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시작돼 500일 넘게 이어져 온 이랜드 사태가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됐다. 비정규직법을 회피하기 위한 이랜드그룹의 계산 업무 외주화와 대량 해고에 맞서 지난해 6월 30일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한 지 17개월여 만이다. 노사양측은 노조 및 간부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철회 및 징계 해고자의 일부 복직, 비정규직 고용 안정 등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랜드 사태에서 보듯이 오늘날 노동운동은 ‘노동을 위한 투쟁운동’이다. 누구나 오늘날 노동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말하고 고용안정을 지상과제로 삼는다. 일자리를 약속하지 않는 정치가란 없다. 노동자들도 일하지 않은 자여 먹지도 말라고 외친다. 그런데 이와 상반되는 주장을 펴는 책이 있다. 독일의 좌파그룹 크리시스가 쓴 <노동을 거부하라>는 ‘노동’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쓴, 노동 사회에 대한 급진적 비판서이다.
내용은 읽어볼만 하다. 노동이 어떻게 신의 자리를 꿰차고 세계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 됐는가를 짚었다. 이른바 전인민의 노동자화. 물론 여기서 노동은 임금노동, 화폐화된 노동을 말한다. 똑같은 일도 '일을 한다'가 될 수 있고 '노동을 한다'가 될 수 있는데 자본의 흐름에 포획된 노예의 삶을 떨치란 얘길 것이다. 니체도 노동이 아닌 전쟁을 권했다. 미래를 낳지 못한 불모의 노동(삶)을 비판한 것이란 점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니체의 책이 희망을 주고 생의 의지를 고양시켰다면 이 책은 김영사에서 나오는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먹고살기 척박한 세상에 노동하지 않고 일하는 삶을 기획하라는 게, 다른 삶을 기획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토대가 구성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굶어줅을 수도 있는 너무 잔인한 요구인 것 같아서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학벌, 인맥, 돈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 '길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지 않은 길을 가라'고 무작정 원론적인 얘길 들이대는게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려진다. 숱한 자기계발서들이 저지르는 폭력.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본 외부의 삶을 구성하는 고난도 상상력과 창의력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건지 어떤 것인지 반드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정리되지 않는 부분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비자본적 삶을 살아가려 애쓰고 균열을 내는 이들이 결국 자본 외부의 삶을 모색하는 것일 테다. 최저생계비도 못되는 돈으로 끼니에 허덕이는 이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자살하는 청춘들,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싸우는 동지들 등 절실히 화폐화된 노동을 바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일단 미안한 마음을 품고,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의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노동은 계몽주의와 자본주의 시대를 통해 성장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모든 것들, 민주주의, 법, 사회국가, 정치, 나라, 계약, 상품, 시장 등은 그와 동일한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노동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생겨난 이후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다. 그 결과 이 개념은 허용치를 넘어 길을 잃어버렸다. 현대인에게 노동이나 돈은 중세 사람들의 신과 같다. 그들은 노동에 자신을 희생하고 내맡긴다. “노동은 자유나 죽음 혹은 사랑처럼 인간 존재의 중심개념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노동은 활동개념에 완전히 포섭되어 버렸다. 활동 혹은 작업보다 노동이 더 넓게 규정되고 있다. 추모노동, 관계노동, 돌봄노동, 양육노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노동이어야 하고 노동이고자 한다. 노동이 점점 모호한 것이 될수록 이데올로기적으로 작동한다. 오늘날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 말고는 우리의 행위를 파악할 수 있는 다른 범주를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무절제한 개념이 모든 활동을 노동의 지붕 아래로 포괄시켜버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임금노동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생활이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노동이 우리의 실존적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노동 없는 삶을 상상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시장경제를 벗어나는 모든 생각들은 오늘날 그저 환상이라고 치부된다. 돈, 노동, 가치와 긍정적으로 결별하는 것은 완전히 유토피아적인 공상으로만 여겨진다. 곧 초월적 페티시라 할 수 있다.
자본은 스스로가 노동이다. 노동과 자본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 둘은 자본축적을 위한 동일한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에 반대하는 자는 노동에도 반대해야 한다. 많은 성과를 내는 사람은 그만큼 많
이 즐길 수 있다. 이것이 현대사회 구성원들에게 통용되는 정언명법이다. “우선 노동을 하라, 그리고
즐겨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실업은 노동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사회적 하락과 연결되어 있다. 가치가 지배적인 법칙으로 수용되는 사회에서 실업은 탈가치화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업한 이들은 실제로 심리적 탈가치화의 충격을 겪는다. 실업은 망신이자, 약함, 무능력과 무가치로 여겨진다. 삶과 노동을 동일화시켜버렸다. 일자리가 없어지면 삶까지 공허하고 무의미해진다.
노동이 행해지는 것은 다만 그것이 임금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것도 질문해서는 안 된다. 노동은 부자유다. 노동은 삶을 충만하게 만들지 않는다. 노동은 실존의 고달픔이다. 노동하는 시간은 도난당한 삶의 시간이다. “사업장은 양심없는 인간유형이 만들어지는 장소이자 순응주의자의 출생지다.”
노동이라는 실제적 추상에 대한 투쟁을 펼쳐야 한다. 공공담론 속에서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개념과 원리들을 결정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노동존중을 노동경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노동을 경멸하게 함으로써 노동, 가치, 돈을 경시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노동의 대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 있는 작업과 영향을 개인적이고 집단적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것에서 곧바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과 돈에 대한 의무적인 요구를 넘어서는 더 많은 새로운 형태의 연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한때 이루었던 것을 부여잡고 있거나 다시 되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의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삶의 요구’를 위한 투쟁이 벌어져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려 한다”는 명제는 “우리는 잘살아 가려 한다.”는 문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노동의 권리에 대해 게으름의 권리를 대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인 빈둥거림. 곧 가치 창출이라는 강제에서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계획해야 한다. 느림과 효율성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의무적으로 해야 함 대신 여유로움을 확립해야 한다. 창조성과 생산성, 활동성과 연대가 미래 실천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