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쓴 번역투를 알고 있다

[글쓰기의 최전선]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는 연구원들은 생계수단이 크게 두 가지다. 대학이나 학원에서 강의하기 그리고 책 쓰거나 번역하기. 나의 스승이자 동료인 박정수도 대학에 출강을 나가고 지젝이랑 라캉 책을 몇 권 번역했다. 처음에 그에게 배울 때 강의안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철학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문체의 꼬임이 거슬렸다. 한국어이지만 번역이 필요했다. 집에 와서 강의안을 ‘나의 언어’로 바꿔가며 정리하고 이해했다. 그는 국문학으로 박사를 받았다. 명색이 국문학도가 왜 이러나 싶었는데 얼마 전 우연히 문체얘기가 나왔다.

“내가 예전엔 김훈 글을 읽을 때는 김훈 문체처럼 됐는데 책 몇 권 번역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번역투로 문체가 변하더라고. 큰일이야~^^;”

다행히도 박정수는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매이데이를 웹진에 연재하면서 자기 문체를 되찾고 있다. 암튼 가랑비에 옷 젖는 게 제일 무서운 법, 대학이나 언론의 지식생산과정에서 번역투의 오남용이 자연스레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번역투의 표현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 회의를 보다 즐거운 것으로 하기 위하여, 좋은 제안을 보내주십시오.

* 새달 중순경 회의를 가지려 합니다.

*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 오늘 중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 더 일찍 제출할 터였는데 미안합니다.

*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시킨 것일까요.  

문제없이 읽힌다고? 번역투에 정든 거다. -.- 위의 예문의 특징은 1. 피동표현 2. 에두르는 완곡법 표현 3. 생명체화한 활유법. 4. 빈번한 지시어 사용 등이다. 피동형은 글심을 약하게 하고, 완곡법은 문장이 늘어진다. 고쳐보자.  

* 이 책은 젊은이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 즐거운 회의가 되도록 좋은 생각을 보내주십시오.

* 새달 중순께 회의하겠습니다.

* 계획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 오늘 중으로 해야 합니다.

* 더 일찍 내지 못해 미안합니다.

*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을 행한다, ~을 갖는다, ~을 시키다도 대표적인 번역투의 말이다.


* 7년간 연구를 행한 끝에 - > 7년간 연구한 끝에

* 전문적 조사를 행하고서야 -> 전문적으로 조사해야

* 재판이 행해진 뒤에 -> 재판이 끝난 뒤에

* 단독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 단독회담의 자리에서

* 환경을 개선시키다 -> 환경을 개선하다

* 계획을 구체화시키다 ->계획을 구체화하다

(예문인용; 글고치기 전략)

 

벤야민의 <보들레르의 파리>를 아무데나 폈다. ‘의’와 ‘것’의 한 문장에 기본 서너 개^^;  예문을 고쳐보자.

* 보들레르의 작품에 들어 있는 알레고리적인 것을 연구할 때 바로크적 요소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중세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 보들레르 작품의 알레고리적인 것을 연구할 때 바로크적 요소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중세적 요소를 간과함은 오류다. 
 

*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사물은 오직 그것을 소유할 때만 비로소,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 존재할 때 또는 우리에 의해 사용될 때라야 비로소 우리 것이 된다.” 칼 맑스 <역사유물론>

-> 사유재산이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기에, 어떤 사물은 오직 그것을 소유할 때만, 즉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 존재할 때 또는 우리 사용할 때라야 우리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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