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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책편지 - 아침의 피아노 초여름 장마답게 그날은 종일 비가 내렸지. 창밖엔 밤비가 속살거린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밤, 나는 시인처럼 등불을 밝히지는 않고 어둠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어. 투명 이어폰을 낀 것처럼 뜻 없는 빗소리에 귀를 대고 가만히. 눈떠 보니 새벽 5시네. J도 깨어 있을까. 그대는 가끔 이 시간에 SNS에 짧은 글이나 밀린 사진을 올리곤 했지. ‘벌써 일어남?’ 문자를 보내면 ‘아직 안 잤다’거나 ‘22시간째 깨어 있다’ 했어. 원고 쓰느라 밤을 새우곤 하는 그대의 체력이 부러웠어. 한 줄도 쉽게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좋았지. 그대가 툭 말했어. 건강검진을 했는데 유방암 소견이 나왔다고. 나는 많이 놀랐네. 울지는 않았어. 책에 길들여진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책부터 찾지. 기쁠 때는 놀고 슬플 때는 읽지. 에 ..
은유의 책편지 - 소금꽃나무 ‘저는 그동안 마치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된 것처럼 타인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 인생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살았습니다. 불우하고 불행했던 어린시절 엄마에게 착한 딸이 되기 위해 애썼고, 가난을 벗어나고부터는 착한 사람, 유능한 교사를 연기하며 자신을 억눌렀습니다.’ 캐릭터 편지지에 쓴 손글씨가 반가웠습니다. 귀여운 형식에는 쓸쓸한, 그런데 단단한 씨앗 같은 직시의 말이 담겼고요. 속사정을 말해주어 고맙습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남이 보는 나에 ‘연연하는 삶’은 ‘연기하는 글’을 낳곤 하죠. 그런 글엔 직업이나 가족관계 같은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어요. 퍼즐 한조각 빠진 것처럼요. 그건 글쓴이가 실수로 빠뜨린 게 아니라 일부러 넣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요.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은유의 연결-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용접공, 이라고 쓰지 않고 영어로 ‘웰더’(welder)라고 야학 입학원서에 썼다. 그건 매일 잔업에 시달리고 얼굴에 불꽃 상처가 만발한 삶의 실상을 가려주는 도금 같은 말이었다. 생이 누추해도 폼은 나야 했던 스물하나. 어서 돈을 벌어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위해 간 야학인데 을 만났다. 조선소 현장직 5천명 중 유일한 비혼 여성이었던 ‘진숙이’에게 대놓고 음담패설을 일삼던 아저씨들이 어느 날부터 수군거렸다. “야야, 저기 근로기준법 간다.” 김진숙은 1986년 2월18일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옳은 일을 한다는 기분과 진급하는 느낌으로 시작한 노조활동은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을 돌렸다가 얼굴에 보자기 덮어쓰인 채 대공..
2020.8.27 -예정대로라면 내일 북토크 하러 제주에 가야했다. 너무 예쁜 서점 책자국. 망설이다가 아침에 연기했다. 제주 김포 왕복 티켓 취소하고, 이런저런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하기로 한 9월 강연 일정 변경-연기-취소 메일 답하고. 다이어리에 흑연 자국이 많이 남았다. 쓰고 지우고.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마음이 얼룩진다. -집에 있으니 도통 일의 능률이 안 올라서 스타벅스에 혹시나 하고 갔다. 넓은 매장에 대여섯명이 마스크로 입틀막 하고 공부하고 있다. 환기가 잘 되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사유의 밀도가 빽빽한 책 보고 왔다. 스벅에선 왜 집중이 잘 될까. 대중목욕탕에서 각자의 때를 미는 사람들처럼 열중한다. 다들. -이년전 열림터에서 수업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다른 피해자들이랑 글써서 책 내는 텀블벅..
언프리랜서 생존기 유채꽃 사진이 sns에 올라올 무렵 제주에 갔다. 출발 전까지 원고를 마감하려고 했으나 끝내지 못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면, 잠이 안 오면, 설마 바다를 보는 일이 지루해지면 ‘한 줄’이라도 쓸까 싶어 노트북을 챙겼다. 안 읽을 것을 알면서도 기필코 시집 한 권 끼워 넣듯, 안 쓸 것이 확실하지만 뺄 수도 없다. 노트북은 여행자 보험처럼 사용 확률과는 상관없이 ‘있음’만으로도 심신 안정에 기여한다. 일박 이일 동안 가방에서 곤히 자던 그것을 공항 검색대에서 주섬주섬 꺼낼 땐 혼자 머쓱했다. ‘에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겁긴 또 왜 그리 무거운지. 이 딜레마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닌 듯하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친구랑 식사를 했다. 그가 메고 나온 검은 쇼퍼 백 안에 납작한 쇳덩이가 얼핏 보인다. ..
올드걸의 시집 - 복간본 다시 살아난 '올드걸의 시집' 절판 5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이 블로그에 2008년 11월에 첫 글을 쓰게 됐을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일어났다. 그게 삶이겠지.
그녀의 말, 그녀의 노래 새벽에 메일이 도착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 어렸을 때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한 경험을 글로 썼는데 수업할 때 읽을 용기가 나질 않아 잠을 설치다가 쓴다고 했다. ‘망설임’이란 단어의 반복에서 20년간 키운 마음의 소란이 느껴졌다. 가해자가 가족이고, 가족인데 가해자다. 피해 자체보다 그 피해를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 괴로웠다는 그는 그동안 말하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지인에게도 편지가 왔다. 5년 전 애인에게 감시, 폭행을 당한 그는 지난해부터 상담을 시작했고 데이트폭력 피해를 기록하는 책을 준비한다며 조언을 구했다. 보복이 두려워 헤어지지 못하다가 목숨을 건 이별 단행 후 직장을 그만두고 숨어 지냈다고 했다. ..
육아 말년의 소회 강의 시작 직전,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둘째 담임샘’이라고 뜬 액정을 보니 가슴이 덜컹. 사고가 났나 싶어 전화를 받았다. 담임은 아이의 급식비가 넉 달 치 밀렸으니 입금해달라고 한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학교 연계 계좌에 돈을 넣어둬야 하는데 그 사실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납금을 재차 확인하고는 담임샘과의 첫 통화를 마쳤다. 다행히 열명 남짓한 소규모 강의였다. 양해를 구하고 바로 계좌이체 후 담임에게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시계를 보니 7분 경과, 학부형에서 강사 모드로 돌아와 수업을 끝냈다. 나야 ‘돈’보다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지만 통장에 30만원이 없었으면 얼마나 난처했을까. 불쑥 지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