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의 유혹

[은유칼럼]

‘너희들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다 같은 말을 삼가 주세요.’ 얼마 전 청소년 대상 강의를 앞두고 몇 가지 당부가 적힌 메일이 왔다. 강사들에게 귀띔할 정도면 이런 일이 잦나 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전적이 있다.

한 강연에서 그간 청소년을 만나면서 편견이 깨졌노라 고백하다가 그 문제적 발언, ‘청소년들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는 걸 지적받고 알았다. 한 청소년이 말했다. “만약에 은유 작가님께 누가 ‘여자가 이런 글도 쓰고 대단하다’는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무안함에 ‘땀뻘뻘’ 상태가 된 나는 다른 섬세한 표현을 찾아보겠다며 사과했다. 며칠간 그 쓴소리가 웽웽거려 혼자 얼굴 붉어졌다. 맞는 말인데 ‘좀만 살살 말해주지’ 싶은 서운함이 들었지만, 청소년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은근히 하대한 내 무지를 깨우쳐준 은덕을 입어 놓고 다정함까지 바라는 건 염치없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나 기성세대인가. 자동으로 늘어나는 뱃살처럼 안정과 나태에서 오는 ‘정신의 군살’이 한번씩 만져질 때마다 당혹스럽다. 편견을 깬다면서 편견을 쌓아가고 있었음이 들통났다. 어른은 성숙, 아이는 미숙 같은 이분법의 잣대로 충고하거나 칭찬하는 권력을 스스로 부여하기도 한다. 이게 단지 나이 탓일까.

한 여자 선배는 동일범죄 동일처벌의 기치를 내건 젊은 여성들의 ‘혜화역 시위’를 두고 과격하다며 도리질 쳤다. 자기 같은 여자들도 아우르려면 개방적이고 온건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순간 선배가 기성세대로 보였다. 그건 남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허락하는 ‘오빠 페미니즘’ 입장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절실함 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떤 대단한 혁명세력에게도 어려운 미션이다.

유명한 시구대로 늙은 의사가 젊은이의 병을 모르듯이,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여성들의 ‘불법촬영’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체감하지 못할 테니까 노력은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일전에 혜화역 시위 참가자에게 들었다. 4시간 넘는 집회에서 1~2분도 안 되는 시간에 흘러나온 혐오성 구호만 자극적 이슈로 남았다며, 혐오 발언이 옳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는가 들어달라고, “말투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일침을 선배에게도 전했다.

요즘은 여성주의 이슈가 복잡다단하다. 외국어 배우듯 줄임말과 신조어를 익혀가며 간신히 쟁점을 따라가지만 벅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지난 토요일엔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관하는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피해자다움 강요 말고 가해자나 처벌하라” 구호를 외치며 생생한 현장의 언어를 수혈받고 돌아와 기사를 검색하니 댓글은 딴 세상이다.

‘여성단체는 왜 장자연은 가만히 있고 김지은만 떠드느냐’는 댓글이 최다 추천에 올랐다. 이는 한국 사람이 굶어죽는데 왜 해외 난민을 돕느냐는 말처럼 익숙한 구도다.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구체적 대상을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성단체 호통칠 시간에 과거 뉴스를 조금만 찾아봐도 안다. 미투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장자연 사건이 9년 만에 재수사에 착수했고 미투는 여성(단체)의 오랜 분투와 역사 속 김지은들의 목소리로 일궈낸 거센 물결임을. 김지은과 장자연은 대립항이 아니라 공의존 관계다.

기성의 관념에 갇히는 건 게으름 탓 같다. 특히 이분법은 사유의 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선입관이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고레에다 히로카즈)은 세상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 누리는 복락이다.

은유 읽다 - 나의 두 사람

[은유칼럼]

출산을 앞둔 후배에게 선물을 하려고 신생아 용품 매장에 갔다. 손바닥만 한 턱받이부터 팔뚝만 한 배내옷까지 크기가 앙증맞고, 순백색부터 복숭아 색까지 색감마저 보드라워 넋을 잃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만치에서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나 혼자 가란 말이야? 평생 한 번인데 하루도 못 빼? (…) 오빠 회사 사람만 그렇겠지. 내 주변엔 교육 안 듣는 사람 없어.” 

만삭의 임신부였다. 아마도 예비 부모 출산교육 프로그램에 남편과 함께 가려는 계획이 어그러진 모양이다.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감각이 달라서 남편이 남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무언가에 깊이 절망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하는 그이와 아이를 낳아 많이 절망하고, 청춘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어떤책 제공 김달님씨의 대학 졸업식 사진.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날 처음으로 학사모를 써봤다.

첫아이는 예쁘고 두려운 낯선 생명체다. 꼬물꼬물한 발가락에도 수시로 벅찼지만 작은 충격에도 아이가 소멸할까 봐 무서웠던 나는 남편 출근길에 차를 얻어 타고 친정에서 지내다가 오곤 했다. 돌 이후에는 동네의 또래 엄마들에게 주로 의지했다. 같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문화센터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육아는 살림하는 내 몫으로 받아들였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유치원 재롱잔치나 참관수업, 입학식이나 졸업식처럼 꼭 함께했으면 하는 자리에 남편이 부재할 땐, 저 만삭의 여인처럼 복받쳐서 따졌다. 서러워 눈물지었다. 

한 아이가 자라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든, 조부모든, 이웃들이든. 아무도 없으면 자기를 둘로 나누어야 한다. 아이를 돌보는 나와, 그런 나를 다독이는 나. <나의 두 사람>을 쓴 김달님에게 두 사람은 할머니, 할아버지다. 사회적 용어로 ‘조손가정’인 셈인데 조부모 품에서 자란 그 아이가 “나는 행복과 불행을 고루 느껴본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 있었다”라며 그 고마움을 책으로 기록했다. 

“내가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내 늙은 부모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50의 나이에 다시 시작된 부모의 삶. 두 시간마다 깨는 갓난아기를 제 품에서 키우는 수고로움. 한 아이를 먹고 입히기 위해 되풀이된 돈벌이의 고됨(6쪽).”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돼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지음, 어떤책 펴냄

나도 부모에 의해 그렇게 자랐겠고 또 부모가 되어 어떻게 키워냈다. 사람답게,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우리는 얼마나 버둥대는가. 그래서 부부가 손잡고 오는 출산교육에 저 홀로 가야 하는 여자는 울컥한다. 비슷한 이유로 친구들의 ‘젊은 부모’가 모여드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달님이는 초조하다. ‘늙은 부모’인 할머니가 오는 것도 싫고, 오지 않는 것도 싫어 심장이 빨리 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저자는 “열세 살의 초조한 나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족의 풍경을 가지고 산다고. 너 역시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103쪽).” 

할아버지는 세상을 비추는 사람이 되라며 저자에게 ‘달님’이란 이름을 주었다. 달님은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훌쩍이는 예비 엄마에게, 곧 태어날 아이에게, 그리고 엄마의 부재로 기죽은 아이에게 나직이 말을 건넨다. “화목한 가정이란 누구나 기대하는 실체 없는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6쪽)”라고. 앞서 말한 대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 성에 안 차고 서러웠더라도 당신이 크는 동안 “많은 것을 무릅쓰고 온 한 사람이 항상 네 옆에 있었”음을 기억하라고.


*시사인 은유 읽다



고통의 출구를 찾는 방법

[은유칼럼]

강원도 한 고등학교에 초대받았다. 학생들이 6월에 ‘평화’를 주제로 독서 토론을 하는데 내가 쓴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인터뷰집 <폭력과 존엄 사이>를 읽는다며 저자와의 만남을 준비한 것이다. 강연을 앞두고 담당 교사가 ‘아이들이 작가님께 드리는 질문지’를 미리 보내주었다.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억울하게 잡힌 분들의 주소는 어떻게 알았나요?’ 이토록 엉뚱한 질문이라니, 과연 아이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핵심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소는 개인의 사회적 좌표다. 그 학생은 폭력 상황에 처한 한 사람이 어떻게 공적 발언의 장을 확보해 ‘나 여기 있음’ ‘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는지, 그 절차와 경로의 시작점을 묻고 있었다. 그건 국가폭력 피해자 인터뷰집의 기획 의도와도 닿아 있다. 고통의 출구를 찾는 법은 삶의 필수 기술이니까. 

ⓒ시사IN 조남진

나는 아이들을 만나 답변했다. 간첩 누명을 쓴 분들이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진실 밝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겼을 때 진상 규명을 신청했다고.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같은 단체에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그분들이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남긴 기록과 인연의 고리를 연결해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며칠 후 나는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었다. 이주여성들이 직접 쓴 폭력 피해 증언집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다. 아니, 피해 대상만 다를 뿐 익히 ‘알았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간 내가 만난 선주민(한국인) 여성들의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 사례와 내용이 일치해 오싹했을 정도다. 특히 캄보디아에서 온 쏙카의 경험은 가정폭력을 넘어 “인신매매와 강제노동”에 가까운데, 그 지옥을 그는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쏙카에게는 쏙카를 위해 통역을 해주고 시어머니를 설득시켜준 사촌언니와 동서가 있었다. 통장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폭력 신고를 도와준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었고, 집에서 나왔을 때 쉼터로 연결해준 경찰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도록 도와주는 쉼터가 있다. 고립되어 있는 쏙카를 살려준 것은 세상과의 연결이었다(35쪽).”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한 말

한국이주여성인권 센터 지음, 오월의봄 펴냄

당사자 증언에 대해 전문가가 쓴 해설이다. “고립은 피해자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확보하는 과정으로서 가정폭력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31쪽)”라고 한다. 어디 가정폭력뿐일까.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의 경우도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으로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그래서 ‘세상과의 연결’, 즉 내 존재를 남이 알게 하는 것이 피해자에게는 상황을 돌파하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아울러 피해자는 어떤 일시적 상태의 명명이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가 그분들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에 맞서 어떻게 존엄을 지키고 살아갔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처럼, 이주여성들의 생존담도 꼭 그러하다. “피해자의 취약성보다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문제 해결을 위해 참여하는 이들의 행위성을 강조한다(187쪽).” 

사실 그날 강연에서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 여러분도 폭력을 당하면 꼭 도움을 주는 기관이나 단체를 찾아가라고.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지만,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잘한 거 같다.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 중요하니까. 


* 시사인 은유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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