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말 한마디

[은유칼럼]

2014년 4월17일,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날 영화 <한공주>가 개봉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우 천우희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한 여중생이 남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 일상을 보여주는 사물은 트렁크다. 딱 그만큼이 피해자에게 허락된 삶의 지분 같았다. 가해자는 지붕 있는 집에서 발 뻗고 잠들고 피해자는 짐 가방 끌고 떠다니는 현실.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한공주는 입을 연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조용한 되물음. 여성주의 논리나 주장이 아닌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한 저 발언. 항변이라 하기엔 담담한 발화가 화살처럼 박혔다. 잘못 없는 사람이 되레 질긴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그 말의 결과 힘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공주>는 내게 좋은 영화로 남아 있다.

영화 <한공주>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현실은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나는 2013년부터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거의 매일 매스컴에서 접하는 기사들, ‘인면수심’이라는 타이틀로 소비되는 성폭력 사건을 당사자가 피해자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함께한다. 처음엔 한 사람을 성적 도구화하는 가해자의 폭력에 분노했지만 점차 피해자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한 피해자는 성폭력상담소에 왔던 날을 복기했다. 상담 선생님이 너는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자신은 감히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한 대도 맞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단지 나를 위로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며 글을 이어나간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 저 부분을 거듭 읽었다. 꿈의 실현을 믿지 않았던 피해자는 지금은 꿈대로 맞지 않고 살고 있다. 한 존재를 피해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삶 전반을 이해하려는 상담사의 사려 깊은 물음, 에두르지 않는 정직한 대답까지, 피해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더는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 경험해도 아프고 벅차다.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기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이마 펴냄

이 말하기의 중요성을 독일의 철학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에서 강조한다. “여성의 역할이라는 족쇄(155쪽)”,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왜곡된 성 고정관념이 남성에게 어떤 권력을 주고 여성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분석하며, 자기 삶의 권력을 찾기 위해선 말하고 행동하라고 독려한다. “선뜻 용기가 안 난다고? 당신이 말과 기호로 이 세상에 참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똑똑히 보라(100쪽).”

최근 논란이 된 안경환의 <남자란 무엇인가>는 보여주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최종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이 사내의 생리다. 거부되면 불안은 분노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수동적인 것이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한 루소부터 폭력 등을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로 규정하는 한국의 법학자까지, 남성 엘리트의 말하기는 일관되고 공고했다. 그것은 수많은 한공주를, 강간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딸들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사망자를 낳는 데 일조했다. 폭력은 ‘사내들의 생리’가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의 허용에 따른 ‘권력 행동’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하기에서 나아가 분노하기까지 행동 권력의 탈취를 권한다. 물론 “분노하는 남성은 불안을 조장하지만 분노하는 여성은 우습다(127쪽)”는 현실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는 것밖에 방도가 없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에요” 같은 말들이 당장은 우습고 나약할 테지만 거기엔 당연한 것을 뒤집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 말하기에 실패해도 “우리의 실존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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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키우기에서 고양이 되기로

[은유칼럼]



수레 집에 혼자 있겠구나. 밖에서 전화하면 딸아이는 정정한다. 아니, 무지랑 둘이 있어. 아, 그렇지 무지가 있었지. 자꾸 까먹는다. 무지는 우리집 고양이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서 나는 아이 혼자 있다고 여기고, 고양이를 자신과 동등한 개체로 여기는 딸아이는 둘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기가 이토록 어렵다. 

3년 전, 딸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품고 있는 장면이 ‘명화’ 같았다. 친구의 지인 새끼 고양이들인데 다 입양이 결정됐고 한 마리만 남았다며 우리가 키우자고 했다. 말로 졸랐으면 단박에 거절했을 텐데 사진을 보곤 홀렸다. 나는 고양이 입양 불가 의견을 빈대떡 뒤집듯 뒤집었다. “그럼 데려오든가.”

흰색·밤색·검은색 털이 멋스러운 삼색이가 식탁 아래 오도카니 몸을 말고 있었다. 딸아이는 고양이를 신발주머니에 넣어 운반했다고 한다. 도보로 20분 거리다. 가만히 있었느냐고 물으니 계속 야옹야옹 거렸단다. 그 장면을 그려보았다. 열세 살 여자아이와 생후 3개월짜리 고양이의 동행. 어미 품을 벗어난 어린 생명체의 두려움과, 다른 생명체를 품은 어린이의 책임감이 둘을 단단히 묶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사IN 윤소영
두 존재의 교감에는 ‘종’의 동일성보다 ‘곁’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고양이 이름은 무지로 지었다. 내 삶의 모토인 ‘네 무지를 알라’는 의미의 무지. 무지 귀엽다는 뜻의 부사 무지. 딸아이는 인터넷으로 육묘 노하우를 빠르게 학습하고는 전문용어로 고양이의 행동을 해설했다. 저건 식빵 자세, 닭 자세, 꾹꾹이, 그루밍…. 그리고 병든 노모 돌보듯 조석으로 사료와 물을 챙겼다. 무지랑 놀기가 중요 일과로 자리 잡았다. 둘은 좁은 거실을 톰과 제리처럼 가로지르며 뛰었다. 


나도 놀고 싶었다. 낚싯대 장난감을 들고 유인해봤는데 무지가 시큰둥했다. 왜 엄마에겐 반응이 없냐고 물었더니 수레가 말한다. “엄마, 고양이 관점에서 생각해야지. 몸을 그렇게 뻣뻣이 세우고 있으면 오겠어.” 

그러고 보니 난 항상 무지를 아기처럼 번쩍 들어올렸다. 내 눈높이로 끌어올리면 고양이는 1초 만에 빠져나가곤 했다. 수레는 늘 엎드려서 네 발로 무지랑 눈을 맞추었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되기”인가. 자신의 고정된 위치를 버리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기. 한 사람의 놀이 능력은 곧 교감 능력이자 변신 능력이고 사랑 능력이나 다름없었다. 

“고양이랑 결혼하고 싶어”

고양이는 만져지는 자연이다. 무지는 명당자리를 용케도 발견한다. 외출에서 돌아와 겉옷을 벗자마자 손 씻고 오면 그새 외투 위에 여왕처럼 앉아 있다. 목도리, 스카프부터 쇼핑백, 책까지 폭신하든 단단하든 보드랍든 뭐든 한 겹 깔고 본다. 커튼 사이로 한줌 볕이 들면 그곳이 아무리 손바닥만 할지라도 몸집의 표면적을 최대화해 누린다. 볕을 모은다. 무지를 보면서 알았다. 내가 고양이를 싫어한 게 아니라 고양이 키우는 걸 싫어했구나.


버지니아 울프가 쓴 <플러쉬>라는 소설에서 난 수레와 무지를 떠올렸다. 주인공이 코커스패니얼 견공 플러쉬와 여주인 바렛이다. 냄새와 행동으로 세상을 감각하는 플러쉬와 언어 생활자 바렛은 “넘을 수 없는 차원의 장벽(36쪽)”을 느끼지만 반려 관계가 되어 “각자에게서 휴면상태인 것으로 서로를 완성시켜준다(189쪽)”. 플러쉬는 여주인의 침대 발치에 자리를 잡는데 무지가 밤마다 수레의 발치에서 잠드는 것 같았다. 두 존재의 교감에는 ‘종’의 동일성보다 ‘곁’의 연속성이 중요함을 책과 현실이 증명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린 시절부터 개를 키웠다. 평생 개의 행동과 습성, 감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플러쉬>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쓴 게 아니라 개가 되고픈 사람이 쓴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고양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딸아이 수레의 말도 헛웃음으로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시사인 은유 읽다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9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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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것들'이라는 자각

[은유칼럼]

간첩조작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하러 제주도에 갔을 때다. 30여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자칭 ‘전직 간첩’ 어르신들과 같이 승합차에 타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쪽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당신 사정을 말한다. “오늘은 안 돼. 육지 사람들이 왔거든.” 그 말을 듣자 육지에서 온 객들이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은 왜 웃느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덩달아 웃었다.


육지 사람이란 합성어가 생소했다. 그리 호명되는 것도 첫 경험이다. 섬을 척도로 내 정체성은 육지 사람이 맞다. 일상에선 육지생활자가 기본값이니 섬 사람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살았던 거다. 여자는 여성 장관이고 남자가 장관이듯 말이다. 이 육지 사람 에피소드를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말했더니 조용히 부연한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육지 것들’이라고 부른다고.


‘군’ 소재지 강연을 얼마 전 처음 갔다. 충남 부여군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특강에서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작가님이 서울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활동하고 있는데 만약 여기에 살았어도 그게 가능했을까요.” 낮고 느린 목소리, 수줍은 말투의 그녀가 어쩐지 울까 봐 나는 조마조마했고 급소를 찔린 듯 안절부절못했다. 원망도 질책도 애원도 없는 그 투명한 물음에는 지역에 깃든 청년의 실존적인 고민이 담겨 있었다.


서울 아닌 지역에서 오는 강의 제안 메일은 더 길다. ‘지방이라 오시라고 청하기 면구스럽습니다’ ‘교통편이 좋아졌는데도 죄송스럽네요’ 같은 문장들이 덧달렸다. 죄 없이 죄송해야 하는 지역의 언어에 나는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서울 사는 게 벼슬처럼 되어버린 현실에서 별다른 불편이 없으니 자각도 없었다. 서울 사람으로서 누리는 줄도 모르고 누리는 것들을 부여 학생의 물음이 일깨웠다.


나는 대답했다. 배산임수한 가옥에 사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고 한 평 고시원에 사는 사람에게 나오는 글이 있으니 그나마 글쓰기는 삶에 공평한 거 같다고. 물론 영화, 전시, 강연, 시설, 사람이 서울에 몰려 있고 혜택을 받는다. 그러나 서울은 기회의 땅이기에 욕망을 생산하는 공장이고 결핍을 가르치는 학교다. 좋아 뵈는 온갖 것을 좇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놓친다. 나는 ‘서울’에서 공부와 일에 몰두하던 시기에 나를 가장 많이 부정했다. 기혼, 출산, 고졸, 여자라는 콘크리트처럼 견고한 존재 조건이 숨 막혀 한숨지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음이 터져나올 때마다 글을 썼다고 고백했다.


간첩조작사건 피해자 어르신도 청년 시절엔 섬이 갑갑했다. 제주의 명문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 유학’을 몹시도 꿈꾸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했고 돈 벌러 일본을 드나들다가 결국 간첩 누명까지 썼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그의 무죄를 증명한 건 어린 시절부터 그를 보아온 동창과 이웃인 제주 사람들이었다. 팔순의 길목에서 생의 한 주기를 돌아보는 그는 서울 간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며 벗이 있는 고향에서 죽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했다. 그 말씀에서 배웠다. 잘 산다는 건 내 일상을 오래 묵묵히 지켜본 사람을 갖는 거구나.


청춘의 몸은 질문을 낳는다. 1960년에 제주 청년이 그랬듯이 2017년에 부여 청년이 뒤척인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그나마 막막한 질문만이 숨길을 열어주고 살길로 인도한다. 근래 육지 것이자 서울 것으로 정체성을 받아안은 나는 질문의 말풍선 하나 띄운다. 육지-서울이라는 다수, 주류, 중심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9134.html?_fr=mt5#csidx8b421edfbc53165b18879532c8aba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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