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시 리뷰_ 일상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다

[글쓰기퍼주기]

천연나방 –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애당초 모호한 남의 기억을 갖고 일하는 직업적 경험을 기반으로 글을 써서 그런지 문장이 조심스러워요. ~같다. ~문제다. 중복이 많고 예컨대, 기실은, 어쩌면, 그러니까 등 부사 사용이 빈번합니다. 자신 없는 말투, 지나친 부사사용은 모두 메시지 수용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문장에 군더더기가 많을 경우 글을 다 읽고 나도 선명하게 남는 게 없습니다. 나중에 책을 쓰신다하니, 더욱 주의하셔요.

 

 

-‘무슨 일이 있었다(.)’와 ‘어떻게 기억 한다’는 전혀 별개의 말 같다.(->말이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인 사실에 관련된 것이라면 후자는 ‘주관적 진실’에 가깝다.

->만약 진실이라는 것과 연관 짓는다면, 전자가 객관적 사실이고 후자는 주관적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예컨대 과거의 당시를 촬영한 영상에 가장 근접한 것일수록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지겠지만 후자는 다르다.(후자는) 지금 현재 그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기실은) 기억은 과거가 아닌 here and now(의 문제이)다. (->문제이다, 중복 삭제)

-그 때는 또 시세미나로 내 외로움을 그럭저럭 달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직, 간접 경험만큼 동료들의 말들을 이해했던 것 같다. 수줍었던 것 같고 뭔가에 겨워 있었던 것 같았으며 속으로 우쭐했었던 것 같지만 항상 소통의 부재에 갑갑해 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단락은 문장이 사건 없이 관념적 설명으로 이뤄져 있네요. ~모르겠다는 표현이 빈번하니 더 혼돈스럽고 모호해요. 이럴 경우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는 글을 따라가기가 어렵고 필자의 독백에 가깝습니다. 소통을 위한 글을 써주세요.

 

 

-그와 헤어지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억압되었던 ‘나’가 밀려와 나를 채웠고 채워진 내 곁에는 산과 같은 아쉬움이 함께 했다...나는 자주 이와 비슷한 모순된 마음을 접한다. 아마 그들은 ‘마음을 쉬고 싶은’ 바램에서 편히 모순되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마당은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안온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는 주인 마음도 함께 혼돈이다. 그들이 모순일 때 나는 길을 잃고 헤맨다.

 

 

아래 문장은 살아있는 경험에서 나오는 섬세한 표현들이 좋습니다. 나의 일에 관해서 말할 때는 설명하면 복잡하니까 하나의 사례를 들어서 말하는 경우가 더 낫겠죠. 기억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명제화시켜서 이야기를 끌고 가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엉클어진 실 뭉치 같은 마음을 풀어가는 작업인지 응어리진 마음을 녹여가는 협업인지 혹은 혼탁한 액체의 불순물이 가라앉기를 가만히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인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니 그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조차 부담일 때가 많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 나는 그냥 아직은 최대한 열심히 듣고 대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김민지 – 불만의 시적 표현을 위하여

 

 

김수영의 시구와 자기의 생각을 찬찬히 써내려갔네요. 마주보며 솔직하고 담담하게 잘 써내려갔습니다. 주위의 시선, 현실의 안락, 익숙한 갈등. 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직장생활의 늪. 그 안에서 방황이 공감이 갑니다. 자기진술적인 내용에 구체적인 에피소드가 들어가면 더 글이 생생하겠죠. ‘씀씀이가 커졌다’ ‘멍청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주로 지출을 하는지 ‘문득 문득 “내가 뭐하고 있지?” 라는 회의감이 든다’는 감정은 주로 언제 느끼는지. 카드명세서 봤을 때인지, 내가 느끼는 나의 초라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요소인지, ‘몸을 사리지 말고’ 더 풀어서 써주면 참 좋은 글이 될 것입니다. 타당한 불만을 방향성 있는 불만으로 표현해야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 불만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를 마주 보지 못하고 숨기려 한다. 나의 있는 그대로를 마주 보면 초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영 에게 나를 바로 보는 방법을 배워 본다.

 

 

-힘이 들어 정신을 못 차릴 땐 김수영처럼 술도 먹어보자. 뭐든 직접 몸으로 느껴봐야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몸을 사리지 말고 기쁨과 슬픔, 삶의 고달픔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바라보자. 방향성 없는 불만이 아닌 김수영처럼 타당한 이유로 불만을 표현하자.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겁 없이 살다 보면 진짜 나를 보는 눈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맑음 – 사건 이후가 더 중요하다

 

 

사건은 매개일 뿐이에요. 글의 비중에서 사건에 대한 서술이 좀 많네요. 이런 사건일수록 나는 흥분하고 남은 지루하기 십상입니다. 원래 나와 남의 감정의 온도를 맞추기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그것을 최대한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는 해야겠죠. 누구나 살면서 가끔 비상식적 행태를 직면하게 되죠. 그것을 글감으로 채택할 경우, 상황 묘사는 간략하게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하고요. 그 사건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반응과 감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비장해지는 나. ‘오랜만의 잠금해제’가 되었다고 했는데 당시 상황의 어떤 특수성이 있었는지, 이전에는 몰상식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했는지, ‘내가 이런 사소한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세상의 불의에 대해 말할 수 있나’ 라고 할 때 사소한 문제와 대비되는 세상의 불의는 뭐라고 여기는지. 이번 사건 이전과 이후, 사소함과 거대함 등 선명한 대비가 되면 글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맑음님이 민원을 넣고 해결되는 과정은 통쾌하고 이런 해결방법을 공유하는 것은 글의 공익적 가치를 높입니다.

 

 

발끈하는 나, 갸륵한 나, 혼란스러워하는 나. 모두 내 안의 나죠. 그중의 진짜 나가 누구냐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기르는 무수한 자아를 마주치고 알아가는 일이 글쓰기 작업이 아닐까요. 마지막에 양말짝, 비유 좋아요.

 

 

- 토닥여 주듯 -> 토닥여주듯 (붙여씀)

- 야지랑 대다 -> 일본말로 나오네요. 적당한 한국어로 대체해야죠. 깐죽거리다?

- 바락대고 싸웠던 것도 나이고 갸륵한 얼굴로 사고를 넘기던 순간에도 나는 나였어. 하지만 ‘강자 앞에 당당한 나’는 정말 나였던 걸까? 내 안의 간극을 이해할 언어를 찾지 못한 채 만들어낸 ‘나’들은 지금 어디를 떠도는 걸까. 나는 그냥 나쁜 년인 건지, 그래도 그리 나쁜 년은 아닌 건지,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나를 속이는 건 양말짝을 맞추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어.

 

 

 

초롱 – 한 가지 주제를 끈질기게

 

일만시간 법칙으로 시작한 도입부 좋습니다. 이어 ‘수학과를 졸업하고 수학 가르치는 일을 20년 넘게 해 왔’다고 했는데 그게 시간으로 환산하면 몇 시간인지 써주시면 더 실감나겠죠. 일만시간 법칙은 왜 누구에게 적용되고 누구는 피해가는지, ‘선천적인 재능이 없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대가가 되기는 힘들다’는 신문기사 인용을 예로 들고 다른 책도 찾아보면서 그 부분을 끌고나가도 좋은 글감이 되었을 텐데요. 갑자기 주제가 글쓰기로, 심리학 공부로 연결되니까 글 흐름이 툭툭 끊기네요.

 

 

‘날카로운 지성도, 지혜도 가지지 못한 내가 한심할 뿐이다. 글쓰기를 할 신체적, 환경적 여건이 아닌데도 바라고만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이런 부분은 쉬운 푸념입니다. 이것이 글이 되려면 근거와 사례를 제시해야죠. 나는 수학교사로서 논리적인데 감수성이 부족하다. 그런 걸 언제 느낀다거나 하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야합니다. 또 글쓰기 적합한 신체적 환경적 여건은 뭐라고 생각하는지도요. 글쓰기는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자기인식이 되고나면 덜 서럽지 않을까요. 초롱선생님의 글 오랜만에 반가웠습니다.

 

 

 

 

임효진 – 죽은활자의 정체를 밝혀라

 

 

글은 어차피 자기 생각을 담아내는 작업인데요, ‘~생각한다’는 동사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첫 단락에 연달아 나오네요. 그럴 때 글이 축축 쳐집니다.

 

 

‘요즘은 대학을 뭐 하러 그렇게 기를 쓰고 다니려고 했을까 생각한다.’

-> 왜 그렇게 대학을 기를 쓰고 다녔을까.

 

 

대학에서 사람도 사랑도 관계도 배웠다고 나와서 앞 내용과 충돌해요. 괜히 다녔다고 하기엔 너무 큰 걸 얻으셔서 설득력이 떨어지죠. 졸업을 앞두고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어야한다는 불안감, 흔들림. ‘나를 지우고’ 현실에 타협하는 과정, 갈등이 드러나죠. 그러다가 다시 ‘가끔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떠올려보면 한심하다’로 논의가 전개되고 마지막은 책이 감옥이라는 마무리로 끝납니다. 글이 우왕좌왕합니다. 죽은 활자로 사람을 살리는 공부가 가능할 리 없다는 문제설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글감이 될 텐데요. 그것이 하나로 수렴하려면 대학‘생활’과 대학‘공부’를 구분해야합니다. 대학생활 전체 비난, 독서 전체의 무용론은 글이 커져버려서 설득력 잃게 돼요. 글감의 대상을 좁히고 구체화시킨다면 더 좋은 글 쓸 거예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했어도 의미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이런 표현은 모호하고 위험해요. ‘다른 일’이 너무 종류가 많고 자칫 폄하하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시골 가서 농사나 지을 걸 그랬다, 는 말처럼 농사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모르듯 세상물정 모르는 이의 말 같이 들릴 수 있거든요.

-돌이켜보면 여전히 책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또 내 안에 갇히게 만드는 감옥이다. 겨울왕국 엘사처럼 나만의 성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앉아 위선의 평안을 찾는다. 죽은 활자에서 사람을 살리는 생각이 나올 리 없다.

 

 

 

나비 – 현실을 기록하는 카메라처럼

 

 

아직 감을 못 잡았다고 하셨는데 처음이라 어려우셨을 거예요. 시와 조응하여 쓰느라 더 헷갈리셨을 텐데요. 일단 글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절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피해야합니다. 뮤직비디오 말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할까요. ‘나는 욕망할 수 있기에 소유할 수는 없어도 너의 가지를 분지를 수는 있다. 너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같은 경우 언제 그런 충동이 들었는지 장면을 보여주시면 공감하겠지요. 소유와 파멸은 흥미로운 개념이거든요. 시적인 잠언처럼 던져진 말들이 멋지긴 한데 이런 모호한 말은 한두페이지 쓰고나면 더 이상 글이 진전이 되지 않습니다. 일상이라는 무궁한 세계에서 하나씩 글감을 잡아채서 써주세요. 마당을 서성였던 김수영처럼, 바로 앞에 있는 것부터요.

 

 

- 나를 꽃으로 비유하지 말라. 설움에 목 놓아 밤새 울어재껴도 나는 욕망 할 것이다. 난 소유할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쓸 것이다. 아는 것과 욕망 사이의 간극에 「풍뎅이를 집어넣어 그 등판」에서 계속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니 그것이 그리 쉽단 말이냐, 넌 지쳐 쓰러질 것이다. 혼자 도는 것들은 다 그러하다. 난 맞물려 세상을 살아가기에 소유욕이 지배되고 채찍이 가해지길 바라는 것이다.

 

 

 

강준혁 –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사실만

 

 

감수성이 섬세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분명 유리한 지점이 있지만 자기몰입적이어서 자폐적인 글을 생산할 확률도 그만큼 높습니다. 그리고 착하고 반듯한 사람보다 좀 삐딱하고 못된 사람이 글쓰기가 처음엔 낫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안의 도덕기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죠. 준혁샘은 찬찬하게 글을 풀어가는 능력이 있는데 착한 결론으로 수렴하는 글이 되어서 밋밋해졌어요. ‘설움의 자리를 내어주자’라는 말은 굉장히 모호하거든요.

삶에서 설움의 경험들을 무수히 마주한다. 유년시절처럼 생생하게 대학생 때 군대에서 직장에서처럼 단계별 혹은 시기별로 설움의 사건을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살면서 설움을 피해갈 수 없었으니 걍 자리를 내어줄란다 했으면 깔끔했겠죠.

 

 

일문일사. 한 가지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주세요. 문장이 명료하면 메시지 전달이 잘 된답니다.

 

 

-살면서 이런 저런 바람의 좌절과 그로인한 설움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란 말을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주변사람에게도 곧잘 하곤 했다.

->살면서 좌절과 설움의 쌓였다. 어느 순간 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라는 말을 나에게도 나에게도 곧잘 했다.

-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에 잘 공감하지만 정작 내가 뭘 기대하고 바라는지 나의 이야길 하는 것을 꺼려한다.

->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좋아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정작 나의 이야기는 꺼린다.

 

 

-보편적 감정을 떠나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선호요, 취향이요, 표현인데 그런 감정을 부정하면 과연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존재할 것인가. 바람과 감정이 있기에 결국 나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설리 – 왜 무엇이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았을까

 

할머니 얘기, 영화얘기. 이제 어떤 상황을 전달하는 것은 꽤나 능숙하고 자유로워졌어요. 4기에 설리글이 건조했는데 지금은 글에 온기가 돌고 그것이 가장 큰 변화이자 성장으로 보이네요. 그런데 문제의식이 없는 글이라는 비판이 나왔고요. 문제의식을 일부러 뺀 건 아니고 뭘 말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다고, 수업이 끝나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죠. 문제의식이 그렇게 뚝딱 생겨나면 글쓰기의 고통도 없을 터. 생각을 묵히다가 낳는 출산의 과정을 거쳐야겠죠.

 

왜 어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걸 넘어서) 만들고 싶어 할까. 설리의 욕망에 집중해보세요. ‘뭐 같은 일’이라는 배우의 일갈대로, 큰 고생을 감내할 만큼, 할머니 발인이 끝나기 무섭게 뛰어갈 만큼 나는 왜 영화판을 기웃거리는지, 미술팀 일이 좋은지. 소위 성공한 감독, 배우는 자기 직업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주변부적인 직업은 그럴 기회가 없잖아요. 그걸 편히 솔직하게 풀어서 보충하면 이 글은 참 훌륭해요.

-단편영화를 촬영하고 여러 번의 영화사 시험을 보고, 현장의 사람들을 만났다. 감독, PD, 작가 등 그들이 영화를 하면서 느꼈던 것, 배웠던 것, 나누고 싶었던 것을 들었다. 다들 입을 모아 하는 첫 마디는 영화일 힘들다는 말이었다. 힘든 만큼 보람이 있다고 느낀다면 보람 있는 일일 수도 있다는 덧붙임이 간혹 나왔다.

-> 설리만의 느꼈던 것, 배웠던 것, 나누고 싶었던 것, 그리고 보람은 무엇인지.  

 

-배급사나 투자사에서 오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가지각색의 관점으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던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시간이었다. 정답은 없지만 각자의 답이 있었다.

-> 어떤 유익함인지, 설리의 답은 무엇이라고 현재 생각하는지.

 

-가끔 희열을 느끼고 간혹 무료함을 느꼈다. 원하는 그림은 뚜렷하게 없지만 원하지 않는 그림은 명확히 갖고 있기에 어려웠다. “너네 왜 이렇게 좆 같은 일로 먹고 사냐!” 다들 웃었다.

 

 

 

박선미 – 등장인물이 많으면 혼란스럽다

 

 

못생긴 설움의 성장기. 에피소드가 비슷한 류가 중복되네요. 좀 길다는 느낌입니다. 친구 여동생에 대한 남자들의 로망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 오랜 눈물겨운 위문편지 군비라지 등 두어 가지로 압축하면 좋겠어요. 외모에 대한 집안과 집밖의 상반된 평가도 좋은 글감이죠. 어떤 분은 그래서 “사람 팔자 시간문제가 아니라 장소문제”라고 말하던데, 나에 대한 평가가 왜 달랐을까. 고민해보면 재밌겠죠. 외모에 대한 평가와 성격 형성에 대한 부분도 탐구해보고요. 이 글은 등장인물과 사건이 많은 것에 비해 주제의식이 모호합니다. 나는 삼남일녀의 셋째다. 두 오빠와 남동생은 훤칠하다. 나는 작고 못생겼다(고 구박받았다) 뭐 이런 식으로 가지런히 정돈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가면 좋았겠죠.

 

 

-오빠들의 비주얼 -> 오빠들의 외모

-다리 밑에서 주워온 못생긴 나의 설움의 주범은 늘 오빠들이다.(비문)

->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 못생긴 딸이라는 설움을 받았다. 그 주범은 늘 오빠들이다.

 

 

-남자들이라면 대부분 어쩌면 지구에 살다 간 모든 남자들이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친구의 예쁜 여동생과 로맨스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다. 더구나 친구의 외모가 키가 훤칠한 훈남의 경우라면 여동생에 대한 기대치는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게다가 두 살 혹은 네 살이 어린 여동생이라면 장래를 꿈꾸기도 하겠다. 친구중의 하나는 친구여동생 보다는 이상하게 친구누나한테 더 끌린다고도 하는데 다행히 남동생은 나보다 여섯 살이 어려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다.

-> 일반 남자들. 친구 여동생. 친구의 외모. 훈남. 두 살 네 살 어린 여동생. 친구 중의 하나. 친구여동생. 친구 누나. 남동생. 등등 한단락에 등장인물이 과하고 정보가 쏟아져서 혼란스럽죠.

 

 

-두 오빠들이 자신들의 세상을 찾아 떠나가면서 못생긴 나의 일상에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못생긴 내게 이상하게도 키 크고 잘 생긴 남자들의 프로포즈가 잦았다. 난 순정만화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 한 다정하고 멋진 남자와 첫사랑을 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자친구를 보면서 ‘이게 꿈인가 생신가’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미운 오리새끼의 부활이다.

 

 

 

 

경선 – 설움으로도 웃게 할 수 있는 능력

 

웃긴데 뭉클한 뭔가가 있는 글. 문장이 간결해지면 매력적인 글을 쓸 잠재성이 있어요. 글을 배우는 초기에는 주제를 한 가지씩 잡고 깊게 오래 들여다본다는 마음으로 써요. 이 글은 ‘가족과 설움’이 주제가 되겠죠.

 

 

-날 보면 항상 ‘미스코리아 강’ 이라고 놀려대던 아버지에게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 설움은 무언가 바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서러움도 이제 없다. 아버지는 점점 그냥 현재 지구에 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아버지에게 서러움도 느꼈었고 어느 순간, 분노, 미련, 배신감, 섭섭함 등 많이 느꼈다가 시간이 지나니까 아버지자체가 무감각 해졌다.

 

 

-> 분노, 미련, 배신감, 섭섭함 등으로 퉁치고 가기엔 중요한 감정이에요. 뭐가 왜 서러웠고, 그 서러움에 본인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한번 차분히 정리해보는 작업도 좋을 것 같아요. 그 과정이 없으면 설움이 잠복해있다가 살다가 불쑥 나와서 투정부릴지도 몰라요.

 

 

-설움의 주체가 대부분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이거나 나의 ‘가족’이었다.

-> 나는 서럽다. 이렇게만 써요. 설움은 당사자만 느끼는 속살 같은 감정이라 나의 가족이 설움을 느낀다고 내가 말하는 건 무리에요.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 라는 표현은 모호하고요. 치열하다는 건 주관적이니,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게 맞고요. 이정도면 저 사람 치열하다는 생각 들게요.

 

 

-내 공부하기 바쁘고, 아르바이트, 대학 생활, 사회생활, 가족생활 외에 할 게 너무나 많다. 가족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작아지다보니 이제 싸우는 것도 피해버린다. … 가족 간에 따져봤자 답이 안 나온다. 결국 설움조차 비워내는 게 맘이 편하다. … 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살면서 만난 동료들에게 찾아도 괜찮을까?

 

 

->가족, 친구, 동료 누가 나의 설움을 달래줄까. 설움 소통에 대한 열망이 보여요. 그걸 더 붙들어보세요. 내가 누군가의(엄마?) 게워낸 설움을 받아주는 사람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죠. 내가 안하는 건 남도 안 하니까요.

 

 

-오프라인으로 뜨겁게 만났다가 헤어짐을 좀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이별은 없었고 계속 반가움만 있으니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설움을 게워낼 때가 제한적이다. 가족에게도 풀어내기 어려운게 설움인 것 같다. 자유롭게 설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을 앞으로 쭉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톰슨가젤 – 솔직함의 민낯이 아름다워질 때까지

 

“첫 연애를 하고 이별하게 될 때 너는 크게 아플지도 모르겠다.” 첫 문장이 강렬하네요. 문장도 간결하고 전체적으로 잘 써진 글입니다. 그런데 좀 싱겁고 재미없다고 할까요. 마치 상처가 두려워 연애 안 하는 것처럼 글에서도 조금만 내어준 느낌입니다. 일부러는 아니고, 성정이 그러신 것 같아요. 이 덤덤함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 한 세계가 있을 텐데요. 계속 자기탐구를 하는 글을 써서 그것의 미학을 발견해보세요.

 

 

8년간 연애 안 해본 것은 그럴 수 있는데, 끌림이 있어도 일시적 감정이라고 다그친 것.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네요. 왜 피했는지. 아플 것이라는 감정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지. ‘타인의 평가를 걱정했다’고 진단했는데 그것 역시 언제부터 그랬을까요. 부모님이 엄격하셨는지, 장남인지 등등 사회적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자리, (무명) 배우라는 자리, 만년 2등이라는 자리…’ 이거 톰슨가젤님 이야기에요?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가 않네요.

 

 

-언젠가 마주해야 할 진실을 자꾸만 뒤로 미뤄놓고 하루를 사는 기분. 나는 아직 아프지 않았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본 적이 없다. …타인의 평가를 걱정했다. 어쩌면 그것이 주저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외면하게 한 근본 원인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말 하나하나에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고 그 말들이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삶을 살아본 기억이 드물다. 사랑도 연애도 직업의 선택과 미래에 대해서도 주도권을 잡기보다 내줬고, 내게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지 않게 대하는 법을 익혔다.

 

 

-> 자기감정 억압한 채로 사랑을 미룬 채로 살기엔 생은 너무 길고 지루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피하는 것보단 내성을 기르는 게 삶에 유리합니다. ‘민낯을 봐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선언 지지합니다.

 

 

내복곰 - 문장이 길면 반드시 엉킨다

 

 

생각은 뒤엉키게 마련이지만 (그게 정상이지만) 글은 그것을 한올씩 뽑아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거겠죠. 문장으로 만들 수 없는 생각은 생각이 아닌 거예요. 글쓰기는 내 생각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 그런데 아래 글은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어 동사가 꼬여서 그래요.

-시간이 붙잡고, 시간에 밀리고, 퇴적된 시간에 비례하여 나는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에 대한 자책과 회의, 자유의 원형을 찾아가려는 김수영의 노력들은 시간 속에 매몰되어 가고 그것이 설움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 주어가 ‘시간’인지 ‘나’인지 ‘김수영(의 노력들)인지 불분명해요. 몇 가지 사실이 엉켜있죠. 1)나는 시간에 밀리고 붙잡히면서 살아왔다. 2) 그 시간에 비례하여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자책과 회한이 든다. 3) 김수영은 자유의 원형을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4) 그런 노력이 시간 속에 매몰되어 가면서 설움으로 돌아온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구분, 나에게 놓여진 선택과 기회들을 이리저리 재고, 다른 사람의 선택과 기회, 행운이라는 변수, 나라는 사람을 처음부터 한계 지워놓았던 장치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여자, 7080세대, 무남독녀, 숏다리 등등 이제는 웬지 모르게 불편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 1)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2) 나는 주어진 선택과 기회들을 이리저리 잰다. 3) 다른 사람의 선택과 기회, 행운이라는 변수 (의미전달이 안 됨) 4) 나를 한계짓는 장치들 - 대한민국, 여자, 7080세대, 무남독녀 숏다리 등등은 이제 왠지 모르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다.

 

 

-나는 난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아주 손쉬운 분류조차 되질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더 급해지고 마냥 서럽기만 하다. 자유와 욕망을 마음껏 혼동하여 야무지게 버무렸던 그 시간들이 차라리 그리웁다.

-> 이 문단은 좋습니다. 문장이 짧아서 내용이 파악되죠. 왜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급해지는지, 어떤 걸 욕망하는지 차차 한 문장 단위로 얘기해보면 좋겠네요.

 

 

 

 

다리 - 일기, 날마다 쓰기의 힘

 

저력 있으세요. 술술 이야기를 풀어가듯 이야기가 전개되네요. 특별한 수사를 쓰지도 않는데 글에 고유의 느낌이 살아있어요. 자기만의 어투, 발성, 리듬 등 문체가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일기 쓰며 살아온 삶과 일기를 회피하며 살아온 삶이 대비가 잘 됩니다. 일기장 화형식, 소로우의 글 등 적당한 에피소드와 자료가 글을 풍부하게 하네요.

 

 

-그러고는 하루아침에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은 힘든 일이 분명하니 연습이 필요하단 생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일기를 쓰기 위해 일기를 연습했다? 하하. 앞의 일기와 뒤의 일기를 구별해야합니다. 단어를 다르게 변주하던가 수사를 보충해주세요.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이 하루아침에 가능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글쓰기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장씩은 일기장을 채웠다.’

 

 

-그러니까 열아홉 살의 일기는 이십대의 치열을 기록하기 위한 연습이었던 것이다. 그 일기장은 지금은 없다. 연습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스무 살이 되는 날 집 앞 마당에서 다른 많은 수험 노트와 수험서들과 함께 태워버렸다.

-일기는 인생과 생생히 맞닿아 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글쓰기가 그러할 것이다. 그리하여 수영은 설움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쓴 것이 아닐까. 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인생과 생생히 대면하기 위해 말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 내가 살아난다. 살아난 나를 쓰는 순간은 즐겁지만 그 시간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밤을 새거나 생각에 골몰하거나. 나는 그런 살아남이 두려웠다. 밤을 새다가 출근 시간을 어기게 될 까봐, 다음 날 보내야 할 빽빽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 히드라의 머리마냥 솟아나는 여러 개의 나를 하나의 몸통에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다시 써야한다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어쨌든 이 편이든 저 편이든 써야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벌꿀 - 디테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영화 같기도 하고, 어릴 때 보던 TV문학관 같기도 하고, 헌책방에서 구한 단편집의 첫 페이지 같디고 합니다. 벌꿀님이 들려주는 유년일기는 질감이 참 특별해요. 무심하게 생생하달까. 다만, 글 호흡을 늘리는 일이 관건입니다. 벌꿀님이 늘 부딪쳐서 주저앉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벌꿀님. 손 내밀어드리면서 조르고 싶네요. 어여 더 이야기 들려주세요. 아래 문장은 정말 팽팽하게 긴장감 넘치고 아람답네요.

 

 

-하얗고 차가운 겨울 햇살 아래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그 풍경은 흡사 한편의 익살극 같았다. 배우로 치자면 개는 ‘버스터 키튼’ 같은 위대한 희극배우였다. 익살의 타이밍을 알고 있었고 시나리오를 꿰뚫고 있었다. 연립주택에 사는 어른들은 극 내내 헛발질 하는 조연이었고 그들의 자식들, 내 또래의 몇몇 아이들은 커튼 뒤에서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히죽히죽 웃는 관객이었다. 제 1막이 끝났다.

-아랫집 할머니가 장대 빗자루를 들고 개를 내려치고 있다. 어리둥절하다. 마당에 개 두 마리가 보인다.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저렇게 붙은 건 뜨거운 물을 붓기 전엔 안 떨어져.

 

 

 

이슷 - 살다간 자의 날선 감각으로

 

한번은 꼭 써야할 얘기. 기대가 되는 미완의 글입니다. 앞부분이 어수선해요. 나는 해방촌의 빈집에서 살았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가면 어떨까요. 한국사회에 의미 있게 언급되는 주거공동체, 정의되는 것들의 의미목록 외에도 다른 결의 주거체험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게 신선합니다. 가령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 그런 말이 놓치는 부분이 있죠. 집보다 거리가 더 안전하여 출가한 청소년들의 자기발언이 의미 있듯이 다양한 구성원의 발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살아온 자, 그러나 지금은 궤도를 이탈한 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치열하고 재미난데, 말년병장이 가지는 노련함과 이슷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입니다.

 

 

-그래, 사람은 단 하나 때문에 살지 않는다. 사는 이유가 여러 개로 짬뽕 된 곳이었다 해두자. 사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고, 한 사람의 이유조차도 여러 개가 섞여 있고, 그것 마저도 시시각각 변하는 곳. 삶의 일시적인 상태가 모여 가늘고 길게 줄지어져 만들어낸 어렴풋한 모습만 잠시 동안 가질 뿐이다.

 

-철제 도미토리 침대 한 칸이 집에서 가장 오랜 기간 가질 수 있는 사적 영역이었는데 ,그 마저도 한번 씩 돌아가면서 쓰곤 했다. 도무지 내 손 탄 것이 머무를 수 없는 공간에 마음이 머무를 곳도 없었다.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그곳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처음 보는 손님을 위한 환대를 장착하고 사느라 십분 대기조의 긴장이 지속되었다. 물론 나 역시 그 열린 문을 통해 그곳에 입성했고, 장기 투숙객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줄기가 자라 꽃이 피는 (일정부분 자연스런-삭제 권유) 식물의 생장처럼, 시간은 대단한 권력은 아니어도 말년 병장이 가지는 공간에 대한 편안함을 주었다.

 

 

 

 

김유민 - 혈색이 도는 글을 쓰려면

 

나, 선택, 결정, 부자유, 내면화, 시선, 타협, 강함, 안정, 평범함, 거친 세계, 무기력, 나태, 안주, 불안, 행복, 모순, 방황, 자기극복, 느낌, 의미….

이 글에서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관념적인 단어의 편식이 심하죠. 말이 너무 크고요. 글이 창백해요. 땀냄새가 나고 혈색이 도는 글을 써보려면 (김수영처럼) 일상의 자잘한 생활단어를 많이 써보세요. 여러 색깔의 식품군을 섭취하듯이 다양한 말들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 편 써도 계속 맴도는 얘기가 반벅되거든요.

 

 

-출생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최근 수년간 쌓아온 무기력하고 나태한 삶의 관성을 끊어내지 못하고 끌려들어간다.

->출생 후부터라면 어떤 독특한 성장 배경이 있었는지 정보를 주어야 독자가 이해합니다.

-나의 불안의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된 그 찰나, 사실 나는 행복했던 듯하다. 모순과 불안, 방관의 순환고리를 단호하게 잘라낼 때가 드디어 왔음을 느꼈다. 그 순간의 느낌으로 끝내지 않고 행동에 착수할 것임을, 자기극복을 열어갈 것임을, 이로써 한 단계 나아갈 것임을 느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들이 그저 흘러가 버리고 잊혀져버리게 두는 것을 나는 견디고 싶지 않다. 우리가 숨쉬며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수많은 밤들 중 기억하는, 기억할 만한 날들, 순간들은 몇이나 될까?

-> 기억은 현재와의 투쟁이죠. 기억할 만한 순간은 그냥 떠오르기도 하지만 글 쓰면서 발굴하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한 편씩 끄집어서 스토리로 만들어보세요. 삶에 혈색이 돌고 글도 또렷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글쓰기의 최전선 9기 강사 인터뷰

[글쓰기퍼주기]

은유선생님과의 간단 서면 인터뷰 

 


1:

글쓰기의 최전선이 벌써 아홉번 째 기수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뭐에 하나 꾸준하기 쉽지 않은데, 

꾸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 진 것 같습니까?

(글쓰기 최전선 수업만이 가진 매력?)


-

대가족 느낌? ^^ 고상한 말로 ‘공적 독서’, 그러니까 이야기의 난장이 펼쳐지는 것이다. 어제 한국에 온 일본 철학자 우츠다 타츠루씨 강연을 들으러 갔다. 그런얘길 하더라. 대가족 제도에서 살 때 어른들은 서로 저마다 다른 얘기를 했다. 엄마는 ‘이렇게 살아라’ 아빠는 ‘저렇게 살아라’ 삼촌, 할아버지 다 다르다. 그 혼란스러운 말들에서 아이는 ‘갈등’을 느끼고 풀면서 어른이 되었다. 대가족 제도에는 그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가족이 해체되고, 욕망도 균질화 되었고, 아이가 갈등 상황에 노출이 안 되니까 성숙하지 않는다, 뭐 이런 요지였다.글쓰기의 최전선에는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이 글을 쓰고 같이 읽는다. 한번 쯤 치열한 자기 성찰을 거친 어른들(저자들), 이번 기수 같으면 ‘김수영’일테고,또 잘 살고 싶어서 방황하는 어른들(학인들). 그 말들, 경험들이 충돌하면서 ‘좋은 배움’이 일어나는 것 같다.      



2:

기존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다양한 분야, 여러 작가의 책을 읽어왔습니다. 강의 개요를 볼때 마다 꼼꼼한 요리사가 정갈하게 차려낸 식단을 마주하는 느낌. 글쓰기가 단번에 늘지 않아도, 책만 다 제대로 읽어도 배가 든든할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이번에는 김수영 전집만을 읽는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인가?


-

이번에는 한 작가의 삶에 깊이 빠져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시가 매우, 몹시, 읽고 싶었고 김수영이 그리웠다.

 



3:

왜 지금, 김수영을 함께 읽고 싶어졌나?


-

제 정신으로 살고 싶어서! 하하. 4월부터 직장을 다닌다. 책과 관련된 일이긴 하지만 묶인 생활이 좀 갑갑했다. 나를 잃고 살게 될까 걱정스럽고. 김수영은 밥벌이로 번역하고 글을 쓰는 생활을 고달파하는 산문을 많이 썼다. 이름을 팔고 글을 파는 매명, 매문을 치욕스럽게 생각하면서도 평생 했다. 생활난 때문에 아니할 수 없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무얼 하고 사는지는 명확히 인식했다.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지는 인식하면서 살고 싶고, 김수영이라는처방이 절실했다. 나 같은 처방이 필요한 사람들, 대환영이다. ㅋ

 



4:

이번 글쓰기의 최전선 9기 수업의 제호는 " 자유와 사랑의 글쓰기"다. 예전 글쓰기 최전선 수업을 들었던 나에게 자유, 사랑 이란 단어 사용은 좀 의외입니다.

은유샘이 수강생들에게 글을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대놓고 "큰 단어(추상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생님이 김수영에게서  자유-사랑- 글쓰기를 키워드로 뽑아낸 이유가?   


-

김수영은 (남들처럼 욕망 하는 게 아니라) 본래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자유와 사랑이란 단어로 표현했다. 우리 자유롭게 살자고 주장한 시인이 아니라, 난 이럴 때 부자유스럽고 언제 자유로운지 예민하게 인식하고 자기 분석을 한 사람이다. 자유는 절대 보편적 개념일 수 없다. 실천형 동사다. 김수영 글에서 영감을 받고, 난 언제 자유롭고 언제 억압을 느끼는지 자기만의 자유,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를 각자 쓰게 될 것이다.   

 



5:

시는 말, 언어라는 것을 똘똘 뭉쳐 놓은 반죽을 (입시때는 이런 것을 시의 특징='함축적')  수제비 끓일 때 마냥 뚝뚝 끊어 던져 놓은 것 같이 느낍니다. 김수영은 좀 '읽히는 ' 시를 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김수영 전집을 살펴보니 전기의 시가 어려웠습니다. '외침'은 변함없는 정서인 듯한데.' 무엇'을 외치는지 도무지 들리지 않네요. 아마 다른 수강생도 마찬가지 일텐데, 전문적인 수준의 독해나 설명을 기대하지 않을까요?


-

시는 각자의 삶-경험-감각으로 읽는 거다. 사유보다 느낌의 영역이다. 2년 동안 시 세미나 할 때도 내가 아는 시도 있고 모르는 시도 있었지만, 여럿이 읽으면 어떻게든 읽어졌다. 물론 강사니까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노력은 한다. 시를 읽고 산문을 읽을 것이다. 시인은 시로 만나는 게 가장 좋긴 하니까 먼저 읽는다. 한 사람의 생각의 변화, 삶의 풍경을 따라가면서 연대 순으로 읽고, 그것에 영감과 자극을 받고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글을 쓸 것이다.

 



6:

우리들(수강생)이 미리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을까요?


-

글쓰기는 예습보다 복습이다.ㅋ 수업이 일요일이니 데이트 미리 해두기 정도. ^^  

 



5:

예전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은 아무래도 잘쓴 글 보다는 좋은 글을 지향하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글 /잘 쓴 글 구분은 설명하기 애매하긴 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 글, 글쓰기 최전선에서만 쓸 수 있고 배워나갈 수 있는 글은 어떤 글인가요?


-

삶을 배반하지 않은 글. 삶의 목적은 직업이 아니고 해탈도 아니다. 그냥 사는 거다. 지겨운 반복을 견디는 거다. 김수영은 시도 썼지만 번역도 했고 양계장도 했다. 이 세상이 엉망이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게 서러워서, 설움에 술 한사발 타마시고 방황했고 그 일상의 구질구질한 디테일, 자기모순을 낱낱이 글로 쓴 사람이다. 글쓰기의 최전선에서는 일단 나를 믿고 글을 써보는 정신, 김수영 식의 깡다구, 치열함, 뻔뻔함 그런 걸 배워갈 수 있다.

 



6

이번 9차시에서 가장 기대하는 바는 ?


-

가장 신랄한 김수영 뒷담화. ㅋㅋ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책을 내는 시대가 과연 좋은 것인지는 논의해 봐야겠지만, 난 긍정적인 부분을 본다. 글쓰기가 자기 삶의 고유한 색깔과 깊이, 결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일본이나 영미권에서는 전업으로 쓰는 순문학 작가가 아닌  생활인 작가가 많다. 우리도 그렇게 되는 추세다. 자기 삶의 경험이나 관심사, 사유를 잘 가꾸어 글로 쓰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좀더 ‘공적’으로 이 세상에 환원하고 갈 수 있으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의 최전선이 그걸 도우면 좋겠다.  



은수연-친족성폭력 첫수기 작가

[행복한인터뷰]

지옥 9년 기록 10년 작가 2년차, 난 평범해지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딴사람,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

-김수영, ‘생활의 극복’ 중

 

휴일이면 종종 도심의 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영어 공부 삼매경에 빠진다. 잠시 고개를 들어보면 자신처럼 다들 혼자서 꾸역꾸역 뭔가를 하고 있다. 한 층이 거의 비슷한 표정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풍경이 새삼 놀라워 중얼거린다. “나는 너희와 다 얘기해보고 싶다. 혼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니?”

그러는 당사자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서울 거주 30대 싱글 여성이다. 장마철 습한 공기를 머금은 바지통이 다리에 감기는 게 싫어서 반바지를 입었지만 책상물림 생활에 실해진 장딴지가 영 신경에 거슬린다. 젖은 머리 물기 탈탈 털어 고무줄로 짤막하게 동여매고 까만 안경테에 목에는 하얀 헤드셋을 걸치고 어깨에 멘 에코백에는 형광펜 그어진 영어교재가 한가득. 직장을 그만두고 ‘적금 깨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중이다. 같은 학급 20대 초반 학생들은 남다른 열공과 연륜 포스를 내뿜는 그녀를 ‘골드미스’로 인식하나 자신들과 죽이 잘 맞다보니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부른다. 눈치 없는 젊은 강사가 그녀를 ‘이모님’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듣는 사람 발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늦깎이 유학 준비생의 고군분투. 한국 사회의 30대 여성치고 흔치 않은 일상을 산다. 그녀는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나온 그 책은 ‘인면수심’ 친부의 성폭력 실상을 가감 없이 묘사해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고, 저자 은수연은 얼굴 없는 유명인이 되었다. 신문 및 TV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그림자 연극의 주인공처럼 실루엣 혹은 목소리만 드러났다. 그런 상황들이 성폭력 피해자는 어둡고 침울할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확인시켜주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체 밖에서 만난 은수연씨는 들장미 캔디처럼 표정이 다채롭고 말투도 활달하다.

눈에서 살기가 빠진 유학 준비생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웃음)”

그녀의 10대는 더욱 평범치도 평탄치도 않았다. 아빠에게 9년간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당한 아동 피해자로 살았다. 집을 뛰쳐나온 20대는 겹치기 출연 배우가 따로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는 성폭력 생존자로, 밖에서는 밝고 야무진 금순이 캐릭터로 오락가락 지냈다. 틈틈이 글을 썼고 30대 들어서 작가의 이름을 얻었다. 작가이거나 학생이거나, 일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산다. 어느새 평범과 비범을 자유로이 즐기는 생의 곡예사가 됐다. 주변에서 그녀의 변화를 느끼는 지점은 따로 있다.

“저를 20대부터 봐온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그때에 비하면 눈에서 살기가 빠졌다고요. 제가 봐도 대학생 때 증명사진을 보면 눈이, 완전 무서워요. 하하.”

눈빛이 달라지는 것만큼 확실한 ‘딴사람’의 징표가 있을까. 이제 그녀는 선한 반달눈을 하고 하얀 치열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고개 젖혀 자주 웃는다. 카페에 서식하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까지 호기심이 발동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졌다. 증오와 원한과 울분이 스르르 빠져나간 마음자리에 웃음과 수다, 공감 같은 것이 속속 들어차고 있다.

은수연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가족치료를 공부할 때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사례를 참조했다. 이 가족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희생양은 누구인지 분석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정리해 글로 썼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 떠다니던 게 말로 나오고 말을 글로 정리하면서 개념이 잡혀갔다. 이게 아니었구나, 이게 이거였구나. 논거를 찾지 못했던 감정이 정리돼가는 기쁨이 컸다. 또한 세상 밖에 나와서 지내보니 자신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이상했던 거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피해 사실을 숨기고 수치스러워했는데, 수치심을 오롯이 느껴야 하는 사람은 아빠였다. 성장기의 고통과 치욕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풀어갈 수 있게 되자 조금씩 홀가분해졌다. 공부의 효능을 안 이상 중단할 순 없다. 더 하기로 했다.

“여성학을 할지 사회복지를 할지, 아직 고민이에요. 네가 세상과 소통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니, 스스로 묻고 있어요. 나 자신을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한데, 내가 살아낸 삶에 대해서 그냥 악바리처럼 잘 살았어 이러는 게 아니고, 나의 감정 중에 뭐가 잘못됐는지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싶어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으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내 몸이 붙잡고 있는 기억이 있어요. 공부해서 생각을 일깨우고 싶어요.”

9년의 폭력, 10년의 기록

은수연의 책이 나온 건 2012년 8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그 다음달이었다. 매체의 영향력이 컸다. 특히 <한겨레> 9월16일치 ‘조국의 만남’ 코너에 지면을 통으로 할애한 은수연 인터뷰는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아마 월요일이었을 거예요. 기사가 나간 날 아침에 조국 교수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조회 수가 100만 건이 넘었다고, 이 정도면 1년에 손꼽는 대박이라고 하더라며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인터뷰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눈물은 딱 한 번 흘렸는데 그 장면이 공교롭게 기사화됐다. 은수연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화할 수 있었다. 집을 나온 뒤 가해자를 맞닥뜨린 적이 있는지 조국 교수가 물었을 때, 은수연은 아버지의 출소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해코지의 두려움에 떨다가 직접 교도소에 찾아간 기억을 떠올렸다. 면전에 대고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망가뜨리려고 해도 망가지지 않았고, 더럽히려고 해도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걸 말하려고 왔다.’ 조국 교수는 물었다. “그게 왜 책에서 빠졌죠?” 이 극적인 장면, 성폭력 피해자가 눈앞의 거대한 악이자 자기 안의 끔찍한 공포와 대결하고 발언하는 장면은 그대로 기사 제목이 되었다. “아버지의 성폭력에도 난 더럽혀지지 않았어요.”

은수연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4년 대학에 들어간 해, 집에서 탈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열림터에 갔다. 당시 최영애 소장이 책을 써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그냥 흘려들었다.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피해 경험이 글감이 된 전례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막 집을 나왔을 때라 너무 힘들고 정리도 안 돼 있고 무엇보다 피해 경험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네 잘못이 아니다’ 같은 말이 계속 내 안에서 쌓여갔다.” 도전 의식이 생겼다. 한번 정리해보자.

직장을 다니면서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겪은 일들을 써나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수기를 연재하면서 작업에 탄력이 붙었다. 글쓰기 전담 선생에게 글쓰기 묘사와 표현 등 개별지도를 받았다. ‘괴물 같은 사람이…’로 시작하면 안 되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 내러티브 원칙에 따라서 그 배경이나 표정, 말투, 심정을 되도록 상세히 묘사해라. 그 상황에 있는 피해자가 어떤 감정일지 읽는 사람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너무 몰입해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눈물의 방류 사태로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다. 그럼에도 독자와 마감이 있어 글을 쓸 수 있었다. 회원들이 소식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본다는 피드백이 왔다. 끔찍하지만 재미있다고 했다. 상담자들도 피해자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많이 배운다고 했다.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와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힘든 시기를 써야 할 때는 끔찍한 기억에 붙들렸다. 길게는 2년 정도 손을 못 댔다.

“수능 전날 호텔에 갇혀서 폭행당했던 장면을 쓸 때는 겁이 나서 글이 나아가지 않았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보았어요. 아, 나 지금 저 안에 있지 않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글을 썼어요.”

재판이 진행됐던 법원 앞에도 찾아갔다. 글 쓰다가 막히고 찝찝하고 내가 왜 여기에 계속 붙들려 있지 그런 느낌이 들면 혼자 여행 가듯이 기억의 현장을 찾아갔다. 그렇게 한 장면씩 마주하고 사유하다보니 20대 후반에 시작해서 30대 후반까지, 10년이 걸렸다. 피해 기간보다 더 긴 집필 기간을 보내고서야 자꾸만 삐져나오는 통곡 같은 기억을 가지런히 언어화할 수 있었다. 피로 쓰고 온몸으로 쓴 덕분일까. “글이 사진처럼 생생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무얼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고 시인 이성복은 말했다. 정말 그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내용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그것처럼 끔찍하나 책의 표지는 곱디고운 순백색이다. 이 책이 실제 은수연에게 숫눈길처럼 귀한 시간을 열어주었다.

2013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제29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은수연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쓴 공로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처음엔 ‘이 상을 왜 나에게 주지?’ 하는 마음에 당혹스러웠으나 이제부터라도 그 상에 부응하는 역사를 만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일에 기꺼이 행동하고 있다. 강의나 좌담회, 인터뷰 등에 응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전국에서 모인 성폭력 전담 판사 120명과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판사, 언론인, 가해자 전담 국선변호사, 의료인, 법조인 등과 얼굴을 맞댔다. 생존자가 직접 책을 내고 하는 강의는 처음이라고 했다. 은수연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여러분이 무얼 상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왠지 긴장된 공기로 팽팽하게 당겨진 강연장 분위기가 다소 헐거워졌다. 은수연은 교통사고 경험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갔다. 직장에서 출장을 다녀오다가 하루에 두 번이나 사고가 났다. 나는 가장 먼저 보험회사에 연락하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일을 처리했다. 운전자에게 ‘너 왜 이렇게 운전을 못하냐’ ‘하필 왜 그 시간에 이 터널로 갔느냐’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계신 판사님들은 법정에서 성폭력 사건을 특별하게 접근한다. ‘여자애가 왜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어?’ ‘치마 길이는 왜 짧지?’라는 식으로 묻는다. 성폭력 사건도 똑같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교통사고처럼 사건 자체로 봐달라.

경청과 공감의 박수가 나왔다. 당시 판사모임의 좌장 판사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교통사고 같은 사건사고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려줘 고맙다고 각별히 인사를 전했다.

지난해 전북 전주에서 북콘서트를 했을 땐 진땀을 흘렸다. 어떤 나이 든 남성이 질문을 한다더니, 아가씨가 너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 자기 합리화가 심한 거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성폭력 생존자 아이들도 와 있었다. 은수연은 꾹 참고 답변했다.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다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그러곤 관객을 향해 말했다. 생존자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상처받을 수 있는데 무시하고,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 합리화 많이 해주시라고. 겨우 행사를 끝냈지만 놀라고 속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엄청 울었다”. 얼마 전 양성평등원에서 직원 대상 강의를 할 때도 편견의 벽을 마주해야 했다. 한 중년 남성이 이런 교육인지 몰랐는데 얼굴이 빨개진다고 말한 것이다.

피해자다움과 피해자답지 않음 사이에서

“성폭력이란 얘기를 들으면 ‘폭력’보다 ‘성’과 관련된 걸로 받아들여요. 그런데 참가자들한테 매체에서 본 성폭력, 친한 사람이 겪은 성폭력, 자신의 성폭력 사례를 물어보면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거든요. 저는 말하죠. 내 얘기는 별로 할 거 없고, 얼마나 일상적으로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우리의 이야기로 풀어가자고.”

성폭력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로 감각한다는 건 무엇일까. 은수연은 막내올케의 반응을 들려주었다. 언니한테 어떤 일이 어느 정도 있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되게 많이 울었다며 말했단다. “근데 나는 언니가 참 존경스러워. 옛날에는 내 딸들이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일 당하지 말기를 바라는 맘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일을 겪어도 언니처럼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맘이 생겼어….”

한 몸에 쏟아져내린 험난한 인생사를 통과한 사람. 오직 생존이 목표였던 지옥에서의 9년. 그녀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통과했느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울면서 기도하는 게 취미였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너는 성격 때문에 산 거 같다”고 했다. 이 또한 사실이다. 은수연은 나쁘게 보려는 마음이 없고 일상을 반듯하게 살려는 자세가 있다. 강인한 면, 나약한 면, 새침한 면, 예민한 면, 호탕한 면, 그것들 모두 은수연이 기르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 속에서는 우울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만 그려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일상에서 반복되고 재생산된다. 영화 <여자, 정혜> <텔미 썸딩>이나 드라마 <보고 싶다> <야왕> 등에서 나타난 성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어릴 때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복수욕에 불타거나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 어른으로 나오는데, 그게 은수연은 못마땅하다. 성폭력 피해가 지독한 상처를 남기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그 시간, 그 감정에 꼼짝 못하고 멈춰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거다. 금방 씻기는 상처도 아니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도 아니다. 은수연도 경험적으로 알아갔다. 스무 살엔 ‘성폭력 피해자’라는, 만들어진 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벗어나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찾아가자마자 한 일이 정신과 검진이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내가 과연 정상일까’ 심리검사를 받고 전문가의 정상 판정에 안도했을 정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 그 유동하는 경계에서 오뚝이처럼 흔들리며 산다. 누구라도 그러하다면 은수연도 그러하다.

“자기를 다뤄간다고 할까요. 그게(고통이) 올라오면 또 느껴주고. (웃음) 인생의 목적이 상처를 치유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사는 거죠. 계속 따라오지만 병적인 반응을 하지 않게 된 거고요.”

더 이상 상처와의 동거가 불편하지도 일상을 방해하지도 않는 삶. 이걸 평범한 삶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이 평범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너무 많이 울었어요. 예전에는 대구지하철 참사나 서해 페리호 참사같이 큰 인명 피해 사건에도 아무 느낌이 없었거든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할 때 사이코드라마가 진행됐어요. 다른 사람이 힘든 얘기를 하면 다들 안타까워하는데 나는 사과를 씹어 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었대요. 누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내가 그러는 것도 몰랐어요. 왜 저런 걸로 힘들다고 난리야, 생각했겠죠. 내 아픔이 너무 크니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공부도 못했어요. 내가 온 국민과 하나가 된 것처럼 슬퍼하고 있더라고요.”

일상의 평범함, 오래 동경한 삶이다. 현모양처가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앞치마 두르고 간식을 차려주고 놀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었다. 해보지 못한 일이라 더 해보고 싶고 막상 해보면 “오글거려서 앞치마를 벗어던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범한 가정, 평화로운 일상을 소망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과 야참으로 라면 먹기도 꼭 해보고 싶은 일 중의 하나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자세와 능력도 이미 갖춰져 있다. 가사일을 좋아한다. 웬만하면 손빨래를 하고 물걸레질도 즐긴다. 햇살 좋은 날 이불을 널고, 밤이면 햇볕 냄새 든 이불을 덮을 때 더없이 만족스럽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하곤 하는데 “요샌 화가 안 나서 집이 무척 더럽다”며 또 깔깔 웃는다.

용서는 숙제가 아니다

“내 문제에 스스로 충분히 애도하고 다른 사람들도 애도해줘서 슬픔을 건넌 것 같아요. 나 인복 완전 넘치는데 집에서 부모복만 없어, 그러거든요. (웃음) 인생의 멘토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트라우마가 극복됐어요. 사실 사람에 대해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큰 상처가 없잖아요. 사람에 대한 상처를 사람으로 잘 극복한 것 같아요.”

은수연의 목에는 십자가 목걸이가 반짝인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에 추천사를 써준 인연으로 이금희 아나운서에게 받은 선물이다. (“촌스럽게” 이거 너무 자랑하고 싶으니 꼭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TV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실제 봐도 푸근하고 자상한 큰언니 같은 분이라며 자랑에 여념이 없다. 이처럼 은수연은 사람이 살면서 사람들한테 받아야 하는 것들, 부모가 무너뜨린 것들을 좋은 인연으로 채울 수 있었다.

“용서하려고 애쓰지 마라.” 친한 목사님의 말씀도 일상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용서가 의무나 숙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용서가 어느 순간에 되는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하는 거더라고요. 자신의 요구, 자기의 필요에서 나와야 해요. 누구를 미워할 때 나도 같이 썩어가는 것 같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자기를 위해서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어학 공부에 몰두하느라 ‘그 사람’이란 단어가 떠오를 시간이 없어요. 예전에는 같이 방구석에 있어도 두렵지 않은 존재이길 바랐는데 지금은 마음에 들여놓을 영역이 없는 거죠. 그 사람은 지금 저에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수연 개인도 변하고 사회적 통념도 변했다. 스무 살 때 처음 만난 상담교사는 성폭력과 가정폭력 사실을 말하자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꼭 잠그고 자라”고 충고했다. 그랬다간 가해자의 분노를 사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엔 친족 성폭력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녀조차 자신이 당한 일을 뭐라고 명명할지 몰랐다. 강간?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은 성폭력이란 단어를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니 변하긴 변한 거다. 성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 <도가니> <소원>도 흥행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는 지금까지 5쇄가 나갔다. 전례 없는 출판 불황과 소재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이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일단 성폭력이 사회 일반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은 분명하다고 그녀는 본다.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가 성폭력 피해 생존자에 대한 사회복지적 지원에 관한 것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놀랍게도” 그것들이 얼추 갖춰졌다. 기본적인 하드웨어가 바뀌었으니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일이 남았다. 생존자의 변화, 그리고 생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

“성폭력 피해 경험이 내 직업도 아니고 나를 특별하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얼굴을 안 보이고 싶어요. 꼭 성폭력이 아니어도 각자 자기 상처를 편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쟤, 그런 일 있었어’ 하면서 아래로 보거나 쑥덕거리지 않고 같이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은수연은 그날을 그려본다. 나의 기쁨과 세상의 필요가 만나는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필명보다 더 예쁜 본명으로, 어쩐지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선한 눈빛을 나누며 마주할 수 있기를. “얼굴을 돌리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는 독일 시인 넬리 작스의 시구처럼, 그렇게 은수연은 ‘얼굴을 돌리고’ 기다린다.

 

한겨레 <나들> 내 몸, 파르헤시아 7월호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