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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연결 -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 그냥,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학창 시절 무슨 대회에 나가면 상을 곧잘 받았다. 화가가 되려고 서양화과에 갔다. 졸업전시회에 찾아온 출판사 편집자의 권유로 그림책에 삽화를 그렸다. 한참 일하던 이십대 후반에 난소암에 걸렸는데 투병기로 그냥 한번 그려본 만화 (2012)이 데뷔작이 되었다. 필명은 수신지. 별 뜻 없이 본명을 조합한 이름이다. 그냥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는 여자의 핸드백도 들어주던 남자가 결혼하면 여자가 부엌에서 혼자 일하는데도 어째서 무신경한지. 왜 명절엔 남자 집에 먼저 가는지. 은근히 서럽고 말하면 치사해 ‘먼지 차별’로 불리는 일들로 (2017)라는 만화를 그려서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에 연재했다. 60만 팔로어의 사랑을 받은 이 웹툰은 동명..
인터뷰 후기 - 말하는 사람에서 들어주는 사람으로 “이런 책 읽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로 글쓰기 수업을 하는 날 학인들에게 건넨 첫마디다. 이 책은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 크레인 충돌사고로 6명이 죽고 25명이 크게 다친 사건을 기록한 르포다. 아무래도 끔찍하다. 저 멀리 거제도에서 배 만들다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서울 합정동에서 평일 낮 2시에 모여앉아 글쓰기를 배울 정도의 시간, 돈, 문화 자원은 가진 이들에게 어떻게 가닿을지,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학인들의 말은 놀라웠다.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일년 동안 투병했었다, 일은 그만뒀고 보상은 한푼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얼마 전까지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기에 공감이 많이 됐다, 울 아버지도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는데 ‘산재’라는 말을 몰랐거니와 ..
은유의 연결 - 산재피해 유가족 태규누나 김도현 태일이 엄마, 종철이 아빠, 한열이 엄마, 유민 아빠, 용균이 엄마….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들은 자식의 죽음으로부터 태어났다. 대개는 엄마 아니면 아빠였던 유가족 계보에 누나가 등장했다. “저는 청년 건설노동자 고 김태규 누나, 김도현입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2019년 4월10일 공사 현장에서 동생을 잃은 이후부터다. 세상은 동생의 죽음을 “비일비재한 추락사”로 몰아갔다. ‘욜로족’으로 살던 그는 투사가 됐다. 일하다가 죽는 일이 흔해서도 안 되거니와, 세상에 하나뿐인 ‘태규’가 죽었기 때문이다. 태규랑 용균이는 1994년생 동갑이다. ‘태규 누나’의 시간은 ‘용균이 엄마’의 시간과 자주 겹쳤다. 그는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의 일원이 됐다. 중대재해..
김진숙 복직 -27일 수요일 청와대에서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 최승자 시 일부 ​“논리의 관절이 자본뿐”이고, 그래서 “새들도 자본 자본하며” 우는 세상에 맞서,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고자 싸우는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자 김진숙 님의 복직투쟁을 지지하며 청와대 단신농성장에서 운영하는 ‘유쾌한 오후2시 프로그램’에 저도 참가합니다. 을 중심으로 ‘논리의 관절’을 다시 조립해보는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 마련했습니다. ​27일 수요일 오후 2시 청와대 사랑채 앞으로 오세요. 10권 10권 쟁여놓고 기다릴게요. 참가하는 분들에게 선물하고싶어요. ​
은유의 책편지 - 우리가 옳다! “90년대 초반 즈음 어느 노조에 강의를 갔다. 앞 시간 강사가 노무현이었다. 노조에서 활동보고 자료집을 주었다. 우연히 회계 보고를 보게 됐는데 그날 강사료까지 미리 집행한 내역이 나와 있었다. 노무현 50만원, 김진숙 10만원. 평소 노조에서 강의를 요청하면 강사료를 묻지 않고 갔다. 그때 처음으로 강사료를 문의했다. 강의 내용이 차이가 났는가? 아니랬다. 그렇다면 변호사와 (해고)노동자라는 직업에 따른 차등 지급이 아닌가. 노조 간부에게 말했다. 노동자도 노동자를 대접하지 않는데 누가 대접하겠습니까? 그날 강사료는 받지 않았다.” 김 지도님이 인터뷰 때 들려주신 일화가 생각납니다. 두 분이 부산에서 노동운동을 같이했다는 사실이 같은 사업장에서 강의한 얘기를 듣자 실감이 났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여운..
은유의 연결 -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임현주 아나운서 2018년 4월12일, 당시 (MBC) ‘뉴스투데이’ 진행자 임현주 아나운서는 국내 매체는 물론 외신에까지 이름이 났다. 여성 앵커의 ‘안경’은 10년차 아나운서의 자기 발언이자 방송계 성차별 구조를 드러내는 ‘언어’로 발신됐다. 어떻게 안경을 쓰게 됐냐는 세상의 물음은 외려 그를 각성시켰다. ‘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아홉살부터 키워온 아나운서의 꿈이었다. 단 한번도 아나운서의 경쟁력 1위가 외모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면서도 몸치장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모순된 생활과 그는 비로소 작별했다. 딱 붙는 원피스 대신 편한 재킷을 입었다. 덜 꾸밀 용기를 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하게 됐다. 그렇게 하나씩,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며 생각의 기둥을 쌓아갔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
은유의 연결 - <퓨즈만이 희망이다> 신영전 교수 신영전(56)은 의사다. 환자를 직접 대면하는 임상의는 아니다. 질병을 낫게 하기보다 질병을 낳는 정치사회적 요인의 진단과 치료에 관심이 많은 사회의학자다. 특히 취약계층 건강 정책과 대북 의료 분야 전문가로 오래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빨갱이’ 소리를 더러 듣는다. 공포와 불안을 파는 의료민영화 등 의료 생태계를 그가 비판하면 일선에선 환자도 안 보는 ‘네가 무슨 의사냐’ 하고, 의사 아닌 그룹에서는 ‘너는 의사니까’ 한다. 의료와 정치, 의사와 시민 경계 어디쯤이 그의 자리였다. 신영전은 교수다. 20년 넘게 학생을 가르쳤고, 일간지에 칼럼도 기고한다. 최근 전공의 집단 휴업, 일명 의사 파업이 끝난 뒤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9월30일치 26면)라는 글을 썼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은유의 책편지 - 어쩌면 이상한 몸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너를 지켜보고 설레고 우습게 질투도 했던 평범한 모든 순간들”이란 가사가 귀에 감겼어요. 어떤 연애가 평범한 걸까요. 한 친구는 수차례 파국을 맞으며 지독한 연애를 했습니다. 애인과 사이가 좋을 때는 소식이 없다가 관계가 틀어지면 제게 연락이 왔죠. 실망, 상처, 불화의 말들이 눈송이가 아니라 흙먼지처럼 날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같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했죠. “당장 헤어져.” 당신이 보낸 편지에도 이성애 연애 서사가 담겨있었습니다. 첫줄부터 놀라웠어요. “때리거나 욕한 적은 없어서” 임신중단(낙태) 수술을 몇 차례 하면서도 수년을 그와 만났다고요. 다행히 지금은 “죽음 앞에서 도망치듯”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나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