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은유칼럼]

민지(가명)는 수업 시간에 자주 엎드렸다. 의견을 물어도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더는 말을 시키지 않았다. 물 잔처럼 놓여있던 민지는 할 말이 생각나면 남의 말을 끊고 불쑥 끼어들었다. 주장도 의견도 아닌 그 파편적인 말들을 나는 팔뚝에 튄 물방울 닦듯 무심히 대꾸하거나 못 들은 척 넘겼다. 한 번은 민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쌤은 할 말 없을 땐 말 시키고 말하고 싶을 땐 안 시켜요.”

 

고루 발언 기회가 돌아가는 ‘말의 평등’을 우선시했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민지는 ‘어른들’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했다. 아는 얘기가 나와도 끼어들 순간을 못 찾겠다고, 다른 사람 말이 끝나고 말하려면 안 끝나고, 끝나면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는 거다. 말수 적던 아이가 맞나 싶게 눈을 맞추고 조리 있게 말을 했다.

 

10대부터 30대까지 모인 여성 쉼터에서 민지는 최연소였다. 15살. 아무래도 경험이나 지식, 언변 등 토론 자원이 취약하다 보니 말의 권력에서 밀렸던 것 같다. 나는 이야기해줘서 고맙고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의 말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니까 앞으로는 발언을 원하면 손을 들자고 제안했다. 이후 민지는 한 번도 엎드리지 않았다.

 

수업 내내 입을 다문 아이도 있었다. 아마도 성격이 소심한 게 아닌가 싶어 넘어갔다가, 물어도 응답이 없으니 화가 났다가, 피곤하거나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추측했다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속을 몰라 난감했다. 투명인간 취급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다. 사람 마음 헤아리는 눈치는 좀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 공급되지 않자 나는 관계의 뜨개질에서 첫 바늘도 꿰지 못했다.

 

나는 처방전을 찾듯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꺼내 읽었다. 거기엔 ‘수동적 저항’의 대가(大家)가 나온다. 주인공 바틀비는 면벽 묵언수행급, 하는 말이라곤 한 마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가 전부다.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필경사인 그는 어느 날부터 일손을 놓는다. 항상 거기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 변호사는 그를 어르고 달래고 연민하다가 분통을 터뜨린다. 좀 합리적으로 되라고 애원하지만 “송장처럼 창백한” 바틀비는 미동도 않고 입을 뗀다. “현재로선 좀 합리적으로 안 되고 싶습니다.”(77쪽)

 

소설을 읽다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 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102쪽)

 

그 허탈함, 황망함, 난감함, 쓸쓸함 속에서 사유가 일어난다(좋은 소설인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생각했다. 처음엔 바틀비가 이유도 없이 일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게 이상하다.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

 

역시 미국 단편소설인 샬롯 퍼긴스 길먼의 『누런 벽지』에는 인간 이해에 서툴다는 점에서 『필경사 바틀비』의 변호사와 닮은꼴 인물이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이 결혼과 출산 후 병을 앓는데 아이도 돌보지 못할 만큼 몸이 아프다고 말하지만, 높은 신분의 내과의사인 남편 존은 이해하지 못한다. 일시적인 신경성 우울증과 약간의 히스테리로 진단하고 휴식 요법을 권한다.

 

“존은 내가 실제로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고통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그걸로 그는 만족이다.”(163쪽)

 

남편은 아내에게 이유를 묻지도 듣지도 않고 자기가 알아서 판단하고 통제한다. “나는 의사야. 내가 알아.”(173쪽)라며 아내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잘라내고 무조건 쉬어야 한다며 글쓰기 같은 활동을 금지한다. 남편이 너무 현명해서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 한다”(170쪽)고 여겨 방문을 잠그고 몰래 글을 쓴다.

 

좀 합리적이 되라고 말하는 변호사, 네 병은 내가 안다고 말하는 의사. 그걸 꼭 알려주지 않으면 하나도 모르고, 알려주어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은 이 시대의 전문가들이다.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기 위해 진득한 노력을 기울이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자기 지식으로 성급히 단순화해버리는 재주에만 능하다.

 

그들에게서 글쓰기 강사라는 이름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는 나를 본다. 그나마 엎드린 이유를 말해주었던 민지와 안 하고 싶은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던 아이에게, 매사 논리를 따지고 원인을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했던 말이 나를 향한다.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79쪽)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던 중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평소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필요했던 것이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 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 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 채널예스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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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시 은유 - 무관심은 어떻게 혐오와 푹력이 되는가

[사람,기억,기록]




저는 글 쓰는 일을 하면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은유라고 합니다.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강사라고 하기엔 역할에 한계가 있습니다. 글쓰기 노하우를 알려줘도 상대방이 안 쓰면 그만이니까요. 방법이 아주 없진 않습니다. 글을 쓰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어요. 첫째 마감, 둘째 독자, 셋째 원고료. 이 중 하나만 있어도 글을 씁니다. 저는 독자 역할을 합니다. 써온 글을 열심히 읽고 의견을 말해줍니다. 


1. 나의 편견과 무관심 – 게으르니까 뚱뚱하다 


한 친구가 아르바이트 경험을 글로 써왔습니다.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더니 살이 쪘다”라는 문장이 있었습니다. 저는 물어봤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힘들어서 살이 빠지지 않아요?”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요. 식사 시간이 넉넉지 않아 음식을 빨리 먹고, 빨리 먹으려니까 라면이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고, 바쁘면 못 먹고 안 바쁠 때 몰아서 먹고, 규칙적인 식사가 어렵다고 해요. 그래서 살이 찐다는 거죠. 

그렇다면 방금 말한 내용을 글에다가 보완해라, 나처럼 알바생들 처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요. 저는 뜨끔했습니다. 우리 보통 뚱뚱한 사람들 보고 뭐라고 말하죠? “게을러서 살이 찐 거다.” “젊은 사람이 자기 관리도 못하네.” 저도 은연 중에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자기 관리는 젊은 사람이라 잘하는 게 아니라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에요. 온종일 서서 일하느라 붓기가 안 빠져 살이 되고, 알바하면서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 운동 하기도 어려워요. 근데도 “게을러서 뚱뚱해” 혹은 “뚱뚱한 걸 보니 게으르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알바생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았습니다. 내가 일하는 청년들 생활을 모르는구나. 누굴 적극적으로 미워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더라도 남의 삶에 무관심하다면, 익숙한 생각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편견이 강화되고 혐오가 생기겠구나, 하는 걸요. 네.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무관심은 어떻게 혐오와 폭력이 되는가. 


2-1. “남자는 무조건 여자말만 들어라”


어느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강연 동영상을 보게 됐습니다. 특유의 재치와 입담, 사회적 약자 편에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남자분이었죠. 저도 좋아해서 기대감을 안고 보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조건 남자들은 앞으로 살면서 여자 말을 듣고 산다 생각하면 중간은 갑니다.”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잘 보살펴 달라.” 

“(남자는) 사람이 아니고 개다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강연 제목이 뭔 줄 아세요?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 객석을 채운 선남선녀 커플들이 물개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를 하고 난리 났어요. 

근데 노트북으로 그걸 보는 저는 한숨만 나와요. 그냥 처음 드는 생각은, ’무조건 여자 말만 듣는다고? 여자를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얼핏 여자를 추켜세우고 남자를 비하하는 거 같지만 잘 보면 아니에요. 온갖 잡다한 일 여자가 다 하라는 거잖아요. 시시콜콜 멀티플레이어가 돼라. 이런 류의 말은 많습니다. 고인이 된 탤런트 최진실 씨가 처음엔 씨에프 모델로 활동했는데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말이 있어요.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또 결혼해서 아들 둘 키우는 여자들은 뭐라고 하죠? “저는 아들 셋 키워요.” 남편도 애처럼 손이 많이 가고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란 뜻입니다. 나이드신 어른들은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집안이 잘 된다”라고도 해요. 여자는 남자를 보살피는 것도 모자라, 집안 부흥의 책무까지 맡게 되죠. 요즘 이걸 ‘효도 대행’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말들은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이 아니라, ‘여자를 평생 노예처럼 부리는 법’에 가깝죠. 


2-2. 여자의 수고와 노동에 무관심한 사회 – 남성의 언어


또 한평생 여자 말만 듣고 산 남자는 어떤 가요. 결혼 전에는 엄마가 결혼 후에는 아내가 해줘서, 여자 말만 듣고 산 남자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여보 양말 어딨어? 작년 여름에 입던 바지 어딨지?” 자기 옷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됩니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안 좋습니다. 남자를 무능하게 만들고 여자를 혹사시키죠. 그 방송인은 여자가 상위종족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여자는 서열 맨 아래에요. 궂은 일 도맡죠. 그걸 사람들은 잘 몰라요. 여자가 하는 노동과 수고에 대해 무지해요. 왜? 그래도 되니까요. 

‘남자는 평생 여자말만 들으면 중간은 간다’ 우리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말들은 그 말로 인해 안락을 누린 사람들, 자기 손에 물 안 묻히는 사람들, 상대적으로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담아낸 말입니다. 남자의 언어, 어른의 언어입니다. 


3-1. 무관심이 혐오로 : 약자는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 쉽게 해석-혐오당한다. 


약자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릴 수도 있을까요? 약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사람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언어는 배제돼 왔죠.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온갖 역할을 부여해놓고, 그걸 못하면 ‘여자답지 못하다’ 여성 혐오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내면화되면 여자도 자기 스스로 여성 혐오 합니다. ‘내가 좀더 지혜로웠다면 다 잘했을 텐데’ ‘남편을, 남자친구를 사람 만들었을 텐데.’ 싸우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무려 개를 어떻게 사람을 만들어요? 학교도 부모도 못한 ‘사람 만들기’를 어떻게 한 사람이 합니까. 

우리가 익숙하게 말하고 쓰는 말들은 이미 기득권의 것이에요. 약자 편이 아니에요. 약자들은 그래서 쉽게 혐오에 노출됩니다. 남들에게 온갖 힘든 역할 부여받고, 해석 당하고, 평가 당하고, 손가락질 당합니다. 그런 말들이 퍼져나가서 편견이 되고 혐오의 씨앗이 됩니다.


3-2. 여성혐오의 대표 사례 : 맘충

여성혐오의 대표적인 사례, ‘맘충’ 얘기 해볼까요. 맘충은 식당에서 사람들이 밥 먹는데 기저귀 갈거나, 컵에다 소변을 보게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엄마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해요. 저도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에게 들었어요. 기름 넣으면서 아기가 똥 싼 기저귀 버려달라고 내미는 엄마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알바생 입장에선 참 너무한다 싶으면서도, 그 엄마 입장을 모르지 않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위험에 빠지는 한 생명체를 돌본다는 일은 간단치 않아요. 24시간 365일 고도의 집중을 요합니다. 아기가 갑자기 토한다거나 똥을 싼다거나 운다거나 긴급 상황이 발생해요. 엄마가 되면 아기 중심으로 세상을 살게 되고 딱 아이 몸뚱이 만큼 시야가 좁아지는 거 같아요. 그러니 남의 사정과 형편을 헤아릴 수 없죠. 우리나라는 수유실 같은 육아 인프라가 아직 부족하니까 엄마가 애 데리고 더 곤란에 처하죠. 몰상식한 행동도 하게 됩니다. 그런 속사정을 헤아려본다면, 마냥 혐오의 손가락질을 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4.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이중 잣대 :  노 키즈 존? 노 아재 존은?


근데 이상하죠? 아이는 남녀 둘이 낳고 기르는 건데, 아빠는 어디가고 욕은 엄마가 먹죠? 

또 욕먹는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죠. 노키즈존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거에요.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특정 연령 이하 아이들 출입을 금지시키는 ‘노 키즈 존’이 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를 찾아봤는데요, 음식점을 찾은 사람들이 시간적 공간적 침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글쎄요. 이런 생각을 해요. 그 식당 운영하시는 분들도 어른일 텐데, 기억하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도 아이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시간과 공간을 침해하고 민폐 끼치면서 어른이 되었을 거에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을 품어주지 못한다는 건 심한 반칙 같아요. 


어른은 과연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삽니까? 한 친구가 편의점에서 손님들이 함부로 대하는 것이 힘들다. 스무살 재수생이었어요. 신용카드를 건넬 때 툭 던지는 사람들, 그리고 비닐봉투가 20원이라고 말하면 왜 그 돈을 받느냐며 화를 내는 사람이 많답니다. 주로 카드를 던지거나 언성을 높이는 사람은 중장년 남성이래요. 인사도 잘하고 제일 좋은 고객은 초등학생이고요. 

은행에서 우체국에서 대합실에서 ‘왜 안 되느냐’고 소리를 지르는 분들도 중장년 어르신들인 경우가 많죠. 그렇다고 편의점에서 은행에서 50세 이상 남자 고객의 출입을 금하는 ‘노 아재 존’이 생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매력을 가진 집단이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출입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서 보듯이 타인에게 불편을 끼친다고 해서 다 출입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돈이 없거나 발언권이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우선적으로 배제하죠. 쉽게 낙인 찍고 혐오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체성은 계속 바뀌죠. 아이였다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 아이를 키우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피해를 입히기도 하고 입기도 합니다. 편의점 고객이다가 나이들어 편의점 알바를 할 수도 있습니다. 삶은 계속 변합니다. 그때마다 당장 불편하다고 금지하고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결국 내가 설 자리도 사라집니다. 우리 사회 생태계는 온갖 금지와 차별의과 혐오의 지뢰밭이 되어, 우리 모두 발 디딜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5-1. 사람 공부가 필요해 – 알면 사랑하고 모르면 혐오한다 


무관심은 어떻게 혐오와 폭력이 되는가. 오늘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죠. 저는 뒤집어서 모르면 혐오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어떻게 아느냐? 무관심에서 어떻게 벗어날까가 중요하죠. 

이것은 글쓰기 관련 강의를 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어요. 글쓰기에서 공감하는 게 중요한 거 같은데, 공감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냐는 거죠. 저는 ‘공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려면 시간과 계획을 갖고 공부하듯이,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알려면 마찬가지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제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타인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독자가 되어야하는 거죠. 저도 글쓰기 수업 하면서 남들이 써온 곡진한 자기 이야기 들으면서 편견이 사라졌거든요. 그렇지 않았으면 자동으로 편견이 막 생겼을 거에요. 


저는 글 쓰는 일 할 때, 인터뷰 하면서 동성애자 감독을 처음 만났거든요. 인터뷰이니까 공부해갔어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그 이후에 자연스럽게 동성애자 친구들이 생겼어요. 편견이 생길 틈이 없이 직접 삶으로 부딪치고 알아간 거죠. 지금 일부 동성애 혐오하는 분들도 가까이 지내고 서로 섞여 지내면 진지한 대화 나누면 혐오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나와는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접하면서 배우고 자극이 되고요. 동성애 친구들 고민을 듣다보면 나는 이성애자이지만, 곧 어떤 상황에서 억압받고 곤란했던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다르지만 같아요. 성 정체성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과 한계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성애를 반대할 수 없듯이 동성애도 반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도 다른 존재를 반대할 자격은 없으니까요. 


5-2. 말의 재난시대 – 00충 없는 사회를 위하여


지금을 말의 재난 시대 입니다. ‘노 키즈 존’ ‘맘충’ ‘일베충’ ‘진지충’ ‘급식충’ 단정짓고 낙인찍고 혐오하는 말들을 너도나도 사용하고 있어요. 무슨무슨 충 없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요. 저는 남이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질 걸 제안하고 싶어요. 가까이는 엄마의 집안일을 잘 관찰해볼 수 있고, 매일 드나드는 편의점 알바생의 표정도 살피고, 카드도 이왕이면 곱게 내주고요. 니체도 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했거든요.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상관 없어 보이는 낯선 존재의 삶에도 다가가고요. 그렇게 타인의 삶에 대해 알려하고 물어보고 이해하려하고. 맨 처음 했던 얘기 기억하시죠. 독자 역할, 우리 서로가 서로의 삶을 읽어주는 독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 혐오와 폭력이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카메라 앞에 얼굴이 연속으로 나오는 게 창피하지만, 열심히 준비했므로, 나누기 위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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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 처음 봐요

[은유칼럼]

난생처음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울트라 코리아 2017’이 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이르러 친구와 수군거렸다. 우리가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온 거 같지? 과감한 신체표현 의상에 타투는 기본, 코스튬은 선택, 국기를 든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옷 한 벌로 한 계절 날 거 같은 중년의 덕후들도 오는 록 페스티벌과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은 달랐다. 나이와 계급의 차이랄까. 관객이 젊고 부티 났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어보니 이십대가 가장 많고 사오십대 예매율은 2%라고. 내 생에 그렇게 처음 2%가 되어보았다.


나도 록 페스티벌을 처음 간 건 이십대였다. 송도에서 열리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 남편이랑 두 돌 지난 아이와 동행했다. 중년 남성의 숙소 주인이 말했다. “아줌마도 이런 데를 다녀요?” 질문도 질타도 감탄도 혼잣말도 아닌 그것은 ‘아무말’. 아이와 다니면 존재가 납작해진다. 몰개성, 무취미, 무례함의 대명사 아줌마는 제3의 성으로서 청소년, 흑인, 여자처럼 장소에 제약이 따른다. 트집 잡는 이들을 무시로 대면해야 한다. 1999년에 겪은 일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두 남자가 얼굴을 맞대고 하는 말, ‘게이 처음 봐요.’ ‘나도 광부 처음 봐요.’ 유쾌하고 통쾌하게, 광부와 퀴어라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합심해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영화는 다룬다. 게이 활동가가 단체 동료들에게 광산 노동자 파업에 연대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 광부랑 무슨 상관이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활동가는 이렇게 답한다. “광부는 석탄을 캐고 그 석탄으로 전기가 만들어져야 우리가 클럽에서 새벽까지 놀 수 있으니까.”


도구적 접근이긴 하지만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삶은 무수한 타인과 연결돼 있으나 도통 만나지 못한다. 단조로운 일상의 동선을 태엽 인형처럼 왕복하며 보는 사람만 보고 가는 데만 간다. 살면서 직접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이나 티브이(TV)에서 접하는 게 전부다. 회사원은 사무실에, 주부는 집안에 머무는 일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나온다. 그러니 실제 삶에서 ‘락페에 온 아줌마’처럼 지정 구역을 벗어난 사람을 ‘처음 보면’ 혼란을 느낀다. 그게 심하면 혐오가 될 테고.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인터뷰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매번 낯선 존재와 마주하는데, 무지로 인한 긴장과 혼돈의 시간을 치르며 공부하는 중이다. 얼마 전엔 비혼모를 처음 봤다. 만남이 거듭되자 그녀는 “책 낸 사람 처음 봐요” 내게 말했고 “이렇게 글 잘 쓰는 비혼모 처음 봐요” 나도 고백하고 같이 깔깔댔다.


처음 보면 한 사람이 비혼모로 보이지만 자꾸 보면 비혼모는 결혼제도 외부에 위치한 상태의 설명일 뿐임이 드러나고 자기 한계와 고민을 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입체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처음 보고 계속 보는 게 관건이다. 영화처럼 서로 삶이 스밀 때까지.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에 같이 간 친구는 일 중독자처럼 사무실에 갇혀 청춘을 보냈다. 공연장에서 미친 듯이 노는 젊은이들 ‘처음 본다’며 자기는 왜 저렇게 살지 못했는지 한탄했다. 나는 아들 또래를 보면서 군 복무 중인 아이가 떠올라 잠시 미안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다리 아프게 놀았다. 집 나간 자식 찾으러 오는 엄마가 아닌 사오십대 여자 관객을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 보는’ 나와 낯선 이웃을 위해.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2903.html?_fr=mt5#csidxfa2937ffa1b5c528b344676b1d047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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