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타자를 사유한다는 것

[비포선셋책방]
이 가을, 문학을 벗삼아 '타자성과 소통'을 사유하고 있다.  오랜만에 소설도 읽고 김현선생님 책도 뒤적여 본다. '문학'이란 말에선 고색창연한 느낌이 우러난다. 우러르고 싶어지는 저 먼 나라. 문학평론가 고봉준이 민족문학과 아시아에 대해 쓴 글 <연대는 어떻게 가능하가>를 읽었다. 훌륭한 글이었다.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타자성만 재확인하는 소통, 위험하니 하지 말까?
“먼 곳에 대한 상상력이 증가할수록 가까운 곳에 대한 모멸감은 커지고, 가까운 곳에 대한 모멸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먼 곳에 대한 상상력은 확장된다.”(복도훈) 
눈먼 연대, 위험한 연대가 있다. 상호 타자성을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이 곧 연대의 불가능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말하기 이전에, 이 어떻게 라는 물음을 성실하게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의 가장 큰 낭패가 바로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을 확인할 경우다. 대다수가 소통에 좌절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위험한 소통. 이를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여기지 말고 거듭 시도하고 숙고할 것. ‘위험함’이 그것을 피하는 논거는 될 수는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교통사고를 당할 위험은 차를 피하는 순간에 가장 높다. 소통도 그것을 피하려 할 때 가장 큰 위험에 봉착한다고 본다.  

관계의 소통을 이끄는 힘은 무얼까?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해서 소통이 수월한 건 아니다. 공통사가 없는 개체들 사이에서도 연대는 가능하다. 공통의 경험은 연대의 한 매개일 뿐, 그 자체로 동력을 갖진 못한다. 참다운 기억의 연대든 낯선 것들 간의 연대이든, 관계를 이끄는 구성적 힘은 따로 있다. 바로 ‘이해와 소통’에 따른 교류다. 이해를 바탕으로 교류할 때라야 상대도 변하고 나도 변하는 소통이 가능하다. 또 소통의 출발점으로서 이해와 교류는 중심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특이점들이 강력한 중심일 때 시작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문제는 ‘단일한 중심’이지 중심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산시에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동사무소 개념의 공공기관이 크게 건립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안산시민의 다양한 교류가 펼쳐지고 있다.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이 게토화 되는 것을 막고 다문화중심지로 키우겠다는 안산시의 야심찬 프로젝트다. 나는 현명했다고 본다. 이웃 주민이 컴퓨터 배우는 이주노동자 여성의 아이를 돌봐주고, 한글을 가르치고, 또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운다. 함께 무언가를 뚝딱 만들고 해내고 부딪치면서 그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것을 보았다. 또 아시아인권문화연대에는 동남아시아권 언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통역할 수 있는 참여의 기회도 있다. 몇 시간 같이 있다고 무슨 대단한 소통이 있으랴 싶겠지만, 일단 일상이 섞여야 소통의 판이 짜여 지는 건 맞다. 

연대는 과연 다양성 인정의 문제일까? 종종 보편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이 동원되는 경우를 목격한다. “문학이 하는 일은 차이와 다양성을 지닌 생명체를 호명하는 것”이라는 발언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정은 일방적일 때 위계화 되고, 쌍방향일 때 자유주의로 전락한다.’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이미 존재하는 개체들의 실체성을 정당화함으로써 연대의 불가능성을 재확인할 뿐이다. 또 고유문화의 인정논리도 함정이 있다. 고유문화라고 해서 모든 것이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랍여성들에게 강요ㅚ는 가부장적 억압은 고유문화임이 분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긍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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