한다. 개개인의 추억과 기억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모의 땅 도시를 말이다.
"실제로 통역 일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저도 사실 도착하자마자 여기가 밤메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방미가 제아무리 밤메와 비슷한 발음이라고 해도 밤메가 될 수는 없는 거죠. 맞아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케이케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저는 딴 생각을 하느라 당신의 말을 자꾸만 놓쳤던 거예요. 옛날에 내 아이에게도 그랬듯이. 죄송합니다."
해피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다. 해피는 밤낮으로 보채기만 대는 세살바기 아이를 '인생의 군살'처럼 느꼈다. 밤새 아이에게 시달리면 수면욕을 방해받으면 그것은 그 유명한 잠고문이된다. 그것이 한달이고 일년이고 이어질 때 어떤 위대한 모성이 그렇지 않을수 있을까. 그런데 그만 아이를 잃고 말았다. 해피는 지구위에 홀로선 고통을 느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먹는다.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사랑한 사람을 잃어본 그녀와 해피는 조금씩 '통'한다.
'무슨 낙으로 사니..' 할 때 '낙'은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 가슴에 맺힌 '한'을 번역하지 못하듯이. 한국어든 영어든 그냥 단순한 음성적인 신호에 불과하다.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어려운 '낙'을 그녀는 얼핏 이해한다. "그건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단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아마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 같은 것'도 포함돼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낙은 그렇다. 우리가 사는 낙은 90%가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들로 구성돼 있다. 볼 수 없는 하지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낙을 설명할 수 없으면 삶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어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삶의 질문에 답하는 자, 답을 찾기 위해 '질문'하는 자가 아니던가. 좋은 질문은 정답에 이르는 다리가 된다.
작년인가 암흑물질을 연구하는 서울대암흑물질연구팀 김박사를 만났다. 우리나라에 암흑물질 연구가 시작된 건 10년 전. 암흑물질을 연구하기 위해 강원도 양양의 점봉산 줄기의 지하 700미터에 실험장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이곳은 양수발전소측으로부터 공간의 일부분을 허가맡은 곳이었다. 방사선과 중성자 등이 만드는 가짜 윔프의 신호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가급적 땅 속 아주 깊숙한 곳이 필요하단다. 그는 암흑물질 연구를 위해 적합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전국 폐광 등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안정적 여건이 확보된 것을 기뻐했고 연구에 탄력을 받아 세계 유수의 과학전문지 Science에 연구성과가 게재 되는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었다. 자동차를 타고도 한참을 들어가는 지하땅굴과 인근 들판의 슬레이트 가건물 연구실을 오가며 눈이오나 비가오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전세계 내로라 하는 석학들이 매달리는 일이고, 평생을 가도 밝혀질 가능성이 현재로선 극히 드문 일이지만 자부심과 열정을 갖고 매진하고 있었다.
그 때 보았던 '한없는 기다림의 굳은 절개'를 김연수에게도 느낀다. 깊은 사유의 굴을 파고 들어앉은 김연수 박사도 소통의 암흑물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작가로서 생을 걸고 매달리고 있다.'불가능함을 가능함의 조건'으로 삼은 그 도저함. 통역사는 통역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그 도도함. 아무래도 김연수를 형성하는 세포는 '소통'을 아는 걸까. 그게 아니면 그의 소설은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가. 소통의 빛으로 유혹하는가. 왜 다시금 소통의 짜릿함에 미련을 갖게 만드는가. 소통에 목을 매느니 목을 매고 싶었던 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