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니체인가

[니체의답안지]

# 어느 날, 니체

그날도 서점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양호했다. 습관처럼 샀고 한달음에 봤다. 본문에 인용된 숱한 멋진 말들은 삶에 지친 나를 위한 처방전 같았다. 원문이 욕심났다. 한약 짓는 기분으로 니체 전집을 질렀다. 딱 녹용 한 재 값인 삼십여 만원을 결제했더니 사과상자 크기의 박스에 니체 전집 21권이 배달되었다. 설레는 마음도 잠시. 한 페이지를 채 읽기가 어려웠다. ‘무리수를 두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방구석에 처박아두길 두어 달. 오랜만에 들어간 수유너머 홈페이지에 마침 니체 강의 공지가 떴다. 수업을 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외국어같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심 어려웠다. (그 강의는 자퇴생 및 행불자가 속출했다) 수업시간이 괴로웠다. ‘아는 이 전혀 없는 파티에 참석해 몸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는 사람처럼어색하고 외로웠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견디면서 누렸다.

자주색 하드커버의 무거운 책. “힘든 노동을 좋아하고 신속하고 새롭고 낯선 것을 좋아하지만 너희들 모두는 너희 자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이 말하는 근면이라는 것도 자신을 잊고자 하는 도피책이자 의지에 불과하다.” 니체의 말에 움찔했다. “도덕은 지금까지 삶을 가장 심하게 비방하는 것이었고, 삶에 독을 섞는 것이었다.” 점입가경이었다. 근면이 도피책이고 도덕이 독이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착한 딸,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당해 시들어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린 낙타 같은 날들이 스쳤다. 정확한 뜻과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니체에게서 거대한 사유의 전복이 이뤄지고 있음을, 갈피마다 행간마다 섬세하면서도 격정적인 문체, 멋스러운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음은 알아챌 수 있었다. 정념 과잉의 언어. 생의 의지를 고양시키는 말들. 폭포처럼 떨어지는 아포리즘은, 그대로 시였다 

# 삶을 위한 시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 , 이거였구나! 아이들 둘 키우고 집필 노동하면서 거기다가 공부 좀 해보겠다고 설치다보니 등골이 휘는, 서른 후반 나의 존재론적 뒤척임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백 년 전 니체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느 여성의 삶에 팍팍 꽂히는 얘기를 풀어놓았다. 고뇌하는 모든 것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은, 살아있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힘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이는 니체가 창안한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이다. 니체는 이 세계를 힘들의 바다로 규정했고 힘 관계로 생성을 설명했다.

니체는 하룻밤에 읽는혹은 ‘30분 만에 읽는으로 요약 불가능한, 그렇게 읽고 싶지 않은 철학자였다. 플라톤이나 칸트, 헤겔처럼 순수와 영원을 탐구하고 개념의 금자탑을 쌓으면서 일상과 멀어지는 사유가 아니라 이 아수라장 세속의 장을 특유의 문체로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키에르케고르 말대로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광대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결을, 니체는 감히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태도는 또 얼마나 모던한가. “진리가 아닌 다른 목표들을 추구해보시오. 건강이나, 미래, 성장, , 생명 같은 것을...” 니체는 진리의 노예이길 거부했다. 절대 진리는 없으며 진리가 힘을 갖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진 것이 진리라고 했다. 삶 아닌 그 어떤 것에도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고 말하는 니체는 뼛속까지 삶의 철학자. 그래서 이 세계를 거부하고 저 세계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 도덕을 비판하면서 신의 죽음을 고지한 것이다.

무신론자인 나에게도 의 죽음은 중요했다. 니체가 말하는 은 그리스도교 신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에 복무하기보다 삶에 군림하는 도덕, 종교, 철학, 과학, 국가, 돈 등 이 시대의 모든 자명성을 으로 아우른다. 즉 니체에게 의 반대개념이다. “신이란 올곧은 것 모두를 왜곡하고, 서 있는 것 모두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다.” 신을 부정한 니체가 천국으로 가는 길은 친절히 안내한다.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은 아니다

# 니체와 글쓰기

니체 철학을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의 대결구도로 접근하니 텍스트의 초점이 조금씩 맞춰졌다. 니체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바로 이것. ‘삶에 대한 옹호이다. 그래서 삶은 질병이고, 철학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를 니체는 비판하면서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하나의 병증일 따름이라고 일갈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나의 본능, 나의 욕망, 나의 충동에 관심이 쏠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고급한 충동으로 고귀한 욕망으로 신체를 잘 가꾸어야 건강한 삶이 가능함을 배웠다. 이러한 자기성찰의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한 무지, 나의 삶의 무능을 통감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존재이며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하는 짐승이라고 일찍이 니체는 말했다. 무작정 행복만 원하지 정작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는 것이다.(랭보의 시구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행복은 나의 숙명, 나의 회한, 나의 벌레였다’)

나부터도 하루하루 밀려오는 일들에 휩쓸리다보면 내 정신은 뒷전이다. 주위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정신으로 살기보다 사장님 정신, 학원장 정신, 목사님 정신, 연예인 정신, 보험설계사 정신 등 각종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정신으로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판단하고 계획한다. 그렇게 자기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좋은 것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니체의 처방.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과한 것이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은 위대한 경멸을 촉구하는 언설들로 가득하다. 낡은 습속들. 헛된 열망들. 오랜 집착들. 내 것이 아닌 판단들을 모조리 태우라는 거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삶이 불만스러울 때, 이 삶을 다시 살고 싶을 때, 니체의 표현대로 과거라는 돌덩이를 굴릴 수 없어 답답할 때, 나는 글을 썼다. 니체가 일러준 두 가지 가치평가의 척도. 자기보존인가, 자기초극인가. “그냥 살지?” “한번 해봐?” 두 마음의 난투극을 지켜보았다. 쓰면서 물었고 쓰면서 버렸다.

어쨌든 쓰고 나면 삶에서 집중해야할 문제들이 선명해졌다. 니체에게 훔친 아름다운 표현 하나, 문장 한 줄 벽돌처럼 끼워 넣고 싶어서 사유의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렇게 니체와의 글쓰기는 파괴-창조의 유희를 선사했다.

 # 철학적 오페라

니체 철학에 등장하는 초인, 즉 위버멘쉬는 자기 자신을 넘어감이라는 뜻의 독일어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를 자기초극의 운동성으로 이해했다. 어떤 우월한 사람이 구현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자기를 돌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채택하는 삶의 원리와 태도로 말이다. 니체는, 그리고 글쓰기는 짧은 보폭이라도 나를 넘어서는 과정에 기여했고 삶의 벡터를 조금씩 틀어주었다. 내가 니체라는 연료를 넣지 않았더라면, 글쓰기라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여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장은 텅 비었으면서도 짭짤한 연봉의 프리랜서를 그만두고 공부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은 일, 번듯한 학위도 내세울 경력도 없으면서 글쓰기 강좌를 시작한 일, 니체를 읽고 글 쓰니까 좋더라며 손 내민 일...그렇게 용기 내어 나를 떠나는 일이 아니었으면, 나를 찾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다(보임러)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다르게 말한다. “언젠가 하인리히 본 슈타인 박사가 내 <차라>의 말은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게 불평했을 때, 나는 그에게 그게 당연하다고 말했었다. <차라>에 나오는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문장을 체험했다는 것이고, 사멸적인 인간 존재의 최고단계에 현대인으로서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처음 <차라>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뿐이거늘이라는 문장에 형광펜을 진하게 그어두었다. 그 문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이 유행가 가사에 기대듯이 나는 니체의 말에 위로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니체가 죽음의 설교자들에게비난하는 말이었다. “삶은 한낱 노역과 불안이라는 둥 삶을 무겁게 만드는 온갖 말을 퍼뜨리면서도 그 한낱 고난의 연속에 불과한 생을 끝내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다고 조롱한다. 나중에서야 그 뜻이 보였다.

니체의 말은 자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체험에 따라, 욕망에 따라 다르게 들리고 다른 게 보인다. 그것이 묘미다.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시선과 대화와 감성이 어우러지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가, 들뢰즈 말대로 철학적 오페라가 되리라 기대한다.

 

* 어쩌다 니체를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 니체가 어떻게 나의 글쓰기를 자극했는가에 관한 고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독 수업을 시작하며 써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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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한 11월

[니체의답안지]

금요일 아침 커피가 달다. 목요일 저녁에 니체 수업을 끝내고 마시는 첫 커피이기에 그렇다. 어제로 2강이 지났다. 한 고개 넘고 바위에 앉아 쉬는 느낌. 발아래 출발지점이 보인다. 차라투스트라-글쓰기 강의라는 발상.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일이다. 우월한 니체전문가 많은 연구실에서 니체강의 한다고 나서려니 민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다. 내 조건에서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는 인생, 해보고 싶은 일은 해야 한다. 설령 망해도 별로 나빠질 게 없다는 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ㅋㅋ 위대한 사상과 수려한 문체의 원천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밑줄을 긋고 생각을 뒤척이고 그 인식의 거울로 자기 삶을 비추어 글을 쓰고. 그러자고 공지를 내놓고는 조마조마했다. 누가 동조를 해줄 것인가, 과연...가을강좌 모집도 끝나고 연말이 다가오는 어수선한 11. 개강시점으로 참 애매한 때다. 근데 공부를 꼭 3월이나 9월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니므로. 나의 준비가 그때서야 완료됐으므로 공지를 띄웠다 

참 이상한 기다림. 연애할 때 전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과 불안이 공존한다. 내가 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이 얄궂음을 당하는지, 며칠 동안 후회했다. 나를 외부에 개방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폭풍마감은 아니고 가랑비에 젖듯이 열다섯 명이 찼다. 기분이 좋았던 것이 글쓰기의 최전선 12기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난 강의를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위안, 계속 헛살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했다. 허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차라투스트라 말고도 두꺼운 니체저서를 다시 뒤적여야했고 난해한 니체의 언어에 짓눌릴 때,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일 때 또 번뇌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이 난리인가. 대충 살지, 나도 참 애쓴다... 근데 그 터널만 지나고 나면 또 반짝 살만했다. 빈대떡보다 더 자주 뒤집히는 마음. 대범함과 심약함의 진자운동.  

흔들리는 소리가 학인들 사이에서도 들린다. “, 이렇게 써도 되나요?” “이게 맞나요?” “니체 원전을 더 읽고 차라를 봐야하는 게 아닐까요?” 삶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공부를 위한 삶을 강요해온 교육환경에서 성장한 이들은 니체를, 니체의 위험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론적 정합성을 따지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모델을 찾으려는 열망을 갖고 있으면 니체는 영원히 잡히지 않는다. 니체는 자기의 사유를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이단아다. 불친절함의 최고봉은 차라투스트라이고. 그러니 문학적 감수성과 독해력이 없으면 삶의 경험치가 적으면 읽기가 힘들다. 니체도 말했다. “차라투스트라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 삶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몇몇 문장에 도취되지 말고 반드시 자기의 사유를 바꿔가는 방식으로 차라를 읽어야 한다고. 첫 시간에 제안했다. 나는 이 수업에서 저마다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과 지식이 어우러지는 철학적 오페라를 기대한다고 

거창한 출사표. 과한 의미부여가 때로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지식-진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약간의 사치를 부리는 삶에 대한 나의 선호. 다른 세상에 대한 나의 눈물겨운 동경그렇기 때문에 누구와 어떤 책을 읽든 원점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다. ‘어떤 앎이어야하는가’ ‘나는 얼마나 더 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계보학 관련해서 푸코 책을 뒤적이다가 나의 원초적 물음에 응하는 빼어난 문장을 만났다.

"철학적 담론이 밖으로부터 타인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그들의 진리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를 말해주고자 할 때, 혹은 순수하게 실증적으로 그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다고 자부할 때, 그 철학적 담론은 얼마간은 터무니없는 것이다...‘시도’-이것은 의사소통의 목적에 맞게 타인을 단순화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작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려는 시험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데-는 철학의 살아있는 본체이다."  -<성의역사2>







Chopin's Waltz Brilliante Op. 34, No. 1 in A Flat Major by Lang 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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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니체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썼다"

[글쓰기의 최전선]

 
니체의 글은 시적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특유의 운율에 녹아있습니다. 짧은 경구와 비유, 강렬한 아포리즘으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니체가 독자를 선별해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시(), 시적인 니체의 글은 내가 원한다고 읽을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물음을 가졌을 때만, 그 절실함의 강도만큼 문장들이 화살처럼 날아와 꽂힐 것입니다. ‘나는 니체를 읽었다가 아니라 니체가 나를 습격해왔다! " 니체와의 만남은 내가 낯설어지는 체험이고 삶을 창조하는 실험입니다. 

니체에게 글을 쓴다는 것과 삶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좋은 글쓰기 교과서입니다.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메시지, 치밀한 비유와 유려한 문체는 폭풍과도 같은 자유로운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실제로 출간 당시 고도의 문체연습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인간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내려온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니체철학을 살펴보고 나를 찾는 글쓰기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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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삶의 입구

[글쓰기의 최전선]



시 낭독회 풍경을 기사로 써보세요.” 지난시간 돌발과제를 내주었다. 그랬더니 수업시간에 엄청 조용했다. 한 사람이 시를 낭독하고 소감을 발표할 때면 사각사각 볼펜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침묵을 깨는 말말말. 그렇게 생각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당신에게 여행은 무엇이냐. 중저음으로 깔리는 물음들. 잔뜩 긴장한 표정들. 지금 청문회 아니니까 편하게 대화하라고 말하는데 웃음이 났다. 처음엔 다들 토시 하나 안 놓치고 열심히 적더니 나중엔 손놀림이 점점 느려졌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무척이나 기운 빠지는 일. 듣기도 어렵고 쓰기도 고되다. 나는 조심스레 예측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의 편집은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반만 맞았다. 의외로 대동소이한 글들. 예비작가들은 자기 육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일에 서툴렀다. 여행, 죽음, 학창시절 추억 등 스토리가 강렬한 에피소드, 즉 기억하기 쉬운 사례는 모두의 글에 빠짐없이 등재됐다. 시에 대한 인식변화 역시 공통으로 언급했다. 대학시절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를 읽었으나 해석하기 급급했고 기형도는 지적 허영같아 멀리했다는 정연씨. “처음 해 본 낭독회는 내가 미처 놓친 시들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감정의 다른 결을 가진 사람들이 들려주는 고유한 풍경에 흠뻑 취해도 보고, 한편 스스로에게 감정을 이렇게 드러내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그런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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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악령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살아가는 일이 버거울 때,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표현을 쓴다. 세상의 짐을 혼자 걸머진 듯한 절망감에 휘청댄다. 이렇게 나를 자꾸 주저앉게 만드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를 ‘중력의 악령’의 소행이라고 한다. ‘날지 못하는 사람은 대지와 삶이 무겁다고 말한다. 중력의 악령이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삶이 무겁고 고된 이유는 “우리가 요람에 있을 때부터 사람들이 지참물로 넣어준 이것” 때문이다. 바로, 선과 악이라는 지참물. 정확히 말하면, 선악을 척도로 하는 가치관 - 도덕이다. 어려서부터 공기처럼 받아들여 온 ‘착하게 살자’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나날들. 아이 때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착한 자식으로, 선생님에게 고분고분한 착한 학생으로, 사회로 나가면 조직의 룰과 상사에 복종하는 착한 직원으로, 결혼해서는 착한 며느리로, 돈 잘 버는 착한 아빠로 살아간다. 나보다는 ‘남’의 도덕과 평판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의구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낡아 빠진 자부심’, 선악이라는 지참물이 삶에 천근만근의 무게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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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구원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우리는 살면서 시간이 역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해한다. 실연, 실패, 사고, 암 등 나에게 닥친 끔찍한 우연,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을 질질 끌고 다니며 부여안고 운다. 그렇게 고통은 과거에서 오고, 또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온다. 자식이 나중에 밥 굶을까봐 조금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식과 불화하며 현재를 고통으로 몰아간다. 

이는 인간의 한계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살이는 다 그랬던 가보다. 현존의 의미, 즉 ‘산다는 것’이란 근본물음에 천착했던 철학자들은 사는 동안 벗어날 수 없는 이 고통이란 놈에 나름대로 고민하고 해법을 제시한다. 농부철학자 피에르라비는 ‘이전에 나는 언제나 과거에 대한 억압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내 삶을 방해했다.’고 고백하면서 ‘영원한 순간’을 긍정하는 것에서 고통의 해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나는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시간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과거나 미래 속으로 내던집니다. 거기에서 고통이 오며, 그 고통은 우리가 현재 속에 살 때만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영원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 <농부철학자 피에르라비> 42쪽

니체 또한 ‘순간=우연=창조’를 구원의 키워드로 제시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지난날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것, 내게는 비로소 그것이 구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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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니체의답안지]

‘몸은 관념에 비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령 “당신만을 사랑할 테야”라는 사적 고백의 그 빛나는 초월도 끝내 비루한 안일의 체계 속으로 내재화하고 만다. 일상은 무엇보다 몸이고, 그 모든 고백과 의도는 잠시의 부유를 끝내면서 그 몸속으로 가라앉는다. 결심은 잦고 의도는 선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 김영민<동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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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귀가 없는 이에게 말하는 건 위험하다

[니체의답안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작이다. 단테의 <신곡>처럼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어도 제목은 거의 다 아는 ‘고전’이다. 그런데 니체가 궁금해서 이 책을 펼쳤다면 당황하기 십상이다. 니체에 대한 예비적 이해가 없을 경우 <차라>는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보임러A.Baeumler는 말했다. 이는 <차라>가 니체철학의 입문서가 아니라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마지막에 읽어야 좋을 작품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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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인문학자 - 니체적인, 너무나 니체적인

[행복한인터뷰]

이른 아침, ‘연구공간 수유+너머’ 카페는 텅 비어 있다. 음악도 없고 사람도 없는 그곳은 얼핏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첫 장면처럼 스산했다. 커다란 창문만이 초여름 흐린 공기와 서울풍경을 덤덤히 담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왔다. 주인 없는 카페. 그래서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카페에서 그는 서툰 솜씨로 커피를 갈고 뜨거운 물을 받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커피를 잘 내리는 사람이 해준 맛있는 커피를 먹고는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직접 해 먹기도 합니다. 뭐든지 그런 거 같아요. 잘 하는 사람을 통해 진짜 맛을 느끼고 좋아하게 되잖아요.”

어쩌면 그는 커피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커피’ 대신 ‘니체’를 넣으면 고스란히 고병권이 설명된다. 니체라는 쓰디 쓴 원액을 특유의 손맛으로 우려내 ‘니체의 참맛’을 선보인 장본인이 바로 그다. 고병권은 <니체, 천개의 눈 천 개의 길><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을 쓴 최고의 ‘유쾌한’ 니체주의자다. 저작 및 강연활동을 통해 철학책 속 니체를 ‘커피처럼’ 일상으로 불러왔고, 까칠한 니체를 ‘커피처럼’ 향기롭게 뽑아 숱한 나른한 영혼들을 일깨웠다. 그는 손수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곧 생애 첫 기억부터 내밀한 시간의 자락을 들추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영화 <바그다드카페>의 마술처럼, 카페에 웃음이 솟고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골아이 고병권
“어린아이는 신성한 긍정, 순진무구한 망각,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다.” 

그는 열 살 이전까지 흙길을 밟으며 자랐다. 처음으로 아스팔트를 본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까맣고 평평한 땅, 신작로가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던 깡촌 아이였다. 때문에 “MT를 가면 살아난다”. 나무 해오고 장작불 떼고 풀피리 불고 등등 자연을 무대로 활보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이 많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키가 작아서 앞에서 세 번째였지만 5학년 때 광주로 전학가기 전까지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의 전권을 쥘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숙제도 안 해오고 능청스럽게 자기공책에 ‘참 잘했어요’를 쾅 찍었다. “거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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