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나와 친해지는 일

[은유칼럼]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20대 여성이 써온 글의 제목이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랐다. 집은 늘 서늘했다. 친구의 엄마들처럼 집안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입시 전형에 같이 머리 맞대주길 바랐기에, 그렇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다. 우연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를 읽었고 엄마의 입장과 처지에서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됐다. 엄마도 아빠처럼 직장에 다녔는데 집안일, 자식 돌보는 일을 ‘의심 없이’ 엄마의 몫으로 여긴 자신을 반성하는 내용이었다.

 

각각 등장인물의 입장이 잘 드러난 좋은 글이었다. 딸이 느꼈을 서운함도, 엄마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도,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위치도 이해가 갔다. 악인은 없지만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눈 돌리게 된다. 그 글은 엄마의 노동이, 자식이 성인이 되도록 모를 만큼 공적으로 논의되지 못했음을 상기시켰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자기 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수업 마지막 날 내게 손편지를 건넸다.

 

“지금까지 제 글이 이상하고 못났던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어요. 필사를 하지 않아서, 단어를 많이 몰라서, 독서량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더라고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였어요. 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고독과 외로움이 괴로워서. 그럴 때 늘 찾았던 친구들, 드라마, 영화, 책이 문제였어요. 나 자신과 생각보다 서먹한 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귀한 깨우침이 담긴 고백이다. 나는 수업과 강연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 아니 자기-삶을 진득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래 본 적이 없어서인 것 같다. 한국에서 입시제도 위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에게 글쓰기란 남에게 평가받는 일이다. 출제자 의도에 부합하는 표준화된 ‘답’을 찾다 보니 자기로부터 멀어지고 남의 사고에 집중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게 된다.

 

“어떻게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까?’ 하는 것만 신경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과 어떻게 맞닥뜨릴까,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어떻게 발견할까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21쪽)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에서 사람들이 글을 쓰는 동기 자체가 망가져 있다고 진단한다.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모양이다. 자기 경험과 감정은 뒷전이고 더 많은 지식, 더 인상 깊은 표현만 찾아 전전하니까 글쓰기는 점점 억지스럽고 고역스러운 일이 된다. 오죽하면 자기소개서의 줄임말인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할까 싶다. 그러나 글쓰기는 창작이나 발명이라기보다 발견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48쪽)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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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기”(32쪽) 그래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 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 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 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311쪽)진다.

 

일전에 어느 강연에서 한 여성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혹시 엄마로서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거다. 애들이 커가는데 워킹맘으로서 고민이 크다고 했다. 육아에 정답은 없다는 전제하에, 나는 그냥 내 경험을 들려주었다. 딱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 챙겼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당시 나의 경제적, 시간적, 정신적 상황에 해당하는 거라고 못 박았다.

 

그 질문한 여성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난 생각했다. 얼마나 멋진 문제 설정인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정리한다는 건. 이 세상에는 온통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해줘라. 좋은 엄마라면 명심하라는 소위 전문가의 목소리가 공기처럼 떠다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처지를 감안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육아 지침은 그 자체로는 온당한 말이지만, 엄마가 왜 아이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윤리적인 지침이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누구보다 육아서에 의지했고 도움을 받은 면도 있지만 읽을수록 위축됐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은 고고하고 현실은 남루하니 부족한 엄마라는 자책이 들었다. 외려 육아서를 덮고 엄마 노릇에 대해 정리하고, 좋은 엄마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부터 아이에게 화를 덜 내고 더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뭐 대단한 깨침을 얻어서는 아니다. 글을 쓰는 동안은 자신에게 집중하니까 자동으로 아이에게 무심해질 수 있었던 것뿐이다.

 

‘나는 왜 엄마만 미워했을까’ 글을 쓰는 딸이 어딘가에 있고, 다른 한쪽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만의 육아법을 설계하는 엄마가 있다. 저마다 속상하고 답답할 때마다 한줄 한줄 길어 올린 글쓰기로 자기 언어를 만들어가는 풍경을 그려본다. 그럴 때 존재를 옥죄는 말들이 “인정과 도리에 맞는 언어”로 교체되고 세상이 좀 더 살만해질 거란 믿음이 내겐 있다. “그것은 채점자 앞에 제출한 ‘답안’이 아니라 될수록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303쪽)일 것이다.

 


그동안 ‘은유의 다가오는 것들’을 사랑해주신 <채널예스>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일하지 않을 권리

[은유칼럼]

자유기고가 시절 ‘프리랜서’라는 명함을 파서 일했다. 있어 보인다고 남들은 말했고 나는 비정규직도 아니고 무정규직이라고 둘러댔는데, 이번에 정식 용어를 찾았다. 호출형 노동계약. “노동시간을 미리 정해두지 않고, 필요할 때 ‘호출’하면 달려가야 하는 노동 형태. 고용주는 노동시간을 보장할 의무가 없으며, 노동자는 실제 노동한 시간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는다(59쪽).”

호출형 노동자는 시간 관리가 생명이다. ‘시간은 돈’이므로, 돈이 되는 시간 창출을 위해 주도적으로 머리를 싸매야 한다. 나는 취재를 위한 왕복 시간, 원고 집필 시간을 측정해 일을 수주받았고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행했다. 마감 기계로 일하다 보니 나를 호출하는 곳이 불어났고 그럴수록 내 속도에 발맞추지 않는 동료를 견디지 못했다.

프리랜서 생활 5년. 나는 “정확성, 효율성, 생산성을 모토로 삼(43쪽)”는 시간 노예가 되었다. 그 사실을 몰랐고 힘들지도 않았다. 자기 착취의 습성이 몸에 배어 ‘쪼는 사람’ 없어도 스스로 일하는 근면함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 부지런한 노동자 성향, 즉 강박적 시간관념에 충돌이 일어났다. ‘게으름뱅이들’을 만난 것이다.

글쓰기 수업에는 반장이 있다. 매주 수업을 마치면 다음 주 교재와 과제를 알리는 공지를 올린다. 반장은 자원자가 맡는다. 나는 늘 신신당부한다. 결석한 학인들을 위해 가급적 이틀 안에 올려달라고. 그런데 공지를 제때 안 올리는 반장들이 생겨났다. 주로 20~30대로, 유급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진선미를 추구하며 산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한마디로 문화 백수들이다. 한 친구는 내가 문자로 두어 번 얘기했더니 “직장 상사 같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뭐 때문에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안달인가.

최강 게으름뱅이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반장이다. 마음은 반장을 자원했지만 타의 모범이길 거부했다. 수업에 매번 지각이었다. 처음엔 10분, 그다음엔 20분, 30분…. 심지어 수업이 끝난 다음에 온 적도 있다. 과제도 내킬 때 제출하고 공지도 시간 날 때 올린다. 하지만 마음이 올리는 공지는 자신이 일주일간 즐긴 음악이나 영화, 책에 관한 얘기와 정보가 넘친다. 좀 늦긴 해도 영혼의 양식이 담긴 공지에 학인들은 감동했다. 예전 같으면 ‘느려터짐’에 속 터졌을 나도 점점 빠져들었다. 마음에게 고백했다. “그대 같은 시(詩)적인 반장은 처음이야.”

할 수 있는 한 피해를 덜 끼치는 일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동녘 펴냄

마음은 대학 때 학보사에서 일했고 이런저런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조직 생활이 맞지 않아 나왔단다. “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훼손되는 거 같았어요” 라고 한다. 기성세대에겐 ‘허투루 사는 것처럼 보이는’ 젊은이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나는 묻지 않았다. 직장 다니는 이들에게 “지루함, 얽매임, 소진되는 느낌(11쪽)”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불쑥 질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대부분 일을 거부하는 동기는 자기 보호다. “이런 사례를 유별나거나 일탈적이라 치부하기보다는, 일을 재평가하고 단축하는 데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163쪽)” 바라보려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은 캠페인이 아니라 “시간을 둘러싼 정치”라고 푸리에도 말했다. 시곗바늘 같은 엄격함으로 소득, 권리, 소속감을 오직 일에서만 추구해온 나는 조금 두렵고 한편 즐겁다.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에 ‘할 수 있는 한 피해를 덜 끼치는 거요’(267쪽)”라고 답하는 상상은 얼마나 통쾌한가. 

참, <일하지 않을 권리>는 마음이 뽑은 2018년 올해의 책이다.


감응의 글쓰기 12기

[글쓰기의 최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