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반복과 허무주의

[스피노자맑스]

예전에 사보취재 다닐 때 들은 얘기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이었는데 본사가 부산이었다. 서울 사무소 직원이랑 취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무 생각 없이 KTX가 생겨서 왕복시간이 단축되니 덜 피곤하고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모르는 소리 말라고 한숨이다. 새마을호 시절에는 어차피 하루만에 다녀오질 못하니까 부산에서 일 보고 회도 먹고 바다도 보고 좀 놀다가 다음날 왔는데 KTX가 생기니 당일출장 처리가 되고 다음날 피곤한데 또 출근해야해서 더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 기차나 버스를 타면 멀미나서 힘드니까 시간이 단축되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산업자본주의 초기에 가장 먼저 철도가 깔렸다. 물품운송. 자급자족하던 공동체에서 물건이 '상품'의 외형을 띠고 공동체 바깥으로 나가려면 길이 필요했다. 나치집권 시기에도 토건자본은 부흥기를 맞았다. 사람운송을 위해 철도 깔고 수용소 짓느라고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굴뚝산업이 발달한 영남지역에 일찌감치 널찍하게 뚫린 고속도로. 운송수단이 발달하는 것은 자본의 순환에 전적으로 기여한다. 그렇게 자본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의 더 큰 폐해는 착취의 강도가 높아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감각을 '빨리빨리'로 바꿔놓아사람을 쫓기고 불안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KTX가 생기면서 바깥풍경도 사라지고 사람사이 대화도 사라진 것처럼.자본의 속도가 빨라지면 자본에 종속된 일반인의 삶도 빨라진다. 삶이 쫓기는 것은 목적만 보기 때문이고 목적만 바라보면 주변부의 작고 약한 존재를 놓치고 밟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인터넷 서점과 쇼핑몰의 '당일배송'이란 문구만 봐도 숨이 막힌다. 저 당일배송, 30분 배송 등 고객만족을 위해 죽어가는 건 배달노동자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각박한 삶의 공기를 형성해서 나에게도 나쁜영향을 미친다.     

 

얼마전 화물연대는 못자고 못먹고 과적하는 등 무리한 운송업무에 시달리다 못해 파업에 돌입했다. 사람보다 돈의 원리로 작동하는 자본. 그 자본은 유통속도를 '0'화하려는 의지(허무주의)가 있다는 맑스의 분석. 회전속도가 잉여가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생산물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경우 '거리'는 생산비용 증대로 나타난다.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자본의 시도.  저렴한 수송 및 통신수단의 생산은 자본에 기초한 생산의 조건이 된다며 맑스는 "시간에 의한 공간의 절멸"이라고 말한다. 도로의 경우는 개별자본의 특수한 이해가 아니라 자본 일반의 이해가 달려있는 생산조건이다. 자본이 도로건설을 필요로하고 또 도로가 수익을 낼 수 있기 위해서는 "대규모 교류를 전제"해야 한다. 사업의 필요성은 크지만 수익이 작을 경우 "자본은 철도를 국가 부담으로 전거시키거나..국가적 욕구로서 나라 전체에 미룬다. 자본은 이익이 있는 사업들..이익이 되는 사업들만을 수행한다."

 

유통시간 없는 유통

 

* 자본의 회전 

:  화폐 -> 노동과 생산수단-> 생산물 -> 화폐로 전환되는 순환 

"자본의 화전에서는 출발점이 귀환점으로 정립되어 있고 귀환점이 출발점으로 정립되어 있다"

 

- 자본순환의 중요성. "생산과정은 상품이 화폐로 전환되기 전에는 새롭게 시작될 수 없다.. 한 생산국면이 다른 국면으로 막힘없이 흐르듯이 이행하는 것이, 과거의 모든 생산형태들에서와는 전혀 다른 정도로 기본조건으로 나타난다."

- "주어진 시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생산물이 생산될 수 있는가, 주어진 시간 동안에 자본이 얼마나 자주 증식될 수 있는가, 그것의 가치를 재생산하고 배증시킬 수 있는가는 유통의 속도, 유통이 경과하는 시간에 좌우된다."

 

* 자본의 회전을 결정하는 시간은 크게 두 가지 - 생산과정과 유통과정

 

->유통은 생산과정에서 정립된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일 뿐 가치를 창출증식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가치 감소를 초래.

    유통시간을 단축시킬수록-자본의 회전을 늘릴수록- 자본에 유리하다.

-> 자본은 가치증식을 위해 생산과정 - 잉여노동시간 늘림, 유통과정- 자본의 회전수 늘림

-> 유통속도가 빠르면 자본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도 동일한 더 많은 잉여가치를 낳을 수 있다

    '유통속도가 자본의 크기를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유통은 가치자체에는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자본은 한편으로 교류, 즉 교환의 모든 장소적 제약을 무너뜨리고 지구 전체를 그의 시장으로 정복하고자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에 의해 공간을 절멸시키고자 한다."

---> 유통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

 

* 자본가의 횡탈   

자본가가 자신의 시간을 바쳐서 유통에 나섰다고 해도 그것은 과잉시간, 비노동시간,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시간이다.

유통비용은 자본가의 시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을 빼앗은 것. 노동자가 창출한 잉여노동시간을 소모하는 과정이다.

"자본가는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들에 의해 차출된 자유시간, 즉 문명을 가로챈 것이다."

 

* 생산과정 자체의 기술적 조건이 자본의 회전에 미치는 영향 문제 제기

-> 만약 농업처럼 어떤 자연적 조건에 따라 일정시간 동안 대지에 작물의 성장을 맡겨놓고 기다려야 한다면,

즉 생산과정 내에서 산 노동의 결합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면 자본의 회전에 영향을 미친다. (비생산적)

 

자본의 소유통과 대유통

 

* 소유통:  노동자에게 급료지급 부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유동자본.

 "자본과 노동력 사이의 소유통은 자본 자체를 정립하고 자본의 증식과정의 조건이며 자본의 한 형태 규정, 자본의 실체도 정립한다"

* 대유통: 자본이 유통시간으로 나타나는, 생산국면 바깥의 자본운동.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분

 

맑스는 고정자본-유동자본을 그 형태와 내용,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에서 해명

* 고정자본은 생산과정에서 고정. 생산과정 자체에서 소비되고, 다만 소멸하면서 가치를 유통으로 넘겨준다.

사용가치는 남지만 교한가치는 넘어간다.

"고정자본은 생산과정에 들어가서 머물자마자 생산과정에서 사라지며 소모된다."

-> 유동성이 커보이는 사물들 포함. 석탄, 목재, 기름, 수지 등 도구재료

* 유동자본은 사용가치가 양도될 때 교환가치도 실현된다.

 

* 고정자본의 자본의 구성부분이 증가함에 따라 자본의 유통시간이 증가한다.

"일정시간에 그것의 재생산 횟수가 감소함에 따라, 또는 일정한 시간에 재생산되는 자본의 양이 감소함에 따라" 잉여가치의 생산이 감소. 

->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기계화가 현실화될수록 이윤율은 내려간다.

 

* 자본의 회전을 줄이는 규정들

1) 고정자본의 경우 생산과정에서 천천히 소비되므로 자본의 회전을 감소시킨다.

2) 멀리 떨어진 시장. 생산물의 화폐로의 전환에 소요되는 시간 때문에 자본의 회전을 감소시킨다.

3) 농산물처럼 생산과정에서 생산물이 나오는데 시간이 걸려서 자본의 회전이 감소될 수 있다.

 

자유경쟁에서 나오는 자유환상

 

* 자유경쟁에서 자유롭게 정립되어 있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자마자 자본은 지팡이를 내던지고 자기자신의 법칙에 따라 운동한다."

-> 이 법칙, 이 외적인 필연성의 현실화가 자유경쟁. 이런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완벽한 지양이다."

* 자유경쟁 찬미자들이 떠들어대는 "개인들의 사적이익 추구가 일반이익을 실현한다"는 말은

사적인 이익 충돌들의 상호작용이, 자본에 기초한 생산조건들을 재산출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맑스 읽고 나면 서늘하다. '나의 차가운 피를 용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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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목표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

[스피노자맑스]

# 미래노동을 점유당한다

 

자본의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생겨났는데 잉여가치의 등가물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노동속에만 있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한, 그것을 자본으로 재투자하므로, 자본가는 현재의 노동을 점유함으로써 동시에 미래 노동도 점유한다는 것. 그래서 자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맑스 분석대로라면 노동자는 현재에 자본에 복무함으로써 미래 자본에까지 복무하는 거니까.

 

#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예: 자본 100= C (원료50+도구10)+ V(필요노동40)+ S(잉여노동40) = 140

 

생산물의 가치는 C원료+V필요노동+S잉여노동 =140

가치생산물은 V필요노동+S잉여노동= 80  

잉여가치율 (필요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비율 )40/40 = 100%

이윤율 (투자에 대한 이윤비율) 40/100 = 40%

 

 "계산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라고 말한 맑스의 심정이 이해가는 무수한 수식이 많은 분량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은 다르다.

- 잉여가치율은 착취율이다.

- 기계화 등으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이윤율이 떨어져도 잉여가치율이 올라갈 수 있다.  

 

# 자본주의 인구법칙

 

현미경 들고 좁쌀영감처럼 주판알 두드리던 맑스가 이제 망원경을 든다. 일개의 노동자와 일개의 자본가 대립이 아니라 '노동일' VS '임금총액'으로 접근한다. 잉여가치 창출을 위해 뭐든지 하는 자본가. 그들의 주된 노하우는 필요노동줄이기, 노동인구 창출하기, 시간도둑질 등등.

 

"잉여노동량의 증가는 한 개인의 살아있는 노동일이 설정하는 자연적 한계를 뛰어넘기다"

 

그러니까 8시간 계약해놓고 10시간어치 일 시키기. 작업 반장을 배치해서 한 눈 팔지 못하게 작업효율 높이기, 음악틀어 놓아서 졸지 못하게 하고 야간노동 시키기 등등. 인간의 생리적 한계에 도전하는 초과노동에서 나아가 "노동일 곁에 다른 노동일을 동시에 정립하기" 즉, 조밀한 손작업 등이 요구되는 생산라인에 성인남성 외에 부녀자와 아동을 노동인구에 추가하면서 착취의 외형을 마구마구 늘린다.  

 

"과잉인구는 자본축적의 새로운 지렛대가 된다. 과잉노동인구는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이 되어

호황, 활황, 공황, 침체의 자본축적  사이클에서 자본이 받을 충격을 완화시키는 완충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고동노동자에게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감내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예비군 경쟁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이 취업자로 하여금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실업자들이 대기하고 있으면 자본가는 취업자들에게 더 많은 노동을 아주 당당히 강요한다. "니들 아니라도 일할 사람 줄섰다" --> 노동자의 증대없는 노동의 추가공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 눈부신 발전도 그렇게 이뤄졌다. ==> 자본주의는 필요를 충족한 뒤 잉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잉여를 창출해야만 하는 사회다. 이는 맑스가 옛날 사람이라 옛날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라, 지금도 버젓이 진행중. 구로공단이 사라지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이름을 바꾸고 건물에 회칠하고 대리석을 깔아도 착취는 맑스가 분석한 구시대 수법 그대로. 유성기업은 작년부터 '밤에 잠 잘 권리'를 주장하며 야간작업 철폐 투쟁 중이다.  전태일 평전은 물론이고 김진숙의 책에도 가혹한 노동착취의 실상은 눈물겹게 자세히 나온다.

 

"회사 옥상에 높다랗게 붙어 있던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큰 간판이 언젠가 ‘수출강국’으로 바뀌어도 전혀 강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그 간판 아래 짓눌린 채 버려진 배추 잎사귀처럼 누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욕먹는 일, 매 맞는 일, 개중에 예쁜 아이들 엉덩이 주물리는 일, 매일 목표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일, 수당도 없는 연장 작업을 거의 매일 하게 되는 일, 그런 일이 부당한 일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지만, 점심 시간 줄 서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늘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울대가 뻑뻑하게 아파서 밥이 잘 안 넘어간다든지,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 줄만 써 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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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려면

[스피노자맑스]

 

"임금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재생산도 포함한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이 표본이 죽으면, 다른 표본이 그를 대체한다. 50명의 노동자가 죽으면, 이들을 대체하기 위해 다른 50명이 나타난다." (정경비요1권 -368)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한 구절을 같다. 뻔한 얘기.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인데 '나타난다'라는 동사가 낯선감성을 일으킨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걸까. 무한증식 무한복제 가능한 존재로 산다는 것의 쓸쓸함.  한 존재가 쉽게 다른 존재로 대체된다는 게 자본주의적인 폭력구조를 가장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쌍차 분향소의 22개 영정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22명의 죽음은 22명의 다른 노동자로 대체되어 자동차는 차질없이 생산된다. 엠비시는 파업 130일을 넘겼는데도 방송은 그런대로 멀쩡히 진행되고. 재능노조는 61일로 농성1625일이라고 했다. 이제 투쟁사업장에서 천일은 기본. 쌍차걷기대회에서 단식농성 20일 넘긴 언론노조 위원장이 그랬다. 엠비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제 시작이라고.

 

맑스가 말하는 착취는 노동자가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는 부등가교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환가치 자체의 착취 구조를 문제삼는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게끔 되어있는 구조. 자본주의에서 생겨난 이 교환가치 시스템이란, 더 많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자가증식 운동이다.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능력을 사용해야 생기므로, 노동은 잉여가치의 원천이 된다. 생산수단이 박탈된 자유로운 개인(굶어죽을 자유를 가진 개인)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팔고 자본에 피땀을 흡빨리면서 임노동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꿈의 직장이라 불리는 구글도 예외없다. 자본의 질서에 들어갈 때만, 자본의 이익에 복무할 때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아가 자아실현의 꿈을 펼칠 수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게 맑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물음. 자본의 외부는 어떻게 창출하는가.  

   

공장이나 자본을 매개하지 않고서 바깥 세상과 관계 맺고 자아실현을 경험할 수는 없을까.

노동이 (교환)가치이길 중단하고, 노동이 자기단련이 되는 길은 없을까.

일할수록 피폐해지지 않고 일할수록 자아확장이 일어나는 그런 노동을 맑스는 단련이라고 불렀다.  

 

맑스의 또 한 가지 문제제기. 노동자가 일하지 않으면 원자재는 썪는다. 기계는 먼지가 쌓인다. 공장은 폐가가 된다. 가령 집에서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시들고 냉장고 야채도 썪고 집안이 난장판이 되는 것과 같다. 고로, "노동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불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불의 담지자인 노동자는 복락을 누리지 못하고, 자본가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고 보물을 얻는다는 게 맑스의 지적이다. 노동자가 노동을 발휘해서 물건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손길이 닿지 하지 않았으면 쓰레기가 됐을 그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데 그에 따른 대가는 지불받지 못한다는 거다. 꿩먹고 알먹는 자본가. 노동자는 이중삼중 보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중삼중 착취를 당한다. 맑스 읽으면 심란하다. 한 인간이 피조물 상태에서 세계내존재로 던져져서 삶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고달픈 곡예가 되어야하는 걸까. 왜 노동자는 평생 일하고도 가난하고 고달픈가. 이 부조리한 세상은 왜 이렇게 잘도 돌아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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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걷다 - 쌍차 해고자 복직 걷기대회

[사람사는세상]

오랜만에 걸었다. 정수리 위에다 이글거리는 초여름 해를 지고 강바람 몸에다 걸고 뛰다가 걷다가 흘렀다. 여의도에서 시청까지. 작년 가을 시세미나 시작하고 '토요집회'에 소홀했었다. 아무래도 에너지가 한 곳으로 쏠리면 흐름을 돌리기는 어렵다. 하나의 수도꼭지에 하나의 호수 밖에 들어가지 않듯이 나의 리비도는 '시'에 끼워졌던 것이다. 세미나를 오래해서 여유가 좀 생긴 건지, 아니면 맑스를 읽어서 그런지 집회에 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재능노조 1500일 투쟁. 쌍차 22명의 죽음. 삼성전자의 멈추지 않는 죽음의 행렬. 내가 공부하는 이유와 내가 공부한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현실에 내 몸을 들여놓고 싶었다. 여의도공원 앞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이 되기를 기다리는데 낯선 얼굴이 보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다! 나는 완전 반가워서 입을 귀에 걸고 넙죽 몸을 반으로 접어 인사하고 - 사실은 큰절이나 큰 포옹을 하고싶었다. -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기념사진을 찍었다. 

뭔가 길한 조짐에 살짝 흥분했다. 오길 잘했군 잘했어. 공원 입구에서 mbc 노조분들이 백만인 서명받고 있어서 사인하고. 광장에서 기념수건 사고, 얼음조각전 보고. 박재동화백이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것도 구경하고 아는 선배 만나서 기념사진 찍고 놀다가 행진시작.  마포대교 앞에 차벽에 막혀서 그 앞에서 30분 공연보고. 경찰차에서는 계속 안내방송이 나왔다. 집회 때마다 반복되는 징징거림. 여러분은 도로교통법 몇조 몇항을 위반하고 있다고, 그러니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청소년 대상 선도방송에도 못 써먹을 얘기를 장성한 시민들 대상으로 한다. "우리는 돌아갈 가정이 없다!" 파편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그날 따라 법조문이 유독 듣기 싫었다. 저것은 말이 아니다. 모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을 거부하는 철갑옷의 언어. 모든 말을 튕겨내는 권력언어를 총알 발사하듯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발설한다.   

시위대와 차벽의 대치가 길어져서 행로급변경. 우르르 여의나루역에서 공덕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하고 공덕역에서 시청까지 다시 대오를 만들어 걸었다. 한 천명쯤 되는 시위인파가 게릴라전처럼 도로에서 지하철로 차도에서 인도로 밀렸다가 뛰다가 걷다가 시청까지 흘러가는 과정이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했다. 오후 5시 무렵 시청 도착. 본행사 준비로 분주한 대한문을 뒤로하고 시세미나 하기 위해 연구실로 들어가서 오은의 <호텔타셀의 돼지들>을 읽었다. '아침이 수수께끼'라는 시구에 대한 곰곰한 대화. 아침에 눈을 뜨면 또 어느 공간에 끼워진다는 사실이 싫었다고 그래서 아침은 자기에게 수수께끼였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삶의 방식이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함을 토로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세미나 친구들 다섯명과 다시 대한문으로 왔다. 1박2일 난장이라 했거늘, 시위대가 많이 빠져나갔고 빈 돗자리와 빈 생수병이 나뒹굴어 을씨년스러웠으나 무대는 한껏 달궈졌었다.

알짜배기는 그 때부터. 골든브릿지, 유성기업, 재능, 쌍차, 한진 등 사업장 투쟁동지들이 발언과 공연을 선보였다. 요즘은 싸웠다하면 1000일은 기본이다. 재능노조가 벌써 1600일이라고 해서 가슴 쓸어내렸다. 사업장은 달라도 자본가의 악랄하고 치졸한 행태, 억압과 착취를 자행하는 방식은 흡사했다.  맑스의 치밀한 분석글을 읽을 때처럼 소름돋았다. 누군가 무대 앞을 슬그머니 오가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쪼그려 앉아 경청하다가 그러길래 보니까 김진숙 지도다. 밤에 보니 더 작고 작은 체구의 그녀. 저 몸 어디서 기운이 나와 35미터 벼랑 끝에서 삼백일을 버텼을까 싶으니 또 뭉클했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 조남호 육실헐놈. 구호와 욕설과 웃음이 난무한다. 신난다. 집회의 저러한 천편일률적인 방식과 배치가 좀 싫었었는데 그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주먹에는 거짓이 없다. 몸에 들끓는 울분과 원한과 분노는 손끝까지 뻗치니 주먹으로 뭉쳐 우주로 날릴 수밖에 없구나.

지하철 막차를 기다리며. 시세미나에서 대한문 갔다가 같이 귀가하던 스물셋 친구는 정치적 집회가 처음이라고 한다. 약간 멍한 표정이다. 시 읽고 맑스 공부하는 물리학도에게 말한다. 오늘 들은 생생한 얘기 참조하면 맑스가 더 잘 읽힐 거다. 노동자들은 자본론을 그냥 삶으로 흡수한다. 막차 손잡이에 매달려 노동과 자본의 적대를 생각한다. 그 화해불가능성. 맑스의 작업은 일개의 악덕 자본가에 대한 성토가 아니다. 그러니 자본가 일명이 개과천선해서 풀리는 문제도 아니다. 맑스가 문제삼는 대상은 전체 사회의 자본, 자본 그 자체. 잉여로 생산된 가치는 사라지지 않고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려 더 막강한 자본으로 행세하며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장악한다. 노동자가 일하고도 자기몫을 못받는 부등가교환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이 교환가치로 전환되는 시스템 자체의 폭력성을 맑스는 지적한다. 노동이 가치증식의 수단이길 중단하고 노동이 자기단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계속,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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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비판요강 - 화폐와 자본 그리고 노동

[스피노자맑스]

<정치경제학비판요강1>172~308 요약 

 

1. 화폐의 기능형태

화폐는 모순되어 보이는 기능들의 복합체다. 맑스는 화폐가 어떤 기능적 형태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 역사, 그로부터 초래되는 위기들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1) 가치척도: 상품들이 교환되기 전에 이미 전제되는 척도로서의 화폐. 척도로서의 화폐는 계산화폐로 기능한다. 가격으로서의 상품은 관념적 화폐로 전환된다.

2) 유통수단: 상품이 화폐로 실현될 수 없다면 그 가격은 단지 상상에 머물 뿐이다. 화폐는 모든 사물의 형리이고 모든 것이 바쳐져야 하는 화신이며, 모든 상품의 전제군주가 된다.

3) 화폐로서의 화폐: 부의 축적. 화폐가 가치척도나 유통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순환. "화폐는 더 이상 수단으로도 척도로도 현상하지 않고 자기목적으로 현상한다“ -> 자본으로서의 화폐 규정을 예감.

 

* 유통수단으로서 화폐도식 W(배추)-G()-W(자전거): 화폐는 유통바퀴로서 유통에 머묾. 영구기관으로서 끊임없는 자기회전.

* 화폐와 화폐를 상품이 매개하는 도식 G()-W(배추)-G(): 화폐가 상품들의 단순한 교환수단으로서, 중간자로서, 결론의 소전제로서 나타나는 형태와는 특유하게 구별된다. “화폐도 유통으로부터 이탈될 수 있음을 보여줌.

 

** 화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유통에서 퇴장시킨다는 것 - 화폐가 부의 보편적인 물적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화폐는 모든 사물 중의 일반자이다. 단순한 유통수단일 때는 종의 형체였지만 부의 일반적 대표자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상품세계의 지배자이며 이 된다. “화폐는 욕망의 한 대상에 그치지 않고 욕망의 유일한 대상이 된다.” -> 치부욕의 탄생. 물욕은 화폐가 없어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부욕은 역사적 산물이다. 치부욕의 발전은 개성의 부재와 공동체의 몰락을 초래한다.

 

2.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1) 교환의 사회이론:

자연은 환율이나 은행가를 낳지 않듯이 화폐도 낳지 않는다.” 화폐를 역사적으로 발전된 생산관계와 상관없이 설명하면서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내재적 대립이 단순히 파악된 화폐관계에서 해소된 것으로 현상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더욱 다시 화폐로 도피한다.

 

2) 화폐제도의 발전은 표면적으로 자유와 평등 체제의 실현. 판매자에게는 구매자가 왕이든 노동자든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심층으로 다가서면 피상적 동등성이 사라진다. 교환가치가 생산체제의 기반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생산물이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의 규정을 따른다는 강제가 내포 됨. “결코 개인의 의지나 직접적인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전제가 아니라 역사적인 전제일 뿐만 아니라, 개인이 이미 사회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정립된다.”

-> 노동과 자본의 대립 잠재 : 일한 만큼 받지 못했다는 부등가교환만을 착취로 이해하고 교환가치 자체의 착취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문제 = 교환가치 체제가 이미 폭력적이라는 것.

 

3) 자본의 규정에 대한 경제학적 통념 비판:

순수유통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교환가치의 단순운동은 결코 자본을 실현할 수 없다. 유통의 외양 뒤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의 전제는 노동에 의한 상품의 생산, 교환가치로서의 상품의 생산이다.”

 

* 자본을 자본이게 하는 형태규정. “생산을 위한 수단이 되는 모든 대상화된 노동이 자본인 것은 아니다.” 만약 자본이 축적된 과거의 노동일뿐이라면, 자본은 모든 사회형태에 존재했으며 전적으로 비역사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잘못은 자본을 인간적 생산의 특수하게 발전된 역사적 단계로 만드는 특유의 규정을 추상해버리기 때문에 일어난다.

 

** 자본은 관계로 파악해야지 사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프루동이 생산물과 자본을 동일시했던 이유는 그가 자본이 관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A는 그 자체로 노예가 아니다. 그는 사회 속에서, 사회에 의해서 노예가 된다.”

 

4) 자본에 대한 규정: 첫째. 유통을 전제하고 유통 속에서도 보존되는 것. 단순유통에서 교환가치의 실현은 사라지는 실현이다. 자본은 유통을 전제하지만 유통을 통해서 또한 보존되어야 한다. “자본은 번갈아 상품이자 화폐이다.” 둘째. 노동을 매개로 증식되는 교환가치. “노동의 단순한 등가물, 노동의 단순한 대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갱신되고 스스로 다시 유통을 시작하기 위해 노동에게만 바쳐지고 노동의 재료가 되는그런 교환가치로 스스로를 정립.

 

5) 대상화된 노동: 아무리 큰 화폐액도 그 자체로 자본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일정함이라는 한계, 그 규정을 넘어서는 무한성이 자본의 규정. 자기 증식하는 가치’. 어떤 사용가치가 자본에 마주하려면 화폐를 증대-배가 시키며 자본으로서 보존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 모든 상품들의 공통적인 실체, 교환가치들로서 그것들의 공통적인 실체는 대상화된 노동이다.

 

3. 자본과 노동의 교환

1) 자본가와 노동자의 교환: 노동자와 자본가의 교환은 등가적이다. 이 교환을 통해 자본가가 받는 것은 타인의 노동에 대한 처분이라는 사용가치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 자신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

* 임노동의 탄생: 임노동은 토지소유에 대한 자본의 행위에 의해 창출된 것. 토지에서 불필요한 입들을 청소하고 대지의 자식들을 그들이 성장한 가슴에서 떼어냄. 생산수단의 폭력적 박탈.

 

2) 절제와 근면, 그리고 박애: “최대의 근면, 노동과 최소의 소비는.. 그가 최대의 노동에 대해 최소의 임금을 받는 결과를 낳고, 노동의 일반적 가격을 낮춘다...일반적인 절약은 그들의 임금이 너무 높다는 것을 자본가에게 보여줄 것이다.” 노동자는 어느 정도 절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다. 다만 환상으로서의 일반적 부가 그를 추동할 뿐이다.

 

* 맑스의 조언: 어느 정도 저축이 가능할 때 (노예와 구별하는 몫) 정서적 향유 범위를 넓혀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한 선동, 신문구독, 강의청취, 자녀양육, 취향발전 등.

 

* 부르주아적 박애의 위선적 구호. “어떤 자본가든 그의 노동자들이 저축할 것을 요구하지만, 단지 그의 노동자만 저축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에게 노동자로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노동자 세계는 결코 저축해서는 안 되는데, 그들은 자본가에게 소비자로 마주 서 있기 때문이다.”

 

** 노동자가 절약을 통해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절약을 통해 집적한 화폐가 자본이 되려면, 그것은 다시 노동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것은 비자본인 노동을 가정하고 요구하는 것. “한 점에서는 지양되어야할 대립이 다른 점에서는 수립된다.” 자본이란 비노동으로서만 자본이므로,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는 노동이 자본에 마주서야 한다.”

 

3) 자본은 비노동이고 노동은 비자본이다: 노동자가 끊임없이 반복된 노동 후에 언제나 살아있는 직접적인 노동 자체만을 교환해야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매일 반복할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라 노동자의 생명력을 낭비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20년 동안 지출할 그의 전체 노동능력을 가져간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매번 생명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20년의 생명을 매번 조금씩 나눠 쓰고 있는 것이다. -> 자본은 노동자의 시체더미다.

 

*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는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주장 반박: 대자적으로 실존하는 노동이 노동자이듯 대자적으로 실존하는 자본 역시 자본가이다. 자본을 개별적인 자본가에서 분리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유일한 노동자에게 맞서 있는 유일한 자본가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계급적 재생산. 뼈아픈 적대의 확인. 자본이냐 생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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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살기 위해

[글쓰기의 최전선]

<경제학-철학 수고>무늬만 책이지 완성본이 아니다. 참고 자료와 초고를 모은 것으로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하다가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출판했다. 이 청년 맑스 풋풋하고도 심오한 저작을 읽고 노동/화폐에 관한 글을 써오라 했더니 민원이 빗발쳤다. ‘너무 어렵다’ ‘괜히 샀다며 한숨짓는가 하면 앞으로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자괴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가장 대박은 대성씨 글.

국가정보원은 20, 칼 마르크스란 아이디로 공산주의 서적을 출판하는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로 김모 씨(25, 무직)를 검거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자신을 유럽에 사는 경제학자로 속여 자본론,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경찰 등과 합동조사단을 꾸리고 김 씨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김 씨가 "씨발 책을 존나 어렵게 써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과제 서두에 능청스럽게 가상시나리오를 적어왔다. 저것이 사실인 줄 알고 기사검색을 해본 친구까지 있었다고 해서 우린 또 깔깔댔다. 웃음도 잠시. 높은 빌딩과 넥타이 대신 건강한 삶을 택했으나 노동조건은 열악하니, 이상과 현실의 격차로 인한 청춘의 백팔번뇌를 기록한 대성씨의 글은 아팠다. ‘노동자의 욕구는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일 뿐이다는 맑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배반해야 한다. 나를 휘감은 거대한 거짓말에 초라한 참말로 부딪쳐야 한다로 끝맺었다.

원망이든 탄복이든 맑스는 사고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다들 책은 완독하지 못했다지만 글은 맑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었다. <경철수고> 대신 <유러피안 드림>을 읽은 유미샘은 미국인이 일하기 위해 사는 반면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한다는 인용구로 글을 열었다. 자신도 4년 전부터 살기 위해 일하기모드로 변환, 하루 평균 6시간 노동으로 줄였단다. 문제는 각종 대출금. 그걸 갚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일하는 코리언 나이트메어가 될지 모르지만 미래 걱정일랑 날려버리고 무지비한 노력보다 심오한 놀이(완전한 몰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고 희열을 느낄 수 있는)”로서의 공부와 '살기 위한 노동'을 병행하겠노라 다짐했다.

대세는 유럽이다.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정화씨는 선진국에서 잠시나마 살아본 경험을 터놓았다. 한국에선 너무 익숙해서 문제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고.

독일은 일요일에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쇼핑도 거의 하지 않았고, 외식할 일도 많이 없었다. 일요일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날이다. 집에 모여서 친구들과 음식을 해먹었다. 한국이었으면 돈 들고 음식점으로 갔을 것이다. 그저 일주일에 돈 못 쓰는 날이 하루 생긴 것뿐인데 노는 방법이 달라졌다. 하루라도 돈에 덜 의지하는 생활을 하다보니 돈이 있어야만 꼭 즐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정화 씨는 이 때의 경험으로 돈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배웠노라고 덧붙였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돈은 전능한 신이기도 하지만 감성의 약탈자이기도 하다. 돈에 의지하면 삶의 선택지가 협소해진다. 삶의 상상력, 삶의 해결책이 빈곤해진다. 이게 다 화폐축적 때문이다. “화폐는 불가능한 일들을 친숙한 것으로 만들며, 자신과 모순되는 것들에게 입맞추도록 강요한다" 그렇다고 맑스가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소유 내용에 태클 걸지도 않았다소유형태를 문제 삼았다. 사적소유. 맑스는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우둔하고 일면적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 대신에 모든 감각들이 단순한 소외, 소유의 감각이 등장했다사적소유는 대상과 관계 맺는 방식을 모조리 바꿔놓는다. 대상을 낯설게 한다. 자연은 개발해야할 대상, 인간은 착취의 수단이 된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대가 생겨버리는 것. 그래서 맑스에게 사유재산의 지양은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의 해방을 뜻한다.

25세 청년의 사유가 이리도 빛날 수 있는가.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경철수고> 뒷부분 화폐편에는 괴테의 <파우스트> 일부와 세익스피어의 시구도 인용해 놓았다. 맑스의 필체가 힘이 넘치고 시적 아우라가 흐르는 건 그가 문학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셰익스피어. 매일 아침 딸에게 셰익스피어를 읽어주고 매년 셰익스피어를 반복적으로 읽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무튼 청년 맑스는 인간의 유적본질의 회복을 중시했다. 이는 부르주아 인간학에 열렬히 인용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맑스는 본질-현상의 이원론을 뒤집는다. 인간의 본질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라고 쓴다. 본질이냐 관계이냐,뭐라고 말해도 좋다. 청년이든 중년이든 맑스와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응시하며 자기를 배반하지 않고 사는 법을 고민하게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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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데올로기 - 지반을 떠난다는 것

[스피노자맑스]

 

홍세화 씨가 한국에 와서 TV를 보다가 가장 충격을 받은 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부자되세요’ 하나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각각 카드회사와 건설회사 TV광고 카피이지만 범국민적 표어로 사용될 만큼 히트를 쳤다. 이는 돈이 삶의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준 광고이기도 하다. 뭐 사실,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인생목표로 부여받고 자란 우리는 성장과정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얘기라 익숙했지만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볼 때는 저 물신적인 표어가 몹시 거슬렸던 것이다. 이렇듯 ‘바깥쪽에서’ 보는 일은 중요하다. 바깥쪽은 객관적인 장소가 아니라 객관성 자체가 지역적인 공동주관성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장소(가라타니 고진)이기 때문이다.


스는 독일 철학을 바깥쪽에서 바라보고 거기서 철학적 담론(독일이데올로기)의 병리적인 징후를 읽어낸다. 독일이데올로기 본문의 첫 구절을 보자. ‘독일에서의 비판은, 극히 최근의 시도에서조차, 결코 철학이라는 영역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전반적인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해 본 적이 없으며, 사실상 그것의 모든 문제들은 한정된 철학 체계, 헤겔의 그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비단 그것의 답변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문에서조차 신비화가 행해지고 있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보편적이고 철학적 전제들을 검토하고 문제들이 성장한 그 지반을 문제 삼아 그 토대들, 전제들, 배치들의 역사적 형상을 다루는 작업이다. 그리고 여기서 관념론적 허구들이 도출되고 있음을 밝혀낸다. 상상 내지 표상의 체계인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배치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언명도 이 맥락에서 나온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시대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우리시대의 지배적 사상, 삼성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면 즉시 이해되는 대목이다. 삼성이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이라는 믿음.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도 망할 것이라는 망상. 삼성은 아무도 못 건드린다는 공포. 그래서 삼성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무노조 경영, 족벌경영이 관철되고 있으며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과 희귀암으로 100여 명이 죽어가도 버젓이 이건희는 큰 소리치고 활보한다.

역시 ‘바깥쪽에서’ 대한민국을 사유하는 박노자 씨도 늘 안타까워한다. “왜 노동운동이 발달한 한국에서 삼성불매운동이 안 일어나는가 모르겠다”고.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의 말에 답이 있다. 김 위원장은 삼성노동자들이 이건희의 무노조경영철학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그래서 직원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한다고 했다. 주변에 보아도 거의 임원급으로 '삼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수적으로는 삼성족벌은 대한민국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내 안의 이건희’가 사는 시민들,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되길 꿈꾸는 백만학도들이 삼성을 지탱한다. 지배적인 사상은 숫자가 아니라 경향성이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표현”이라며 “혁명적 사상의 출현은 이전의 보편적 사상,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삼성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는 '보편적 사상' 즉 우리사회 지배계급인 삼성家 이데올로기를 '특수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삼성이 급부상하고 삼성예외론이 나온것은 20년 전즈음의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삼성이 원래부터 나라를 먹여살린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고구마는 190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구석기시대부터 배고플 때 밥대신 고구마를 먹었다고 아는 것과 유사하다. 

맑스는 '단지 일상적인 분명한 것'을 지각하는 속물적인 지각'을 비판한다. "감성적 확신의 대상조차도...그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옛날로부터 직접 주어진, 영원히 항상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생산물이고 사회 상황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과 싸우는 노동자들은 마치 80년 광주처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다. 삼성이 장악해버린 우리사회의 지반과 질서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맑스의 역사유물론은 지반을 떠나서 생각하는 것이다.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배우는 지금, 삼성의 ‘지반을 떠나서’ 삼성을 생각한다. 맑스가 말한 “실천적 전복”을 궁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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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쓴 번역투를 알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연구원들은 생계수단이 크게 두 가지다. 대학이나 학원에서 강의하기 그리고 책 쓰거나 번역하기. 나의 스승이자 동료인 박정수도 대학에 출강을 나가고 지젝이랑 라캉 책을 몇 권 번역했다. 처음에 그에게 배울 때 강의안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철학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문체의 꼬임이 거슬렸다. 한국어이지만 번역이 필요했다. 집에 와서 강의안을 ‘나의 언어’로 바꿔가며 정리하고 이해했다. 그는 국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명색이 국문학도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문체얘기가 나왔다.

“내가 예전엔 김훈 글을 읽을 때는 김훈 문체처럼 됐는데 책 몇 권 번역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번역투로 문체가 변하더라고. 큰일이야~^^;”

다행히도 박정수는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매이데이를 웹진에 연재하면서 자기 문체를 되찾고 있다. 암튼 가랑비에 옷 젖는 게 제일 무서운 법, 대학이나 언론의 지식생산과정에서 번역투의 오남용이 자연스레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번역투의 표현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 회의를 보다 즐거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좋은 제안을 보내주십시오.

* 새달 중순경 회의를 가지려 합니다.

*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 더 일찍 제출할 터였는데 미안합니다.

*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문제없이 읽힌다고? 번역투에 정든 거다. -.- 위의 예문의 특징은 1. 피동표현 2. 에두르는 완곡법 표현 3. 생명체화한 활유법. 4. 빈번한 지시어 사용 등이다. 피동형은 글심을 약하게 하고, 완곡법은 문장이 늘어진다. 고쳐보자.  

* 이 책은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 즐거운 회의가 되도록 좋은 생각을 보내주십시오.

* 새달 중순께 회의하겠습니다.

* 계획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 오늘 중으로 해야 합니다.

* 더 일찍 내지 못해 미안합니다.

*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을 행한다, ~을 갖는다, ~을 시키다도 대표적인 번역투의 말이다.


* 7년간 연구를 행한 끝에 - > 7년간 연구한 끝에

* 전문적 조사를 행하고서야 -> 전문적으로 조사해야

* 재판이 행해진 뒤에 -> 재판이 끝난 뒤에

* 단독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 단독회담의 자리에서

* 환경을 개선시키다 -> 환경을 개선하다

* 계획을 구체화시키다 ->계획을 구체화하다

(예문인용; 글고치기 전략)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파리>를 아무데나 폈다. ‘의’와 ‘것’의 한 문장에 기본 서너 개^^;  예문을 고쳐보자.

* 보들레르의 작품에 들어 있는 알레고리적인 것을 연구할 때 바로크적 요소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중세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 보들레르 작품의 알레고리적인 것을 연구할 때 바로크적 요소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중세적 요소를 간과함은 오류다. 
 

*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은 오직 그것을 소유할 때만 비로소,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 존재할 때 또는 우리에 의해 사용될 때라야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칼 맑스 <역사유물론>

->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기에, 어떤 사물은 오직 그것을 소유할 때만, 즉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 존재할 때 또는 우리 사용할 때라야 우리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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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사적소유 그리고 존재의 빈곤

[스피노자맑스]

* 소외와 사적 소유  

<경제학-철학 수고>는 경제적 개념(사적 소유/노동/자본/토지)과 철학적 개념(소외)을 절묘하게 엮은 대단한 역작이다. 맑스는 과학은 발생을 설명해야 한다고 봤다. 즉 무엇이 어떻게 산출됐는가를 따지고 든다.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에 대한 개념적 해명은 없다. 왜 어디서 ‘사적 소유’가 발생했는가 묻지 않는다는 것. 맑스는 사적소유를 전제가 아닌 산출물로 다뤄야한다고 보았다. 심연을 파헤쳐 근거의 근거없음을 폭로하는 이 같은 작업은 니체의 계보학 작업과 유사하다.  

“노동자는 부를 보다 많이 생산할수록 더 가난해 진다.” 이 역설적인 사실에서 맑스는 출발한다. 사물 세계에서 가치증식이 이루어질수록 인간세계의 가치절하가 비례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헤겔의 철학적 개념 ‘소외’로서 포착한다. 소외란 무엇인가. 본래의 소유자와 소유물이 분리되어 소유자에 대해 외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맑스는 노동하는 인간이 경험하는 소외를 크게 네 가지 차원에서 지적한다.

1. 노동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생산물이 생산자에 대립해서 낯선 존재로 나타나는 것.
2. 생산행위 자체의 소외. 생산물의 외화는 사실상 생산 자체의 외화가 요약된 것에 불과하다. 활동 자체가 그 주체로부터 분리된다.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서 육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낀다.”  

3. 유적 본질의 소외.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서 유적 성격을 소외시킨다. 유적성격은 자기로부터 분리가 가능해 세계를 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소외된 노동에서는 인간의 유적 성격, 즉 자유로운 활동을 오로지 육체적 실존(동물적 삶)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4. 인간의 소외, 인간만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낯선 힘이다. 인간이 빼앗기는 것은 고스란히 다른 인간에게로 간다. 소외의 문제란 신학이나 종교, 철학의 문제이기 전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 즉 사회의 문제다.  

소외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 능력의 쇠퇴와 인간 욕망의 협소화(천박화)와 다름 아니다. 이처럼 소외된 노동, 외화된 노동의 필연적 귀결은 사적소유다. 사적소유 때문에 소외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소외된 노동의 결과가 사적소유 생겨난다. 

* 소외된 노동 극복  

인간의 사회적 현존재로서의 회귀이다. 인간은 개인일 때조차 총제적으로 존재한다. 사적 소유의 세계에서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다는 감각이 근본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적 소유를 지양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을 해방하는 일이고 다른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욕망하기 전에 그것을 욕망하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공산주의란 감성의 혁명적 전환을 뜻한다.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 세계사 전체의 노동이다. 조야한 실제적 욕구에 붙박인 감각은 역시 제한적 감각만을 가진다. 근심에 가득찬 궁핍한 인간은 어떤 훌륭한 연극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각을 갖지 않고, 광물상인은 단지 광물의 상업적 가치만을 볼 뿐이며, 광물의 아름다움이나 그 특유한 본성은 보지 않는다. 소외된 노동이 지배하는 곳에서 경제적 빈곤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의 빈곤이다. 소외의 지양은 결국 인간적 감각의 창조이다. 가난한 자는 세계가 빈곤한 자다.  

"인간은 인간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매개(돈)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네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네 생활 표현을 통해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네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 조야한 공산주의  

맑스는 ‘경철수고’에서 공산주의를 보편적 사적소유라고 말한다. 사적 소유를 단지 외양으로만 판단해서 폐지하려 들 경우 우리는 조야한 공산주의가 부딪힌 문제에 빠져든다는 것. “조야한 공산주의는 지양된 사적 소유의 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실상은 보편적 사적 소유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이다.” 사적 소유를 공동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사적소유를 보편화하는 것은 노동자를 지양하지 않고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 확장하는 것과 같다고 봤다.

(고병권샘과 공부한 내용 일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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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자본론

[스피노자맑스]

사실, 자본론 서문 읽고 가슴이 먹먹했다. 당황스러웠다. 다 읽기도 전에, 내용이해도 충분치 못한 책에 슬픔으로 반응하는 이 과도함이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았다. 왜 슬프냐고 물어보면 딱히 펼칠 논거도 없다. 막연한 느낌인데, 내 아무리 낭만주의자이지만 어려운 공식 잔뜩 들어있는 자본론 읽으면서 이런 기분이 들줄 몰랐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 발전의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한 사회가 비록 자기 발전의 자연법칙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자연적인 발전단계들을 뛰어넘을 수도 없으며 법령으로 폐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사회는 그러한 발전의 진통을 단축시키고 경감시킬 수는 있다.” 

서문에 나온 저 문장들을 보고 맑스의 따뜻한 감수성에 감동했다. 맑스가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서 ‘자본론’을 쓴 이유는 고통스러운 세상, 그 고통의 원인을 밝혀내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맘대로 믿어버렸다. 맑스가 치밀하고 과격한 체제전복세력인줄 알았는데 복실복실 털복숭이 온도 그대로, 인정 많은 따듯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긴, 대상이 무엇이 됐든 '사랑'이 아니라면 자본론이라는 대작을 25년에 걸쳐 쓰지도 못했겠지. 자본론에서는 악덕기업주라기보다 최소한의 양심을 갖춘 '자본가와 지주'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도 맑스는 쿨한 태도로 예를 갖춘다.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인 한에서다.” (6)

맑스는 착취문제를 특정 개인의 도덕성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본가와 지주를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산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에 대한 호의와 호기심 따라 더듬더듬 작은 봉우리 하나 넘었다. 1편 ‘상품과 화폐’ 지나고 2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에 접어드니까 조금 가슴이 트였다. 2편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은 내용이 잘 읽히고 그만큼 감동도 크다. 예수, 석가모니 등 대가가 그러하듯 맑스 또한 비유로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문학적인 수사와 실감나는 묘사로 단원을 마무리 짓는다. 드라마 예고편처럼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도록 만든다. 이를 테면 제6장은 인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으로 소비되는 구조를 설명하는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 부분인데, 엔딩씬이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우리의 등장인물들의 면모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의 화폐소유자는 자본가로서 앞장서 걸어가고, 노동력의 소유자는 그의 노동자로서 그 뒤를 따라간다. 전자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231)  

맑스는 보았던 것이다. 자기의 몸뚱이를 밑천으로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의 고단한 눈빛을, 축쳐진 어깨를, 비스듬히 닳아진 구두 뒤축을. 그리고 의문을 품었다. 왜 사업가는 눈이 반짝이고 왜 노동자는 겁에 질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됐다. 자본가가 시장에서 오븐기계, 밀가루, 노동자 등 100원어치를 사서는 공장에 들어가면 다음날 110원짜리 빵으로 만들어 팔아 이익을 챙겼다. 설비, 원료, 노동력...등 저것들 중에 어떤 요소가 이익을 낳는 걸까? 유심히 살펴보니 기계는 쓰면 닳고, 밀가루도 쓰면 사라진다. 그런데 노동력이란 상품은 소비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생산했다. 자본가에게 10원어치의 이익을 낳아주는 황금알은 바로 ‘노동력’이었다. 더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맑스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공장 속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잉여가치가 생기는 과정을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 다룬다.  

자본론에 감돌았던 묘한 슬픔의 서정이 ‘나의 오버’가 아니었다. 분명 맑스는 비통함에 잠겨 이 책을 썼으리라 사료된다. 다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적인 장면, 노동자의 낙담한 표정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그 열받음으로 사회의 정치경제구조를 낱낱이 해부한 것이다. 세미나 끝나고 고병권 샘에게 말했다. "맑스의 감수성이 놀랍고 자본론이 그래서 더 감동적"이라고. 그랬더니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노동자의 슬픈 눈빛을 읽어낸 맑스가 자본주의를 멈추게 했다” 평했다고 전해줬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 의문부호를 던지고 그것의 심연까지 파고들어간 맑스를 통해, 최고의 감성이 최고의 이성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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