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시 리뷰 - 삶의 발화로

[글쓰기퍼주기]

그간은 기억의 말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삶의 발화단계로 넘어가야할 때입니다. 기억이 말하는 것과 삶이 말하는 것(피어나는 것)은 같기도 다르기도 합니다. 앞에 것이 기억의 방에서 꺼낸 정보와 사실 위주라면 뒤에 것은 삶에 대한 숙고와 진실 차원입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을 말풍선으로 띄워놓고 글을 써보세요. 글이 사적 고백을 넘어서 공적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요.

 

 

(스콜라스티카)

아버지의 예민함을 설명한 부분이 생생하게 와 닿네요. 특히 맞춤법 부분은 매우 놀라운데, 아버지가 국어선생님이신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와 계기로 토시 하나까지 점검하시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민함은 감각의 영역이거든요. 아버지처럼 태도의 영역은 깐깐했다.’라거나 정확함을 추구했다.’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요. 대물림되는 어떤 습성과 태도를 담기에 예민함이라는 단어는 적합지 않습니다. 글을 끌고 가는 키워드가 딱 맞는 표현이 아니라서, 글이 섬세하게 흐르는 듯싶지만 어딘가 전반적으로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줍니다.

 

 

타고난 예민함은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제일 먼저 달려 나왔고, 짐짓 모른 척 외면하며 침묵하며 지냈다.’ ‘사람 사이의 거리란 아무리 달려간들, 아무리 달려온들 어느 정도의 거리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는 없는 것임을 알겠다.’ 이런 문장은 언뜻 좋은데 뜻이 모호하고 보편타당한 이야기라 주제의식을 흐려요. 타고난 예민함이 대인관계에 벽을 만들었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외롭게 했다는 것,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면서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 이 소재라면 예민함이 얼마나 자기를 얼마나 외롭게 하는가의 보고서 성격이면 글의 문제의식이 더 살겠죠.

 

 

(슝슝)

심인성 실명.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해 보는 것을 거부하는 증상. 증상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대신 선택한 것. 스무 살, 열다섯 살 남매를 둔 아버지고, 결혼 20년 차 남편, 7급 공무원으로 10년 근무. 감정상실, 어느 날 시력상실. 현실의 눈을 감은 그가 사랑의 눈을 뜨다. ‘눈을 감아야만 그녀를 볼 수 있어요. 저는 눈을 감고서야 생생하게 살아났어요.’

 

 

감성을 상실한 사십대 남성이 자기해방의 탈출구로 꿈속으로 도피해 감성 주체로 살아난다. 글이 단순한 구조인데 본문에서는 선명하지가 않아요. 왜 그럴까요. K의 러브스토리 증언으로 대부분 할애하는데 그 내용이 다소 진부하고 장황하고요. 건조한 현실에 대비해서 꿈속 사랑이 조금 치명적이거나 몽환적이면 어땠을까요. 보색대비처럼 선명한 건 싸구려소설이라고 평소에 생각하지만 그렇게 쓰는 게 기본이고 그게 능란할 때 변주도 나오는 법이니 시도해볼만 하다고 봐요. 글쓰기는 더 낫게 실패하기. 슝슝님의 형식실험이 어디로 갈지 기대합니다.

 

 

(오늑)

공중에서 죽은 새들. 제목이 압도하네요. ‘탄생을 즐기는 그’ ‘하늘의 이성’ ‘아버지처럼 감싸주던 하늘의 공기이 부분이 초자아 아버지인가요. 살을 찢어 파고드는 거대한 힘으로서의 부성이요. 죽음으로 추락한 새들. 자식들 세상의 몰락과 폐허가 얼핏 그려지기는 하는데 시가 설명적이고 행간이 너무 넓어요. 더 섬세하고 치밀하게.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시선으로.

 

 

(바람도리)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이 들 때까지 죽고 싶었다.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한 시절이 선연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요점정리처럼. 문장도 표현도 구체적이고 참 좋은데 글이 개괄적이라서 힘을 못 받아요. 다 말하려고 하지 말고 한 장면만 잡아서 전체를, 한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마음이 힘들어서 여행을 하면 만나는 남자에게 기대게 되고 그럴수록 남자에게 상처받는 일이 꼭 생긴다.’이 교훈으로 주제를 좁혀서 이야기하면 여행이라는 위로의 허망함도, 세상이 가하는 농락도, 필자의 좌절도, 나쁜 남자의 악행도 다 들어갈 수 있어요. 나중에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까지 썼는데, 아름다운 마무리에 대한 강박 떨치세요. 내 좌절의 시간들에서 얻은 교훈을 하나씩 독립된 글로 분양하는 겁니다. 어느 한 장면 (외로울 때 남자에게 기댄 후의 몰락)만 잘 보여주겠다는 욕심으로, 한 편의 글에 한 편의 주제만 담아볼 단계입니다.

 

 

(소울리스)

 

너무 배가 부르면 소화될 때까지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배가 고프면 힘이 없어 책이 읽히지 않는 영원회귀의 딜레마에 맞서는 나름의 대책이다.’ 독서와 기후, 토양, 생리적 조건에 대한 고찰이었으면 좋았을 글입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나의 독서 습관의 이력을 늘어놓기만 하니 조금 밋밋해요. ‘들어찬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체온으로 데워진 후끈한 열기는 폐와 머리에 이물질을 꾸겨 넣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이런 표현 정확해요.

 

 

점심 먹고 나면 오전 같은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고 오후에는 참 많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이 문장은 참 많은 일들의 예시를 두 세 개는 들어주시고요. ‘혼자 놀기라는 테마로 독서와 고독의 이야기로 풀어도 좋고요. 책을 읽으려면 친구를 멀리해라. 뭐 이런 결론도 재밌겠네요.

 

 

(경덕쿵)

시 읽기와 라디오주파수에 관한 비유는 정말 딱 맞아떨어집니다. 감수성 섬세남 인정. 이별의 종류를 나열한 섬세함도 돋보입니다. 천원짜리 샌드위치의 애착을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소하게 재미나지만 좀 억지스럽죠. 아니면 사랑은 기호식품이다.’ 라는 주제로 사랑 경험과 샌드위치 경험을 같이 풀어냈으면 모를까.

 

 

같은 음식을 계속 먹어서 물리는 것과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해서 질리는 것의 상관관계, 기질적인 문제로 풀어보던가요. 섬세한 감수성과 안정된 문장력을 갖췄으니 이걸 토대로 사유를 더 깊게 파고드는 연습을 하고 하나의 주제를 더 감각적으로 혹은 더 독창적으로 아니면 심오하게 물고늘어져보세요.

 

(랄조)

명절은 주사 맞는 것과 같음을 이번 설을 쇠고 느꼈다.’명절과 주사의 비유가 좋습니다. 그런데 추석이 왜 더 아프죠? 새뱃돈 받는 셈 칠 수가 없어서 그런가요? 그 부분을 더 비교 분석해주세요. ‘그분들이 빨리 가셨으면 했다. 아니 세배는 받으시고.’이 문장을 저는 빨리 돌아가시길 바라는 걸로 들었어요. 내 발이 닿지 못한 곳에서 본인들의 경험상을 이래저래 평가하는 그들이 얄미운데, 그들은 왜 그렇게 남 얘기, 남 걱정을 할까요. 그 심리를 피해자 입장에서 유추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들은 물에 잉크를 푼 듯 삽시간에 퍼졌다. 시각화된 문장. '이러다가 무엇도 못되고 죽는 거 아냐?‘ 뭐가 되고 싶은지, 아직 못 정했는지 자기고민이 들어가면 글이 깊이가 생겨요. 남들은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는지, 위의 쑥덕공론과 대비되게요. 자기가 처한 불안과 위태로움을 끝까지 응시하고 파고들면 좋은글이 나옵니다. 불안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계속 쓰세요. 십대 때 얘기도 궁금해요.

(상상)

니 편이 되는 법과 지랄총량의 법칙. 수학문제처럼 놓인 두 개의 조건입니다. 나의 지랄-> 아버지의 대응. 자식의 지랄-> 나의 대응. 이걸 기본 구조로 잡고 이야기를 전개했으면 좋았겠죠. ‘우리 생에는 자기가 가진 열꽃만큼 비워내야 통과하는 길이 있다.’ 는 결론도 설득력 있을 테고요.

 

 

작은 아이 학교 문제 교사의 대응, 아버지의 죽음과 추억여행, 이건 각각의 글감으로 독립시켜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으니까요. 이전 글에 비해서 글이 더 밀도가 생기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더 박차를 가하면 더 좋아지겠어요. 기록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나중에 추억여행을 앨범이 아니라 문집으로 전해줄 수 있겠네요. 제목은 지랄 총량의 법칙이 될지, 사랑무한의 법칙, 부모로 사는 법이 될지.

 

 

(도치)

노인과 가족의 문제네요. 죽음을 앞둔 엄마와 일가족의 이야기가 일일드라마처럼 생생하게 그려져요. 엄마의 이야기를 역시나 찬찬하게 잘 들려주셨고 자식 간 미묘한 갈등적 요소도 가감 없이 드러나는데, 주제의식이 미약해요. 우리는 누구나 늙잖아요. 고령화 시대에 자식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는 모두의 화두이기도 할 테고요. 도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곁들여서 글에 깊이를 부여해주세요.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나면 라디오 사연 정도에 머무는 것이고요. 글쓰기는 더 사유가 담겨야 합니다.

 

(히나)

늘 건강하다가도 늘 아픈 것 같은 자식의 존재-> 이게 무슨 뜻인가요. 제목이 감각의 기억인데 내용은 설움의 기억에 가까워요. 그리고 설움이긴 하지만 또 그 안에서 여러 개 이야기가 어우러지기보다 약간 어긋나고요. 알콩달콩 연애 중의 감기몸살=행복, 엄마의 무관심 속의 감기몸살= 설움, 나쁜 놈의 패악질 속의 몸살 = 모멸. 아닐까 싶네요. 엇비슷해 보이는 것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게 글쓰기입니다. “제발 함부로 아프지 말고, 아플 때는 내 허락을 먼저 받아.”몹시도 웃기고 강렬한 서두. 글이 흥미롭게 술술 익히는데 그만큼 헐겁다는 뜻이기도 해요. 글이 더 섬세하면 좋겠고요.

 

(밀애)

 

뒤치다꺼리 하느라 무뇌아에 감정까지 없어진 인간이 되어간다.’ ‘점점 주변 상황에 관심도 없고 감정노동도 하기 싫다. 누가 시비 걸면 죽여 버리고 싶다.’ 노동의 질곡에서 비명처럼 나오는 살아있는 표현들이 좋습니다. 보통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묶어낸 것도요. ‘담당 공무원에게 욕이 나오고 조직적이지 않는 사무국장이 짜증난다. 문제의식은 있으나 마음 약한 대표도 밉다.’ 각 직급별 원망의 포인트를 짚어주니 실감이 나고요. “여성운동 했다는 사람이 중간 착취 관리자처럼 행동하시면 안 되죠?” 같은 인용도 적절합니다.

 

 

직장생활의 고난. 불혹을 넘은 나이 참을성 없는 자신에 대한 한탄과 연민, 그리고 분석. 에니어그램을 통한 위안. ‘그동안 내가 화를 자주 냈던 것도 걱정 근심이 많은 이유도 내가 살아가기 위한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위로 받으려 하고 있구나. 에니어그램도 글쓰기 최전선도.’ 결론도 잘 내려주었어요. 다 좋은데 글이 왜 산만하고 어수선해요. 이건 훌륭한 초고이고, 중복되는 표현은 한번으로 줄여주고. 문장도 다듬고요. 몇일전 -> 며칠 전/ 댓구-> 대구 / 뒤치다꺼리-> 뒤치다꺼리. 맞춤법 손보면 되겠네요. 욕심을 안 부리고 글이 솔직하니 시원시원해서 좋습니다. 대신 더 꼼꼼하게 퇴고하세요.

 

 

나는 어느 도시에서 비정규직(계약직)을 하면서 번 돈으로 살아가고 있다. 두 아이와 늘 생계를 걱정하지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간혹 삶에 지쳐 넋 놓고 울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서 나의 삶을 맞이한다.”

지난 기수 과제에 냈던 글이네요. 이 부분은 다시 읽어도 좋은 문장입니다.

 

 

(노래)

자신의 분노와 화를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쏟아내는 엄마. ‘엄마의 화가 나에게 옮아오지 않는 곳으로. 엄마의 불덩이가 나에게 들어오지 못할 곳으로. 난 무조건 엄마와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 문장이 맨발로 도망가는 딸이 그려져요. 다급하게 잘 표현되었네요.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까지 나아가서 좋아요. ‘엄마 가슴속에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뜨거운 불덩이가 들어앉아 응어리져 있었는지 직접 물어본 적도 궁금해 한 적도 없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엄마의 고질적 습관을 따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잖아요. 자신의 가슴 속에는 어떤 불덩이가 있는지 관찰하고 사유하면 엄마의 고충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상태에 대한 자각 이후 자기 분석까지 시도해서 거울처럼 서로의 삶을 비추어본다면 멋진 입체적인 글이 되었겠어요. 인정과 애정을 갈구하고, 외롭고 지치고. 이건 맞는 표현이지만 고유한 표현은 아니잖아요. 글의 마무리로는 사용하지 않아야 글의 고유성이 살아납니다. 뭔가 글이 조금씩 균형이 생기고 있습니다. 좋은 변화네요.

 

4사시 리뷰 - 좋은 제목 좋은 글

[글쓰기퍼주기]

노래 상처가 아문다는 것

 

글의 짜임새와 완결성만으로는 지금까지의 글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어요. 한 호흡에 읽히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는 멋진 지도자가 되고 싶고 최소한 비겁하기 싫은 청춘이었고, 책과 씨름하던 어느 여름 날 충동적으로 사고를 쳤는데, 그 사고가 그의 삶에 중요한 사건이 되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사건 이후 변화에 대한 정보와 해석이 많이 부족합니다. ‘살아내니 잊혀지더라는 마무리는 맥이 탁 풀리고요. 그렇게 잊혀졌다기엔 앞글이 너무 생생하니까요.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상처는 아문다?) 한 줄로 정리가 안 되는 애매함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 수정해보세요.

 

 

오늑 헤어 나올 수 없는 망각

 

부서지지 않는 암흑이 뭘까 한참 생각했습니다. 빈틈없는 어둠. 완고한 상황일까. ‘블랙홀’ ‘설산같은 문명적 용어를 넣지 않고 4개월 아이의 공포를 표현했으면 어땠을까요. 영화적 상황 이미지에 몰입하다가 그런 단어가 나오면 왠지 이성적으로 각성이 돼요. ‘아빠는 동네 목욕탕에서 씻고 (계시다가->)있다가 오빠의 외침에 헐레벌떡 뛰어(오시던->)오던 참이었다.’ 문장에서 존칭어 생략해야하고요. 투명인간이 뒤에서 미는 게 아니라 업혀온다고 쓴 이유가 있는지요. ‘아래로 추락하는 내 몸은 빈틈없이 찢겼고’ -> 살점이 빈틈없이 찢긴다는 게 뭐죠? 잘게? 남김없이?

글이 두 부분이네요. 영아기 외상 증언 계단공포증 분석. ‘잊는다는 건 영원하지 않다.’로 결론 내리면, 경험의 고유성과 글의 기괴한 분위기, 오늑 특유의 문체가 두루뭉수리 해져요. 더 자신감 있게 자기 분위기로 밀고 나가길.

 

 

소울리스 나는 왜 이렇게 조용한지

 

뜨끔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지 생각했거든요. 시간순으로 점층적으로 사례별로 말 많은 것의 무용론을 논증해나가는 데 글에 힘이 있습니다. 회사의 회의에 이어 훗날에는 글쓰기의 최전선 수업의 사례가 추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 정도로요. 현재를 고수하는 건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맞는데, 더 정확히 니체라면 이렇게 말했겠죠. 말 많은 것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악에 복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일 뿐. ‘을 상황에 따라 삶의 유용성 전략으로 활용하라고요. 아무려나, 변화할 수 있음=유연성은 높은 단계의 힘입니다.

 

 

굳이 회의가 없어도 간단한 의사소통으로 전달과 점검이 가능한데도 이러는 건 회의를 통해 자기 지배력을 굳이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 간단한 의사소통으로 전달과 점검이 가능한데도 굳이 회의를 소집하는 건 그 자리를 통해 자기 지배력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경덕쿵 여행, 여행

 

 

내 맘대로 키운 여행의 무게에 목이 뻐근해질 때쯤같은 표현이 돋보여요. 문장은 좋습니다. 여행에 대한 열정도 알 수 있고, 대견하고 여행 많이 다녔구나 싶어 놀라고요. 다만 왜 여행을 가는지 잘 드러나지 않아요. ‘다녀온 여행들은 흡족했다.’ ‘많은 것을 보며 감응했다.’ 같은 표현은 여행 느낌들을 토로하는설명적 문장입니다. 대책 없는 떠남은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초월적인데 왜, 노가다를 감행하면서부터 여행을 떠나고 싶은지 자기 탐문해볼 일입니다. 여행을 통과한 내 몸에 대해,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더 깊고 짙고 친절하게.

 

 

랄조 스스로를 구하다

 

 

본 것, 한 것, 느낀 것대로 잘 썼어요. 글에 힘이 빠지니 훨씬 랄조님 목소리에 가깝고 경쾌하고 진솔해요. 창세기연수 같이 마친 거 같아요. ‘본인로 바꾸세요. 어색한 표현입니다. ‘있어 보이려고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날 노안으로 보면 화가 난다.’ 이것만 추려서 노안분투기 한편 써도 재밌겠어요. 외모중심주의 연령주의에 대해 공부해서 근거도 제시하고요.

평소 뜻도 모르고 멋있어서 기억했던 말. 스스로를 구하다.’ 이 문장 좋아요. ‘스스로를 구하다제목으로 추천. 랄조를 속 시원히 울게 한 아픈 기억은 뭘까요. 궁금증을 자아내내요. 마지막 단락은 천주교 신도가 아니라서 좀 헷갈립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주기보다 과감히 생략할 때 주제가 살아나는 경우가 많죠. 글은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남기느냐가 관건입니다.

 

 

스콜라스티카 인생의 모토

 

 

스무살의 우리들은 과장되게 기쁨과 절망을 연기하는 연극배우들.’ ‘상터를 훈장 삼아 사는 것은 늙은 상이군인의 몫.’ 같은 문장들이 라디오에서 흐르는 디제이의 멘트 같이 반들반들 빛납니다. 귀에 쏙 박혀요. 관객이 된 서른과 대비한 정직한 삼십대의 정의도 좋고 분명해요. 뒷부분 주제의식이 모호해집니다. ‘부모 마음으로 (남의 자식을)동정하는 것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정의 이름으로 남의 통증에 손대는 것을 비판하고 다시 부모됨(나와 아이의 우주가 일치)의 일반론으로 끝나니 각기 다른 계열의 담론이 뒤섞여버립니다. 이 부분 정리하면 차분한 글 한편 나오겠습니다. 인용한 시는 섬뜩하게 좋네요. 통증은 나와 만물을 봉합할 수 있는 바늘이다. 귀한 시구, 오마주 다 고맙습니다.

 

 

슝슝 망각과 나와 노란 배와

망각의 기술 덕에 배운 지금 여기 함께 존재하는 심리상담’. 궁금해요. 다른 상담이랑 어떻게 다른지. 이것만으로도 하나의 글감. 이번 과제는 앞부분 덜어내고 세월호 사건으로만 써야합니다. 일기가 아니니까요. 슝슝님 필력이 어느 정도 있으니 한 가지 주제를 자기 목소리로 담아내는 칼럼쓰기 연습하세요. 4월이 온 국민이 아이들 수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아 가장 충격 받은 시기인데 그 시기에 거리를 두었잖아요. ‘더 알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이게 뭔지 자기성찰 해보고 그 후 죄책감으로 인한 행동들이 나와야 더 힘을 얻겠죠. 어른이 눈 떠야 아이들이 눈감을 수 있는 것처럼요.

 

 

선미 동무와 연인

백석과 자야, 길상사에 관한 자료 추리느라 애썼네요. 좋은 글의 요건에 충족합니다. 귀한 정보를 주니까요. 그런데 작가적인 욕심을 내야죠. 두 사람 러브스토리, 무소유 등에 관한 필자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런 글에 자기해석이 없으면 이 글은 다른 부지런한 누군가도 쓸 수 있는 글이 되어버리죠. 나만 쓸 수 있는 글 쓰세요. 절에 많이 다녀서 사찰의 정취와 감성이 누구보다 풍부한 필자의 해석을 곁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바람도리 니체의 자기긍정을 먹다

만원버스 분노신이 묘사가 탁월합니다. 생사여탈권 쥐고 있는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이십년 전 등굣길 버스 안의 아저씨가 된다는 해석이 날카롭고요. 그런데 폭식으로 견딜 수 없는 하루를 위로한다는 부분은. ‘힘들게 보낸 하루의 정황은 미루어 짐작할 뿐 설명적이고 단정적이라서 글이 감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여느 직장인과 같은 고통은 아니지 않을까요. 만원버스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해주어야 자기부정’ ‘자기긍정같은 표현이 뒤에서 매듭처럼 글을 모아주고 힘을 얻죠. 폭식하던 시기가 언제인지 명시해주세요. 니체는 지난주에 읽었고, 스스로를 위해 요리한 때는 니체 읽은 날 저녁인가요? 그런데 스스로를 위해 요리하기 시작했다는 문장은 마치 폭식 이후 변화된 삶의 방식으로 읽힙니다. 바람도리님은 감정적-모호한 위험성에 빠지지 않으면 특유의 예민함이 글에 깊이를 부여합니다. 말이 커질 때는 주의하세요.

 

 

송이 - 나는 왜 이렇게 불쾌한가

 

 

광고 보고 커피 마실 수 있는 거 처음 알았네요. ‘공짜커피 아니죠. 영혼 강탈당하는 중노동을 하는데. 이런 세계 신기해요. 여자연예인을 이상향으로 내세우는 화장품 광고도. 남친 홀림을 컨셉으로 하는 의류광고도. 둘째 단락 자기초극과 자기긍정을 동시에 설파하는 <이 사람을 보라>와 연예 기사-성형 광고가 논리적으로 잘 연결이 안 돼요.

땀 흘려 커피 마시겠다고 광고 공해에 시달리고 옷 사러 가서도 그렇고 지속적인 불쾌를 경험하는 페미니스트. 그녀는 과연 가랑비에 옷 젖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안 젖을 수 있을지. 타인에게 위로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이상향을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언은 호기롭지만 글로는 약해요. 이 글의 주제는 무얼까요. 나는 광고 따위에 현혹되지 않으며 타인이 정한 미의 척도에 휘둘리지 않는다? 옷가게 사례를 간단히 줄이고 더 자기욕망을 따라가 보면 어떨지. 지금은 주장만 있고 자기관찰은 없어 아쉬워요.

 

 

 

도치 보이지 않는 봉사의 압력

 

 

봉사의 압력, 보이는 걸요. 아주 노골적으로 얘기하는데 제목이 보이지 않는이네요. 보고 싶지 않은 봉사의 압력이란 뜻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종교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부장제. 여성의 노동으로 굴러가는 봉사시스템. 참 무지막지하네요. 관절이 굽고 휘는 지경이라니 말이죠. 시댁의 맏며느리도 은퇴하신 마당에 성당에 다시 취업하실 수는 없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피했어도 다른 여성들-할머니들의 혹사를 지켜봐야하는 괴로움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문제겠네요. 봉사 없애달라는 기도만 계속 해야 하는 건지. 안타깝습니다.

이 글만 봐서는 봉사보다 신앙의 문제를 풀어야할 것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지만 말끝마다 주님의 뜻이나 아멘을 하는 건 불편하고’ ‘은총 받기 원하면서 공동체 활동은 하기 싫어한다는 내적 갈등이 드러나네요. 가족주의에 기반한 기복신앙의 관점에서도 자신의 종교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있습니다.

 

 

 

스콜라스티카 기억

프랑스 작가 미셀 트루니에 글이 생각나네요. 삶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지켜보는 거리에서만 나오는 경쾌하고 사색적인 문체가 매력적입니다. 기억의 방/언어의 세계 언어 이전 몸의 기억/나로 향한 문 광풍으로 기억의 문고리가 뽑히는 치매. 생애와 억압과 기억의 문제가 회화적 이미지와 겹치며 잘 맞아떨어집니다. 두 번째 단락 나 라는 세계는 혼자 일 때 저절로 향하는 문이며 문 열면 보이는 풍경이 겨울바닷가’ ‘어둑한 동굴’ ‘오후햇살 비추는 다락방등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했는데, 제 생각에는 한 사람의 내면에 저것들이 다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으니까. 나라는 존재는 늘 종잡을 수 없는 나이니까. 아무튼 고유한문체가 있는 기분좋은 글입니다. 앞으로도 잘 살리시고요,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 말고(바닷가, 동굴, 다락방) 다른 것도 도전해보세요.

히나 변하는 그녀에 대한 아쉬움

 

 

오래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는 자기 분신이자 거울 같은 존재죠.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으니까요. 변하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은 실은 변하지 않는 자기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음이 엿보인 글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솔직한 글이 되었고요. 그녀의 변신을 다채로운 사람으로 명명했다가 열등감으로 해석했다가 글이 혼란스러운데, 정교하게 다듬어야 합니다. 과거를 모조리 부정하는 친구의 자기망각경지의 미성숙한 태도에서 느끼는 배신감과 얄궂음만을 지적하려고 한다면, 이 글은 전지적 시점의 글이어야겠죠. 우선은 나에서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글을 쓰면서 더 솔직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는 연습이 필요할 시기입니다. 사려 깊은 글-삶을 위해서.

주희 어쩔 수 없는 일은 정말 어쩔 수 없을까

 

 

건조한 문장, 솔직한 표현으로 담아내어 내용의 파격성이 더 격렬하게 다가온 글이었습니다. 큰 아버지 일가의 몰염치가 한 가족에 덮친 불운의 그림자가 너무 길고 짙어서 속상합니다. 이 악연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족 구성원의 가장 약자인 딸이 느낀 울분과 불안과 공포가 어떠했을지 추적 연구가 필요합니다. 자기감정의 변천사를 곁들여주세요. 자기 관찰을 통해 자기 전망을 살펴볼 수도 있고요.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던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외로움에 관한 해석도 또 다른 해석의 경지를 열어줄 것 같아요. 그리고 큰아버지에게도 보내고 싶을 때 시도해볼 수 있겠지요.

가비 - 인생, 이 지독한 블랙코미디

 

미완의 글인데, 미아가 될 뻔한 상황 묘사가 실감나서 읽는 동안 몸이 쪼그라들 것 같았아요. 트라우마로 인한 원한감정이 발생하는 과정으로 풀어갈 것인가요. 가비의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틀을 크게 잡아놓으면 글이 붕 뜨고 추상적이 될 수 있으니, 더 좁혀서 잘 써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3차시 리뷰 - 왜 라는 물음에 답하는 방식으로

[글쓰기퍼주기]

설거지를 하면서 문득 생각했습니다. 매주 학인들의 글을 읽고 또 읽다보면 속상하다 웃기다가 곡진하다 잔잔하다 그럽니다. 이토록 온갖 감정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이야기가 쌓이면 내 몸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몸이 여러 사람의 삶을 통과할 때. 그런 부제를 달아봅니다. 여러분들은 제게 사람책입니다. 밀양 할매처럼 “소인으로 태어나서 이만하면 됐다” 말할 수 있는 삶의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고, 저에게 운수 좋게도 ‘미리보기’ 기회가 주어진 거 같습니다.


 

소울리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팔의 고통보다 모처럼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 이 부분이 반전이네요. 아버지가 무뚝뚝하셨는지, 다른 둘째들처럼 관심 받고 싶었는지, 그런 정보가 더 궁금합니다. 화상 사건이 단지 반팔을 입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도 어떤 부분을 닫아버리고 내보이지 않게 되면서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거 같아요. 그 부분을 ‘멍에’로 간단히 처리하니까 이야기가 시작되려다 끝나버렸어요.

 

‘그동안 정성을 기울이던 활동과 맺어진 사람 관계들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 그동안 정성을 기울이던 (어떤?) 활동과 사람 관계가 지긋지긋 하던 때였다.

‘나와는 완전 다른 성향의 친구’ -> 나의 성향은 어떻고, 친구의 성향은 어떤지, 어떤 점이 좋아서 ‘흉내내기에 이르’는지 설명이 필요합니다. 또 이 글에서는 영화를 본 행위 자체보다 보게 된 경위, 즉 ‘날선 신경’의 발생 원인 등을 치밀하게 써주세요. 그래야 영화를 강박적으로 취침용으로 보게 된 행위가 글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일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일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지는 않는다.”는 십장 아저씨의 말은 정말 가슴에 쿵 박히는 명언이네요.

 

소울리스님은 이야기를 툭툭 던지듯 풀어내지만 글에 어떤 묘한 ‘울림’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유와 배경까지 더 치밀하게 좁혀서 써보세요. 키노 기사처럼.

 

고구마가

 

어릴 때 듣고 자란 ‘말들’로 성장기를 구성한 기획력을 높이 삽니다. 무의식의 명령어처럼 나를 통제하고 경향성을 만들어준 말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주니 글에 힘이 있어요. ‘대본의 지문처럼 내 행동을 지시했다’는 표현이 돋보여요. 팔을 움직이다가 엄마 가슴에 닿았을 때 이상했던 감촉, 이 일화가 의젓한 첫째에 대한 강박증과 결핍감 같은 것을 잘 설명해줍니다. 엄마가 출산을 마쳤을 때보다 많은 나이인데도 자기 포지션을 ‘아이’에게 둔다는 지적도 좋은 자기 설명의 사례이고요.

 

글의 마무리가 문제네요. 부정의 말들이 형성한 인격. 너는 눈치 보는 사람,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역시나 남들의 말들만 전하며 황급히 마무리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에 대한 자기 입장-해석이 들어가야죠. 그런 성격으로 살아가는 유/불리한 점을 이야기해본다던가. 본인은 자신을 어떤 성격이라고 생각하는지도 궁금해요. 부정적인 말들이 영향을 안 미친다고 했다가 아직 찌른다고 하니까 더 모호하죠. 자기 감정에 더 집중하여 ‘착한 아이 콤플렉스’로 살아가는 장단점만 잘 보여주어도 좋은 글이 됩니다. ‘쟤 성격 좋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까탈림

 

두서없는 굴곡진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한 글이고, 두서없고 반복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이제는) 듣게 되었다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에 대한 의미부여가 부족합니다. ‘딸이 엄마를 보며 느끼는 연민과 부정, 애증의 모순된 감정’이 글의 핵심인데 너무 한줄 요약 했어요. 그래서 글이 평면적이에요. 결을 살리려면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더 상세히 쓰거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심정을 더 생생히 묘사하면 참 두서없어 좋은 글이 될 거 같아요.

 

‘엄마의 폐경’이란 단어가 눈에 확 띄는데 그것에 관련된 수다를 담아도 좋을 것이고요. 엄마는 딸이 자취집에서 굶는다고 여기지만 나는 얼마나 잘 먹는지 실상에 대한 정보를 주어야 딸만 보면 먹이려는 엄마의 과잉 행동이 더 부각되겠죠. 그런데 이제는 엄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는 딸을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주희

 

외로운 아이가 취학 전과 취학 후 성장기를 어떻게 보내는지가 잘 그려집니다. 주희님 글은 짧은 문장이 무심한 듯 이어지는데 힘이 있어요. 소싯적부터 워낙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서 내면 독백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어 그런 듯합니다.

중학교 시절 급식 줄 앞뒤로 친구들 무리에 끼어 있는 아이, 혼자 하교하는 아이. 그게 왜 편했는지 궁금해요. 감정 노동 안 해도 되는 점? 고등학교 때 기숙사 생활하는 바람에 친구가 ‘조금 더’ 생겼는데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뭐가 피곤하고 싫었는지. 저는 4-5명씩 무리지어 친구들과 우르르 어울려 다니면 깊은 대화를 못 나누고 공허한 말들만 하니까 그게 싫어서 거의 단짝 친구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예 단짝 친구도 필요 없는 주희님 같은 ‘강자’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글이 재밌어지려는데 요점 정리로 끝나버려요. 대학 진학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 노력을 어떻게 했는지 질척한 행동들의 면면이 완전 재밌을 거 같아요. 다음에 2탄 써주세요. ‘관계가 여전히 어렵다’고 느끼기엔 관계를 차단하면서 산 게 아닌가 싶은데요. 관계 없음에서 오는 어려움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의 비교분석도 좋은 글감이겠네요.

 

슝슝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라임을 넣게 되네요. 어설픈 래퍼처럼요. 참 대단한 능력이세요. 끊어치기 최강자? ㅋㅋ 이렇게 다른 장르로 도입하여 쓰지 않으면 단지 암울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아요. 가벼운 문체가 짐승들의 세계 같은 남학생의 성장기 잔혹사를 잘 보여줍니다. 단 마지막 문단의 의미 전달이 조금 확 다가오지는 않네요. 미안하다고 말하는 친구를 왜 쳤는지. 한번 쯤 ‘가해자’로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는지. 나보다 착한 친구한테 더 배울 것이 없다는 건가요? 정신없이 쏟아지는 펀치 속에 우정은 싹트지 않았다. 양쪽다 편치 않다라는 결말이 좀 허무하다고 할까요. 앞부분의 압도적인 흡입력에 비해 뒷심이 부족해보입니다. 성장기 잔혹사가 에피소드처럼 제시되고 말아서 아까워요.

 

그리고 슝슝님 글이 매끄러워요. 가독성이 좋은데 너무 좋아서 휙휙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할까. 휘발성이 강해요. 아는 선배가 기사를 감각적으로 쓰는 후배한테 ‘반짝이 패션’처럼 글을 쓴다고 비유해서 웃었는데 슝슝님도 그래요.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합니다. 감각적이면서 묵직해지라고 하면 ‘청순하면서 섹시하라’는 요구처럼 무리일까요.

 

공부도 왠만큼 했어. -> 공부도 웬만큼 했어.

 

 

날아라지구로 (도치)

 

안정된 서사 전개력과 문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입니다. 한달음에 같이 4학년이 되어서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빵같이 달고 맛난 사랑에 같이 배가 부릅니다. 도치님이 교사의 꿈을 가진 것도 놀라워요. 그런데 후반부에 ‘학교와의 인연은 쉽게 닿지 않았다.’는 부분이 모호합니다. 채용이 되지 않았던 건지, 결혼을 해서 그런 건지. 큰 딸의 사춘기와 교사의 꿈이 다시 태동한 것의 연결고리도 중요한 부분이라 설명이 보완되어야 합니다.

 

기간제 교사를 하면서 느낀 일상의 에피소드도 전해주었으면 도치님의 유년과 대비되어 글이 더 생명력 있을 거 같습니다. ‘학교 어디에도 ***선생님은 없었고 43년 전 학생들도 없었다’는 설명 문장으로 퉁쳐 버리니 글이 앞처럼 생생하지 않고 맥이 풀리거든요. 인터넷 사이트 비밀번호 가입마저 없어졌다는 이야기로 글의 앞뒤를 열고 닫아주는 수미쌍괄식 구조는 좋습니다. ‘귀농 백일장’ 수상자의 저력을 확인합니다.

 

상상

 

‘쓰고 싶기는 하나 못 쓰겠는 거. 쓰고 나면 좋으나 힘들어서 하기 싫은 거’ 솔직하고 정확한 고백입니다.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크면, 글을 쓰게 됩니다. 글로 퍼내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체한 거 같을 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거 같습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픈 핵심’을 차분히 응시하고 도전해보세요.

 

아버지와 읽고 쓰기 공부하는 장면은 고칠 곳이 한 문장도 없게 잘 쓰셨어요. 친척 집에서 책을 읽는 아이의 모습도 그려집니다. 다만 글에 이모티콘과 괄호로 처리하는 부분은 다 문장으로 대체해주세요. 오글거리는 느낌, 얄궂은 마음 모두 번역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주방에는 입식의 식탁이 있었다. 당시에는 식탁도 부의 기준이었다. 보통의 집은 개다리소반에 밥을 먹었다.’ 뭐 이런 식으로 일문일사 원칙에 의거하여 한 가지 사실씩 쓰면 됩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여성들의 구술사 꼭 완성하면 좋겠고요. 가슴에 돌아다니는 상상님의 이야기까도요. 기억을 살살 흔들어서 하나씩 꺼내보세요. 한꺼번에 범람해 다시 어깨 통증 오면 안 되니까요. ‘살아온 생과 살아질 생의 구분이 방법적으로 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는 부분이 어떤 뜻인가요. 살아온 생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과거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살아갈 방법을 찾겠다? 정확한 표현을 해주세요. 지난번 글보다 훨씬 나아졌고 자연과 교감하던 교문학소녀의 영감이 되살아난다면 글이 더 부드럽고 섬세해지리라 기대합니다.

 


경덕쿵

 

취업복음이란 게 있군요. 재밌어요. 서점에 넘치는 자소서 매뉴얼 책 제목, 특강 제목 열거해주세요. 그 세계를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을 대상으로 놓고 ‘생생정보통’처럼 살아있는 정보를 제시해주어야 좋은 글입니다.

 

궁금한 거 몇 가지. 조선일보에 어떤 사진 기사가 났나요. 중학교부터 입시라는 ‘급류’ 표현은 과해 보입니다. 특목고 준비가 아니라면 딱 맞는 표현은 아닌 거 같아요. ‘정처 없이 건물을 오르던 꼬꼬마로 회귀하듯 전방위적 행보’를 보인다는 문장은 좋습니다. 앞의 에피소드와 연결고리도 생기고요. 왜 그리 경험 축적에 집착했는지 궁금합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것. 물질적 기본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하다는 지적. 개인 서사에서 갑자기 일반론으로 넘어가니까 글이 커지고 톤이 깨지네요. 아니면 위에 나열한 온갖 경험들이 나답게 사는 방법이자 실천이었다고 이어주면서 그러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답게 사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는 경제적 안정에서나 가능한 사치다로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겠죠.

 

‘(나 답게 사는 것은)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신만의 길일뿐이다.’ 문장이 명료하지가 않아요.-> 나답게 사는 것은 생존이 보장된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적 행위, 그 뿐이다.

마지막 두 줄. 자신은 여전히 실천력이 부족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쉽게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사람이라는 마무리는 좋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우리는 대부분 타인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박선미

 

글을 읽고 났더니 부지깽이가 내 손에 들려있네요. 불이 잘 타도록 땔감을 정돈하는 부지깽이 이야기라 그런지 글이 일정한 온도로 가지런히 탑니다. 아궁이 밖에 편편하게 불씨를 펴서 김을 굽는 이야기는 정말 동화적으로 그려져요. 전체적으로 행간이 발갛게 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랫목처럼 등짝이 따뜻합니다. 이삿날 부지깽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소녀의 고민도 전해져오고. 부지깽이 하나로 어린시절 설명할 수 있으니 사소하지 않죠. 사소한 것은 없다는 게 맞는 말이겠죠. 한 가지 소재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느껴집니다.

 

첫문단.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올랐다.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이 두 문장이 이어지는 부분이 중복이죠. -> 밥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올랐다. 그 맘 때면 집 밖에서 놀던 아이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오늑

 

문장이 전부 시각화가 가능하네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첫줄에 ‘나의 외관은 형성되어 갔다’에서 외모라고 안 하고 외관이라고 하니까 사물화의 효과가 있어 좋습니다. 글을 건조하게 만드는 단어 선택들이 눈에 띄고. ‘형제의 불완전한 그림자’ 이 부분은 형제의 일그러진? 삐뚤어진? 같은 시각화 가능한 단어가 나겠어요.

 

‘학업, 연예, 가십에 질식하는 것보다 예술이라는 공기 속에서 숨 쉬는 게 더 편했다.’ 비문입니다. 질식이라는 단어에 이미 숨이 막힌다는 뜻이 있어요. 숨을 못 쉬는 것과 숨을 쉬는 것은 비교급이 될 수 없어요. 숨을 못 쉬는 것보다 숨을 쉬는 것이 좋았다? 이상하잖아요. -> 학업, 연예, 가십은 나를 질식시켰다. 예술의 공기 속에서만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자기혐오와 자기사랑의 분열증에 시달리지 않은 예술가는 없었으니, 내 안에 혼돈을 갖고 있어야 아름다운 별을 탄생시킨다고 니체도 말했고요. 예술로서 불멸을 꿈꾸는 오늑에게 이 글은 어떤 출정 선언문 같습니다.

 


바람도리

 

대물림된 궁상. 제목이 좋아요. 내용은 궁상스럽지 않고 당황스럽게 정갈합니다. 문장이 고칠 게 거의 없네요. 전달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고. 자기와의 거리 확보의 힘 같습니다. 자기객관화에 성공했다고 할까요. 다만 직장생활 초년에 소비도 고구마 이야기처럼 구체적 소비 사례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소비 후의 공허감이라는 말에, 공감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엄마의 궁상과 나의 궁상(처럼 보이는 삶의 양식)의 결정적 차이가 있지 않나요. 화폐와의 관계 측면에서요. 엄마는 궁상을 통한 적게나마 축적을 도모하셨고, 바람도리님은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검약에 가까워요. 그래서 결핍도 느끼지 않을 수 있고요. 엄마의 금욕적인 소비 습관이 대물림 되었지만, 어떤 차이가 있고 그걸 얘기했어도 좋았겠다 싶어요.

 

초등학생 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때면 찢어진 이불처럼(->이불 같은) 초라한 살림을(->세간이) 부끄러워했다.(-> 부끄러웠다.)

 

 

노래

 

진정제도 독약도 아닌 성장기의 기억들. 순둥이의 순종의 나날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지도 몰랐던 무지의 시간들. 대학교 입학 후 자유의 달콤함 이후 찾아온 통증. ‘내 마음 속의 또 다른 내가 가식적으로 살지 말라고 울부짖음’의 사건이 찾아오는 어떤 계기가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뭔지 모르겠는’ 그것을 글로 발견해내면 글에 힘이 있겠어요. 처음 만나는 자유를 누리면서 새삼 억압을 인식할 수도 있고, 주변의 다른 삶의 경로를 밟은 친구들을 보면서 (알고보니) 억압의 사춘기를 보냈구나 알아차릴 수도 있고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남이 생각하는 나’ ‘가면 뒤의 애써 감춰왔던 나’ ‘자의식’ 같은 표현은 추상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가급적 절제하는 게 좋아요. 사례를 통해 그런 면을 보여주고 독자가 판단하게 해야 하는데 한줄로 설명해버리면 독자는 글을 디딜 근거가 없어요. 유순한 유년보다 뒤늦게 온 사춘기가 더 중요한데 묘사가 앞에 치중되어 있고 뒷부분은 설명으로 훅훅 지나가니 글에 균형이 안 맞지요. 다음에는 그 혼란을 글로 풀어보셔요. 좋은 글이 나올 겁니다.

 

‘유난스레 툭 튀어나온 이마와 뒤통수, 곱슬거리는 머리, 터질듯한 볼, 쌍커풀 없이 작은 눈, 오리 입처럼 말려 올라간 윗입술을 한 꼬마아이’ 묘사는 탁월합니다. 화가 같으세요.

‘진정제도 독약도 아니었지만 성장촉진제였다.’ 진부한 듯 정리가 되는 한줄 요약입니다.

 


박이한

 

3차시를 ‘열차의 난’으로 만든 화제의 글. 파토스 넘치는 문체가 수업에도 활기를 뿌렸습니다. 해와 달, 회색분자, 모나리자, 평생 좌석 등 활달한 비유의 오남용 사례로 학인들에게 유익한 배움의 기회도 제공했고요. ‘내가 늘 보던 뒷산에 칼을 꽂아둔 거 같아’ 라는 청도 삼평리 어르신의 귀한 촌철살인 말씀도 글에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과잉정서로 밀고 나가서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글로 옮기세요. 글을 다듬는 퇴고의 기술과 시간만 있으면 글은 얼마든지 좋아집니다.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게 존재한다.’ -> 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한다.

‘그 자리는 내가 처음 통성명을 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 그 자리에서 나는 처음 사람들과 통성명을 했다.

‘나는 가시지 않은 여운을 정리하지 않았다.’ -> 나는 가시지 않는 여운을 느긋하게 즐겼다.

‘사무실 때문에 간 청도 덕분에 나는 상당히 탈피했다.’ -> 업무 지시로 청도를 다녀온 후, 나는 다큐멘터리는 따분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시간표 없이 살아본 성인으로서의 첫 해’ -> 좋은 표현은 역시 삶에서 나오네요. 멋집니다.

 


가비

 

동화적 판타지로 독자를 데려간 멋진 글이었어요. 엄마의 뱃속에서 불시착한 한 생명이 놀이를 통해 커가는 장면이 파스텔톤 그림 동화처럼 스쳐갑니다. 유년을 가로지르는 놀이의 기억. 이후 단절의 시간이 길어서 더 아련하게 다가온 거겠지요. 축적한 딱지가 쓸모없게 되어버린 이유, 수업시간에 이야기한 취학통지서, 삼육재활원 이야기 보충하면 글이 더 풍부하해질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혼자 남겨짐의 시간들. 회피하고 싶은 부분을 직시해야 글이 된다고 하잖아요. 암전 시켜버린 기억을 조금씩 복기해본다면 ‘아무도 살지 않은 시간’에 대한 훌륭한 증언 문학이 되리라 믿어요.


‘허망함이란 놈의 복사뼈’ 이 수사법이 다른 문장에 있었으면 더 빛났을 텐데요. 유년 시절의 끝자락에서 아이가 느끼는 감정으로 ‘허망함’은 너무 늙고 칙칙한 단어입니다. (?) 이 표시는 안 쓰는 게 좋고요. 말줄임표도 자제해야 좋은 글입니다.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명료하게 하는 작업이니까요. 지난번 글보다 월등히 좋아졌습니다.

 

고구마가 (2차시 누락분)

 

‘20대에는 모든 게 분명해 보였고 30살에도(->서른 살에도) 오십살에도 (-> 쉰 살에도)’

‘100일 넘게 혼자 외국 여행을 해도 돌아오지 않더라. 그 상큼한 두근두근은.’ -> 도치법의 좋은 예.

‘내 집 욕망은 촌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영원성을 맹서하는 결혼도 낙후시켜버렸다.’ -> 동사의 활용의 좋은 예.

‘결혼 안 하고 나이 먹도록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흐름이랑 반대로 살려고 하는 힘이/ 내 안에서 은근 발휘되고 있었던 걸까’

-> (주어부가 너무 길어요.) 결혼 안 하고 돈 안 되는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삶. 그와 반대로 살려는 힘이 내 안에서 은근 발휘되었던 걸까.

 

늙은 아이의 이야기 1탄. 삶이 다르니 글도 참신해요. 귀농 귀촌의 글이 갖는 ‘자연으로의 회귀 예찬’ 이라는 일관된 패턴이 있는데 젊은 처자의 귀농 생활이라 그런지 참신해요. 고민도 풍부하고 살아있고요. 속도감 있게 읽히고. 당당하게 보이지만 흔들리고 갈등하는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 글에 탱탱한 긴장을 줍니다. (세상과) 욕심껏 불화하면서 부모들과 우정을 쌓으며 아이까지 낳고 살고 싶다는 마무리까지, 글이 긴장을 놓치지 않고 흐르는 게 큰 미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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